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99)
을 위한 세계는 없다-399화(39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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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 감자토프는 푸른 쥐 시드니 지부에서 십수 년간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다른 푸른 쥐의 일원들이 그러하듯, 소련 출신인 그는 자본주의 국가인 시드니에서 적응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가 의외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요식업의 재능.
위장용 가판 음식대 하나로 시작한 사업은 어느새 가판 자리 여섯 개와 시내의 음식점 두 개, 그리고 상가 건물 한 채와 기타 금융 자본으로 불어나 있었다.
사장인 모리네가 직접 정보원을 그만두고 요식업에 뛰어들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물론, 카자는 거절했다. 그는 푸른 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요식업은 푸른 쥐의 형제들을 돕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돈이 얼마나 많이 벌건, 가족을 돕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뭐, 아무튼.
이제 노년을 바라보는 카자의 바람은 조카 딸 같은 성녀님과 푸른 쥐의 동료들에게 합법적으로 재산을 넘겨주는 것뿐이었….
“어… 죄송합니다?”
그때, 듣고 있던 여명이 갑자기 사과했다. 말이 끊긴 카자는 조카 도둑놈… 아니, 조카 사위를 보며 물었다.
“죄송하다고?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재산 말입니다. 이 음식점도 그렇고, 저 때문에 다 날리셨잖습니까.”
그렇게 말한 여명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깨진 유리창과 허물어진 벽 너머, 개판이 된 시드니 시내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 위로 비쳤다.
무슨 핵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풍경.
그나마 피를 흘리는 자가 만든 살덩이가 전부 사라져서 망정이지, 살덩이를 본 몇몇 시민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할 정도였다.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그를 따라 폐허를 보던 카자는 피식 웃으며 부서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필요 없네. 내 재산이야 아직 가게 하나 남았고, 나머지도 다 보험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일도 쉬고 새 건물도 짓지 뭐.”
“….”
“자네가 굳이 사과할 점이 하나 있다면… 우리 조카 성녀님을 채간 걸 사과해야겠지.”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련한 정보원인 카자는 그가 반론을 꾹 참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성녀님의 실체가 어떻건 간에, 그에게는 아직도 귀엽고 어린 조카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여명은 감히 그런 조카를 첩으로 삼으려는 도둑놈이었고.
‘큰 누님을 구한 일만 아니었으면 쏴버리는 건데.’
여명이 알았으면 기겁할 상상을 떠올린 카자는, 잔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살린 사람이 몇 명인데. 고작 재산 피해 따위를 신경 쓰나.”
여명은 기포가 올라오는 잔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네요. 솔직히 감사패를 받아도 모자랄 정도인데.”
“….”
“까놓고 말해서, 재산 피해 대부분은 폭격을 날린 호주 군 탓이긴 해요.”
우연의 일치일까, 지직- 깨진 가게 TV에 불이 들어왔다. 마치 그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의회는… 이번 사태의… 피해 구제를 위해… 추가 예산을…]심각한 얼굴로 돈 이야기를 꺼내는 정부 관계자의 목소리.
그것을 본 여명이 뚱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홀짝였다. 괴물 같던 붉은 별치고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 카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랑스러워하게. 이런 사건에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서 고작 130명이라니. 역사에 남을 정도야.”
그러자 이번에도 TV가 호응했다.
[사건 현장에서 붉은 별과 세계수 혁명단을 보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 그 빨갱이들이 괴물들한테 불을 막…! 아주 눈이 아플 정도였다니까요? 막, 파바박! 마법을 쏘는데…! 다음 시장 선거에서는 노동당 후보를 찍어야 할까요?]생존자로 보이는 아줌마와 뉴스 기자의 대화.
아줌마가 어찌나 호들갑을 떠는지, 여명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을 정도였다.
