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0화(400/817)
***
“…가주님.”
기가 찬 여명이 두메아 가주를 불렀다. 가주는 모른 척 느긋하게 의자를 뒤로 기울였고 여명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하시면 안 되죠.”
-거짓말이라니, 난봉꾼? 아니면 빨갱이? 어느 쪽 말인가?
“당연히 둘 다요.”
-둘 다?
두메아 가주는 말 없이 여명을 바라보다가, 빈 잔으로 쇠미리를 가리켰다.
-그쪽 생각은 어떤가? 레이디도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갑자기 지적당했음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노동자 출신에, 공산주의자로 변장하고 다니고, 공산주의 무술을 쓰지만… 본인이 빨갱이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너 까지? 눈을 가늘게 뜬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쇠미리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거나 말거나, 두메아 가주는 익살스레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이에 쇠미리가 호응했다.
“예, 소련제 무기를 쓴다고 다 공산주의자는 아니잖아요.”
-아, 그렇군! 그러면 난봉꾼은?
“아, 그건….”
쇠미리는 한 번 더 농담하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여명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크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장난을 멈춘 건 아니었다. 그녀는 판초우의 사이에서 익숙한 막대기를 꺼냈다.
[처녀여! 내가 그대를 지키겠…!]유니콘의 뿔로 만들어진 우라간의 손잡이. 오랜만에 입을 연 유니콘은 여명을 보자마자 쭈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로다. 동정이 아닌 주인이여.]“….”
이 자식은 또 뭘 실망하고 있어.
여명은 경험이 있는 게 난봉꾼이란 뜻은 아니라고 항변하려다가, 그래봤자 늙은이와 귀쟁이의 함정에 빠질 뿐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두메아 가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었다.
-난봉꾼도, 빨갱이도 아니지만 친애하는 증인을 위해, 건배.
“….”
여명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자, 두메아 가주는 재빨리 오귀스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봤나? 오귀스트, 난 데스나이트가 돼서도 그럭저럭 재밌게 지내고 있네. 그러니 눈물 같은 건 때려치우고 술이나 한잔하세나.
그쯤 되자, 조용히 있던 오귀스트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다.
“예, 가주. 그럽시다. 지금이라도 그때 나누지 못했던 술잔을 나눕시다.”
-그래, 원래 늙으면 술과 친구밖에 안 남는 법이거든. 어디 보자… 주인장! 아직 멀었나?!
두메아 가주가 탁자를 탕탕 두들기기 무섭게, 카자가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튀어나왔다.
나올 때를 기다리면서 눈치보고 있던 걸까? 가면을 쓴 걸 보니, 오귀스트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음, 지구산 보리술에… 고기가 들어간 빵이라. 전투 후에 어울리는 식사로군.
두메아 가주는 잔뜩 긴장한 카자의 어깨를 두들겨준 뒤, 자연스럽게 오귀스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이번에는 자네 이야기 좀 해보게. 전쟁 끝나고 어떻게 지냈나? 가족은 있고?
“예, 가주, 할 이야기가 정말… 정말 많습니다….”
-가주는 무슨, 전대 가주지. 나도 자네를 프랑스 놈이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 자네도 이름으로 부르게. 어차피 같이 늙은 사이 아닌가.
“그래도… 괜찮겠나? 롭?”
그렇게 잔이 돌기 시작하고, 두 노인은 마치 오랫동안 겸상해왔던 늙은이들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소중함, 선택의 후회, 그리고 잊을 과거들.
늙은이들의 술자리는 인종과 세상과 상관없이 언제나 비슷비슷한 걸까?
여명은 장만 어르신과 작업반장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봤다.
취할 수도 없고 술의 맛조차 느끼지 못하는 데스나이트였음에도, 두메아 가주는 진짜 취한 늙은이처럼 오귀스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쇠미리 또한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아 같은 광경을 바라보길 잠시.
점점 더 과거로 향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이윽고 전쟁 시기로 돌아갔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기대한 여명이 귀를 세웠으나, 정작 그런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딱 하나만 빼고.
