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9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97화(397/817)
***
여명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어둠은 그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촉각,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불분명했고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꿈에서 겪던 어둠은 아니었다. 이건 지극히 사실적인, 현실의 어둠이었다.
그제야 여명은 자신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유가 눈이 없어서라는 걸 깨달았다. 덤으로 귀도 없었고, 팔도 없었다.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코앞에서 폭격에 휘말렸으니까.
변경백처럼 핵무기에 맞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아니 그보다, 내가 살아있기는 한 건가? 여명은 새삼 자신에게 물어봤다.
누구인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문뜩 한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 그는 살아있었다. 아마도 최악의 방식으로.
여명은 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여야 할 놈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래, 죽일 놈.
‘아야톨라, 네크로맨서, 그리고 한국 정부.’
생각을 따라 살기가 일어났다. 살기는 주가시빌리를 불렀고, 주가시빌리는 그에게 불멸을 강요했다.
그렇게 살기 속에서 찰나, 혹은 한참이 흐른 뒤.
여명은 어렴풋이 자신의 육체를 느낄 수 있었다.
팔다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사지를 오므려 몸통을 방어한 덕분이었다. 척추뼈는 익어버렸고, 그 외에 남아있는 뼈는 대부분 부러지거나 날아가 버렸다.
가장 심각한 건 내장이었는데, 뭐 하나 남아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심장이 있던 자리에 무장 혈청이 단단하게 굳어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간단히 말해, 현재 여명은 두개골과 척추뼈만 남아있는 시체였다.
‘이런 꼴이니 아무것도 못 느끼지.’
이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나? 여명은 다시 한 번 질문과 함께 주가시빌리를 일으켰다.
그러자 아직 주변에 남은 살기들, 혹은 그에게 남은 살기가 호응하며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여명은 스스로의 회복력에 감탄했다. 타버린 신경이 자라나고, 뼈가 돋아나며 그 위로 혈관과 근육이 따라왔다. 장기와 피부는 문자 그대로 재생되었다.
이치를 벗어난 수준의 회복력.
시시각각 돌아오는 감각 속에서, 여명은 생각했다.
스탈린은 어째서 이런 무술을 만든 걸까? 단순히 미국을 이기기 위해서? 아니면 불멸을 원해서?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직접 만날 일이 있으면 물어봐야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질 때쯤, 여명의 몸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재생되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재생했다. 익어버리다 못해 증발한 수정체가 돌아오며 황금색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재빨리 피눈물의 환상으로 만든 옷과 가면을 뒤집어썼다.
이제 막 재생된 그의 시야로, 그와 비슷하게 재생 중인 아야톨라가 보였으니까.
몸 곳곳에서 촉수를 꿈틀거리고, 입가에 타락석 가루를 질질 흘리는 여우 수인.
녀석 또한 여명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어떻- 게? 미사일- 직격, 살아남았냐? 너도, 타락, 석- 먹었-냐?”
저거 또 멍청해졌네. 아직 뇌를 재생하지 못한 건가? 여명은 무장 혈청을 꺼내 쥐며 말했다.
“아니. 척 보면 몰라? 더 좋은 걸 먹었다.”
“더, 더- 좋은 거? 너, 너- 설-마- 성녀, 먹었냐?”
“….”
움찔, 갑자기 튀어나온 성녀란 단어에 놀란 여명이 녀석을 노려보길 잠시.
어느새 재생을 끝낸 아야톨라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뭐야, 왜 멈췄냐?”
뒤늦게 그게 아야톨라의 통찰력이 아니라 정신 나간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여명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
-일이 더럽게 꼬였다.
구더기 공주의 긴급 연락을 받은 일행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지금 당장 시드니로 달려가자는 쪽과 우선 상황 파악부터 하자는 쪽.
전자의 대표는 성녀였고, 후자의 대표 또한 성녀였다.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상 그랬다는 것이다.
첫 연락을 받은 직후, 성녀는 역시 자신이 따라갔어야 한다며 급히 호주행 비행기를 수색했다.
물론, 1분도 지나지 않아 호주로 향하는 모든 항공편이 막힌 것을 깨닫고 분노를 토해내긴 했지만.
특히 날지 못하는 오르세 라날이 그녀의 분노를 뒤집어썼는데, 콜라값도 못하는 파충류란 말을 들은 용이 살짝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아무튼, 시간 내로 여명을 도우러 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성녀는 갑자기 침착함을 되찾더니,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며 예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
“귀쟁이! 귀쟁이년 어딨어!!”
성녀는 문을 박차고 나와 소리쳤다.