물론,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뒤이은 인터뷰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대체 성검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정부는 뭘 했고요? 칭총들한테 세금을 낭비할 때는 언제고, 정작 중요할 때는…] [프랑스에게 항의해야 합니다. 오귀스트 같은 대량 학살자가 연락도 없이 우리나라에 오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빨갱이들이 우릴 구한 게 아니라, 빨갱이들이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여러분! 스탈린은 살아있습니다!]이런 대형 참사에 늘상 따라붙는 정치적 갈등, 음모론, 눈 돌리기, 그리고 광기까지.
전체 인터뷰나 뉴스 내용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그 일부가 눈길을 끄는 법이었다.
-쯧, 호주 놈들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질 않아.
그때, 데스나이트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군복을 입은 듀크 중령이었다.
여명의 옆자리에 앉은 그는 카자를 향해 대뜸 술을 주문했다.
-주인장, 위스키 있나?
“미국 술 없습니다.”
-왜 그쪽이 소련 출신이라?
“아뇨, 냉장고가 다 박살 나서, 맥주랑 주스밖에 없습니다.”
-….
묘한 신경전이 이어지길 잠시. 어느새 잔을 비운 여명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먹을 건요?”
“미트파이랑 뭐… 아침에 해놓은 요리 몇 개 남았지. 먼지를 털면 열 명은 거뜬히 먹일 수 있을 거다. 왜, 배고프냐?”
“저 말고, 배고픈 사람들이 올 거라서요.”
“뭐?”
그때, 밖에서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비행기가 날아온 듯한 소리였다. 듀크 중령이 놀라 총을 들었고, 뒤이어 카자 또한 테이블 아래에서 권총을 뽑았다.
정작 여명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카자에게 미트 파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
카자는 들고 있던 권총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는 사람?”
“예.”
카자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구멍 난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보곤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판초우의를 입은 귀쟁이와… 불의 계단을 걷는 노인.
“오귀스트…? 이런 씹.”
대량 학살 개인이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태양을 등진 모습이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카자는 꺼냈던 권총을 재빨리 숨기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잠시 후, 오귀스트와 엘프가 땅에 착지했다.
여명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자, 엘프가 가면을 벗었다. 쇠미리는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별로 안 기다렸….”
그때, 뒤따라온 오귀스트가 여명의 말을 끊었다.
“오래 기다린 건 나다.”
꿈속에서 봤던 것보다 한층 더 늙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불꽃처럼 살벌한 눈동자가 여명을 향했다.
여명은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오귀스트. 천여명입니다.”
“인사는 됐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고압적인 말투였으나, 여명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는 오귀스트가 두메아 가주를 보자마자 결계 밖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애써 잊어버린 척, 주제를 돌렸다.
“예, 그러면 본론으로 넘어가서…. 총리와의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 이 사건을 해결한 건 나와 붉은 별… 그리고 세계수 혁명단이라고 알려질 거다.”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게 어지간히도 부끄러운지, 오귀스트는 자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여명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건 억지였다. 순간을 넘기기 위한 억지.
시카고에서 그랬듯이 아야톨라를 쓰러트린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 했지만, 결계를 펼치기 전까지 붉은 별과 아야톨라의 싸움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았다.
대피하며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CCTV에 찍힌 무수한 영상들까지.
게다가 지하철에서 쇠미리가 열심히 세계수 혁명단을 홍보하기까지 했으니, 숨기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용사의 무술을 쓰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결론적으로, 여명은 사건의 외부자가 되는 대신 적당한 거짓말을 섞은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오귀스트와 쇠미리의 입을 빌려 시나리오를 호주 총리에게 전달했고.
호주가 얼마나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다가올 초인 올림피아까지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뭐, 아무튼. 이런 사소한 계획 상관 없는 오귀스트는 담담히 여명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데스나이트… 그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다오.”
대답은 옆에 앉아 있던 듀크 중령에게서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긴, 전쟁터에 버려진 시체를 네크로맨서들이 도굴해서 되살린 거지.
“….”
-오랫동안 꼭두각시로 살다가, 이 녀석이 네크로맨서에게 시체를 강탈했고,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다. 간단하지?