-아, 그때 자네가 구한 아이들은 어떻게 됐나? 설마 쥐도 새도 모르게 다 죽인 건 아니겠지?
“아니,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이라도 그렇게 못하네. 알려진 아이들… 아니, 이제는 다 어른이지만, 내가 아는 한 다들 잘살고 있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 아이도 있고, 아닌 아이도 있고… 따로 만나러 가진 않았네. 잘 사는 사람들에게 굳이 프랑스의 앞잡이라는 이미지를 씌울 필요는 없잖는가. 그리고… 진짜로 내가 구한 것도 아니고.”
두메아 가주는 잔을 따르며 물었다.
-아, 세디달이 구했다고 했었지. 정작 세디달 본인은 그쪽 덕분에 구했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건 조롱일 걸세. 당시의 그녀는 날 이겼고, 그럴 자격이 충분했으니.”
-흠, 조롱은 아닌 것 같은데…
오귀스트가 조롱이 맞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두메아 가주가 먼저 말했다.
-그러면 직접 물어볼까?
“…?”
-역시 이런 건 본인에게 물어봐야 제 맛이지.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한 가주는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봤다.
갑자기 타겟이 된 여명은 ‘설마’ 하며 미간을 구긴 오귀스트와 ‘이 늙은이들 좀 치워 줘’ 란 눈빛의 카자, 그리고 휴대폰 문자를 확인한 뒤 대답했다.
“예, 저쪽도 준비 끝났을 테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러 가시죠.”
대뜸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여명을 보며 오귀스트가 물었다.
“간다니, 어디로?”
“가족 상봉의 현장이요.”
“…?”
***
어렵사리 구조한 세팔리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문과도 같은 인체실험을 견뎌온 육체는 스스로 걷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구토제에 가까운 마폭고 치료제에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 아니, 구더기 공주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으리라.
그래도 어찌어찌 마폭고를 토해낸 그녀는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아야톨라가 친 난리 덕분에 한국 정부는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를 터.
뒤처리를 위해 마폭고를 터트린다고 해도 이미 토해낸 이상, 그녀는 자유였다. 그것도 완벽한 자유.
하지만 그런 자유와 상관없이, 진짜 메인 이벤트인 삼대의 가족 상봉은 조금 뒤로 미뤄졌다.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 살덩이를 막아낸 세디달이 다친 탓이었다.
살덩이에 깔려 팔다리가 뒤틀리고, 배가 터진 상처.
여명이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상처 입은 모녀를 폐허 위에서 상봉시킬 만큼 경우 없는 놈도 아니었다.
그는 만남이 조금 밀리더라도, 세팔리와 세디달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만남이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에겐 그런 바람을 실현할 돈도, 도와줄 친구도 있었다.
구더기 공주와 푸른 쥐가 그를 친구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남들의 시선을 피해 폐허 속 음식점을 빠져나온 여명은 구더기 공주가 끄는 차를 타고 시드니 남부로 향했다.
차는 지금은 멈춰버린 시드니 공항을 지나,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해변이 보이는 작은 동네에 멈췄다.
시드니 중앙에서 벌어진 일 때문일까, 동네는 조용했다.
차에서 내린 여명이 슬슬 저무는 해를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구더기 공주가 물었다.
“야, 10강이 왜 여기 있어?”
“연이 닿아서요.”
“연은 뭔… 아무튼, 오귀스트 저 사람 존나 무서운 사람인 거 알지? 뉴스에 나오진 않았지만, 이쪽 바닥에서는 유명해. 저 사람이 두들겨 팬 자기 나라 정치인이 못해도 두 자릿수는 될걸?”
“…그래요?”
호주 총리 면상에 주먹질 좀 해달라고 할걸. 여명은 뒤늦게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메아 가주와 함께 차에서 오귀스트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디달은 어디 있나?”
“가장 먼저 치료 받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여명은 그렇게 대답하며 가까운 주택을 가리켰다. 햇볕이 잘 드는 위치에 지어진 단아한 집.