그녀의 추태를 보고 있던 네티는 이 자리에 쇠미리와 시리가 없음을, 그리고 쇠미리가 모종의 방법으로 여명에게 향했음을 직감했다.
아마 그녀를 드레이테리얼로 보낼 때 사용했던 차원문 생성기 비스무리한 걸 사용했으리라.
아카데미에서 시드니까지 그리 멀지도 않으니, 구더기 공주의 연락을 받은 시점에서 바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왜 하필 자신이나 세티 언니가 아닌 시리를 데리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형부는 어떻게 돼요?”
네티가 성녀에게 물었다. 예지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몰라서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성녀는 꾸욱- 목에 걸린 성물을 쥐며 대답했다.
“여명의 미래는 잘 보이지 않아서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오늘 호주와 시드니는 실수의 대가를 치를 거야.”
실수? 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네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아카데미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긴급 호출입니다. 학생들은 기숙사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전 학생들은 기숙사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결계.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어 타락석이 만든 이공간을 지칭하는 단어.
아카데미의 피혁 사제는 하수도의 일부를 외부와 차단했고, 시카고의 꿈을 흘리는 자는 아예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그리고 지금, 피를 흘리는 자가 필사적으로 펼친 결계는 앞선 두 결계의 중간 어딘가에 가까웠다.
시드니 일부를 통째로 뜯어온 듯한 모습이었지만, 모든 건물과 바닥이 살덩이로 이루어져 있는 풍경.
창문 대신 눈동자가, 건물 철근 대신 짐승 척추뼈가 달린 광경은 보기만 해도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겨운 건, 이제 막 재생을 끝낸 피를 흘리는 자 본인이었다.
“내가 타락석을 쓰게 만들다니….”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노려보는 눈빛이, 걸음걸이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기세에서 욕망이 느껴졌다.
성욕? 아니, 저건 식욕이었다. 여명을 산채로 씹어 먹고 싶은 욕망.
고작 결계 하나의 변화치고는 극적이었다. 하긴, 그러니 타락석에 저렇게 연연하는 거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꿈을 흘리는 자와 다시 싸워도 쓰러트릴 자신이 있는데, 하물며 천벌조차 통하지 않는 아야톨라라면야.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밖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서 수단을 가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다면야…
여명의 용의 심장을 열고 숨겨놨던 수단들을 꺼내려던 그때.
-꺄아아!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마나를 모르는 민간인의 그것이 틀림없는 소리.
여명이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자, 아야톨라가 씨익 웃었다.
“결계에 들어온 게 우리뿐만은 아닌가 보군.”
“….”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건가. 아쉽지만 그런 사람 하나하나까지 챙길 여력은 없었다.
여명은 비명을 외면했다…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느껴지는 감각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혹은 그 이상.
‘…설마, 대피소가 통째로?’
그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아야톨라가 바닥을 짚었다. 녀석은 늘어난 힘을 과시하려는 듯, 어마어마한 양의 살덩이를 조형하기 시작했다.
쿠구궁…!
녀석의 권능을 따라 주변 지형이 통째로 움직였다. 건물이 움직이며 거대한 살덩이 괴수가 되고, 작은 돌 파편과 자동차들마저 그대로 괴물이 되었다.
흡사 괴수의 군대라고 모자라지 않을 모습.
녀석은 그 괴수로 여명을 공격하지 않았다. 민간인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본주의와 상관없이 인민을 구한다… 어디 지금도 그럴 수 있나 볼까?”
녀석은 그대로 살덩이들을 전진시켰다. 여명이 혀를 차며 녀석에게 달려들었지만, 불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이 닿기도 전에, 녀석이 주변의 살덩이와 동화되어 사라져버린 까닭이었다.
-캬하하하! 어디 인민을 구해봐라! 조금 전의 그 검술이 얼마나 도움이 되나 보자!
조금 전에 본 용사의 무술이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아야톨라는 그렇게 지껄였다. 여명은 한마디로 녀석의 입을 닥치게 했다.
“혀가 길다.”
그는 괴수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주변을 뒤덮은 살덩이 속에서 아야톨라를 찾느니, 사람들을 지키면서 기회를 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비각술을 펼치며 살덩이들을 앞지를 잠시.
저 멀리 돌과 살덩이가 뒤섞인 동굴에서 사람들이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 지하철 입구거나 대피소 입구였으리라.
“오, 신이시여….”
어쨌건, 간신히 바깥으로 기어 나온 그들을 반겨주는 건 괴수의 파도였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제자리에 무릎 꿇거나, 다시 구멍으로 도망치던 그때.
쾅- !