여명이 너무 줄인 거 아니냐고 태클을 거는 것보다 먼저, 오귀스트가 쾅! 탁자를 내려쳤다.
“저게 사실이라면 왜 성불시키지 않았지? 데스나이트는 저주에 휩싸여 고통을 느낄 텐데!”
-우리가 성불을 거부했다.
“거부했다고? 왜?”
-그야 물론… 아직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듀크 중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귀스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해야 할 일….”
말끝을 흐리는 걸 보아 하니, 분명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는 게 분명했다.
프랑스에 복수하기 위해서 성불을 미뤘다- 뭐 그런 오해.
이글거리는 오귀스트의 눈을 본 여명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끼이익-! 망가진 음식점 내부의 문이 열리며 두메아 가주가 밖으로 나왔다.
-이보게, 양키! 난 치료 끝났네! 이제 자네 차례야!
살덩이와 싸우며 입은 상처를 말끔히 수리한 그는 보란 듯 이를 드러내며 덧붙였다.
-그, 샌드위치에 미친 네크로맨서만큼은 아니지만, 저 핑크 머리 실력도 꽤 괜찮군. 바라나 영감의 잘린 팔을 척척 붙이더라니까?
“….”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문 가운데, 그는 척척 여명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듀크 중령의 자리를 빼앗았다.
-자, 자, 양키는 이제 꺼지고… 엘프랑… 또… 이 노인네는 누군가?
“….”
침묵. 듀크 중령이 쯧쯧 혀를 차며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못 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쇠미리는 물론이고 여명마저 눈동자를 굴리길 잠시.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맥주병을 홀짝이던 두메아 가주가 그제야 오귀스트를 보며 말했다.
-혹시 우리 구면인가?
구면이었다.
***
만남에서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비록 언데드가 돌아다니고, 폭격에 휘말려 다 부서진 음식점에서 만났을지라도, 시간을 뛰어넘은 만남은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뭐, 여명이 상상하던 만남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두메아 가주….”
오귀스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두메아 가주를 바라보다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데스나이트라니… 천국에 가도 모자랄 판에 데스나이트라니. 어째서 이리도 잔혹한 일들이 벌어진단 말인가.”
감정을 이기지 못한 걸까. 늙은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명은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자리를 비켰고, 쇠미리 또한 종종 걸음으로 그의 뒤에 섰다.
두메아 가주는 말 없이 그런 오귀스트를 내려다보다가, 드디어 뭔가 떠올린 것처럼 손뼉을 쳤다.
-아! 누군가 했더니 오귀스트였군! 밀랍 산맥에서 바보짓 했던 그 친구!
“….”
-이야, 징글징글하게 오래 살았군. 고집이 더러워서 오래 못 살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보고 있는 여명이 괴로울 정도였다. 정작 오귀스트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롭 리어 두메아… 왜, 왜 성불하지 않은 거요?”
-아니 그야… 내가 그냥 죽기엔 좀 억울하지 않나.
“억울하다? 그러면 당신은 역시….”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하는 쇠미리와 달리,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두메아 가주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박살 나는 걸 차마 볼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두메아 가주는 농담을 날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헛소리로 순간을 넘겼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손녀에게 보여준 적 있는 진지한 목소리로, 오귀스트의 말을 끊었다.
-자네의 조국에 복수를 원하는 건 아닐세. 뭐, 그렇다고 용서를 한 건 아니지만….
“….”
-개인적인 사과 정도는 받아줄 수 있지. 오귀스트, 자네의 눈물은 사과의 눈물인가?
오귀스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두메아 가주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 순간, 나 롭 리어 두메아는 프랑스인 오귀스트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둘 사이의 원한이 있다면 이것으로 청산될 것이며… 그리고… 어…
말끝을 흐린 그는 빈 술잔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쇠미리와 나란히 선 여명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용사 이래 최고의 난봉꾼이자, 스탈린 이후 최고의 빨갱이가 이 사과의 증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