여명이 불길과 함께 괴수 떼를 앞에 떨어졌다. 주와이외즈로 길목들을 통째로 틀어 막은 여명은 곧바로 무릎 꿇은 민간인에게 다가갔다.
“아래 몇 명 있습니까?”
“예? 예?”
민간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자, 여명이 소리쳤다.
“몇 명이나 이곳에 끌려온 거냐고! 대답!”
“그, 그게… 저도 잘….”
“정확한 숫자는 됐고, 대충 어림짐작하면?”
“이, 이천 명? 오천 명?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지하철과 내부 방공호가 가득 찰 정도라 정확한 숫자는….”
지하철이 가득 찼다고? 여명이 곧바로 마나를 펼쳐 지하를 확인해보자,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 명은 무슨, 적어도 만 명은 되잖아.’
게다가 개중에는 익숙한 마나도 있었다. 구더기 공주와 세팔리.
일이 꼬여도 참 더럽게 꼬인단 말이지. 여명은 일이 끝나면 호주 총리의 명치를 한 대 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다짐은 다짐이고, 당장은 현실을 봐야 했다. 몰려오는 괴수들, 아래에 우글거리는 민간인, 숨은 아야톨라…
고민이 길어지는 찰나, 그는 아직도 겁에 질린 민간인에게 물었다.
“혹시, 지하에도 살덩이가 있습니까?”
“아, 아뇨… 승강장 계단 아래에는 아무 것도….”
“그럼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세요. 지하철에 다른 입구는?”
“다른 역으로 향하는 철로가 하나….”
“철로… 그러면 만약 입구가 뚫리면 그곳으로 피해… 쓰읍, 아래 사람 중 노약자는 얼마나 됩니까?”
“그, 그게… 대부분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환자들과 노약자들과 그 가족이라….”
다른 역으로 도망치거나 싸움을 돕는 건 무리겠군. 여명은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그사이, 살덩이 괴물들이 불길을 들이박기 시작했다.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네.”
판단을 끝낸 여명은 주먹을 꽉 쥐어 인벤토리에서 비장의 패를 꺼냈다.
-음 어쩐지, 최근 놀게 해주더라니.
-이건… 피를 흘리는 자의 냄새로군.
-여긴 또 어디야? 드디어 빨갱이 잡나?
-제 딸은 찾으셨나요?
용의 둥지를 지키는 벨라디바와 용병을 제외한 데스나이트 4인. 혹시 몰라 미리 완전 무장한 네 명은 주변을 둘러보며 각자 할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명은 그들에게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명령부터 내렸다.
“긴급 상황이니까 긴말 안 하겠습니다. 듀크 중령님과 두메아 가주님은 입구를 지켜주세요! 세디달은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을 지켜주시고, 바라나는 저와 함께 갑니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음에도, 데스나이트들은 순순히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당장 눈앞에 괴물들이 몰려드는 판에 질문을 던질 정도로 멍청한 전사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전혀 의외의 목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 잠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
여명이 고개를 들어보자, 별과 세계수가 새겨진 판초 우의를 입은 여자 셋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착! 가볍게 땅에 착지한 세 사람 중 가면을 쓴 금발의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세계수 혁명단! 붉은 별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자세와 목소리. 지켜보던 민간인의 입이 떡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뒤에 있던 은발의 엘프가 고개를 저었다.
“…동지, 제발.”
“아니, 이럴 때 홍보해야, 인간과 엘프 사이가 나아지지….”
그제야 어색함을 느낀 쇠미리는 가면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그래도 적절한 때에 지원 온 거 맞죠?”
“응, 딱 중요할 때 왔어.”
그렇게 말한 여명은 두 엘프 뒤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바라봤다.
“…처제.”
“네, 형부.”
“…어머니께서 아래에 계셔. 내려가서 지켜주겠니?”
“물론이죠.”
그렇게 대답한 시리는 쇠미리와 똑같은 가면을 썼다. 여명은 다시 쇠미리를 보며 말했다.
“두메아 가주님과 세디달을 이곳에 남겨둘게. 네 사람이 함께 입구를 지킬 수 있지?”
“맡겨만 주세요. 그러려고 온 거니까.”
대화는 그것으로 족했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왜 세 사람만 왔는지는 나중에 물어봐도 충분했으니까.
여명은 전전대 성기사단 단장인 바라나 카시와 미군 출신 듀크 중령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저와 함께 가시죠. 죽일 놈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
듀크 중령은 몰려드는 살덩이 괴물들을 보며 눈썹을 휘었다. 여명은 그에게 마탄을 쥐여주며 한 번 더 대답했다.
“예, 한 놈만 죽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