오귀스트는 집 창문을 가린 붉은 커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족 상봉이라… 왜 데스나이트들에게 이런 걸 해주는 건가. 이유가 뭐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테니까요.”
“….”
담백한 대답. 오귀스트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선물을 챙겨와서 다행이군.”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바로 앞에 검은 자동차가 멈춰 섰다.
운전자는 귀를 가린 엘프… 쇠미리의 경호원인 은발의 엘프, 리메였다.
그녀는 손을 흔드는 쇠미리와 여명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뒷좌석에서 시리와 함께 휠체어를 탄 여성을 내렸다.
흡, 붉은 머리카락의 두 모녀를 본 오귀스트가 숨을 참는 가운데, 휠체어에 앉은 세팔리가 여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병실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아름답게 차려입은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큰사위, 뭐라… 뭐라 감사의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저와 제 딸을 위해 이런 위험을….”
여명은 휠체어를 잡은 시리에게 슬쩍 고개 숙인 뒤 대답했다.
“감사 인사는 안 하셔도 됩니다. 가족 사이인데요, 뭐.”
“가족 사이….”
시리를 올려다본 세팔리가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 여명이 무대 위 마법사의 그것처럼 과장된 걸음으로 주택의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꼭 두 분만을 위해 한 일도 아닙니다.”
“네?”
“보시면 압니다. 자,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나와주세요.”
직후, 주택의 문이 열렸다. 때마침 바닷바람이 살며시 밀려오고,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멈추는 호흡, 기울어지는 태양.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세팔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여명을 바라봤다.
여명은 침묵으로 그녀의 질문을 긍정했다.
곧이어, 고개 돌린 세팔리의 입에서 신음처럼 작고, 기도처럼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우리 딸, 이쁘게 자랐구나.”
데스나이트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였음에도, 여명은 그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따스함을 느꼈다.
움직이는 휠체어, 가까워지는 눈동자, 기울어지는 상체.
끌어안은 두 사람은 울지 않았다. 서로 길을 잃은 시간이 너무 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것처럼.
아니, 이 순간에 눈물은 필요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프고, 그리도 아쉽겠는가.
이제는 함께할 시간만 남았는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여명은 휠체어를 붙잡은 시리의 뒤로 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머뭇거리던 시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여명을 보고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로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의 삼대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삼대가 겪은 모든 고난과 슬픔이 사라질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
폐허가 된 시드니 시내로 향하는 자동차 안. 창밖의 폐허를 바라보던 쇠미리가 말했다.
“오귀스트는 의외로 눈물이 많았네요.”
여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뭐, 늙으면 눈물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너무 크게 울어서 당황스러… 아, 혹시 같이 울었다고 편드는 건 아니죠?”
“….”
여명이 대답 대신 뚱한 표정을 짓자, 쇠미리가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마지막까지 같이 있다가 오지 그랬어요. 그런 감동적인 재회를 만들어 놓고 중간에 나오다니, 너무 아깝잖아요.”
“…모녀가 오늘만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난 상관없어.”
“그런 거치고는 표정에 아쉬움이 줄줄 흐르는데요?”
“아니, 그건….”
“흐응? 뭣하면 꿈 연결해서 감정 읽어볼까요?”
쇠미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자, 여명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기장 천여명으로 반격하면 이길 수 있겠지만, 이런 말싸움을 이겨서 뭐 하겠는가.
아무튼, 여명이 쇠미리의 장난을 받아주며 아쉬움을 삼키길 한참.
군이 친 경계선이 보이는 자리에서 차가 멈췄다. 군인들이 바글바글한 게, 여기서부터는 접근 불가인 모양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리메가 말했다.
“이제 어쩔 거냐, 천여명.”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작은 지도를 꺼냈다.
주변이 워낙 크게 박살 나서 구분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지도에 표시된 빌딩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도 될 거 같네요. 고마워요, 리메.”
그렇게 말한 여명은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쇠미리가 같이 가야 하냐고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혼자 가는 게 나은 곳이야.”
성녀였다면 억지로라도 따라왔겠지만, 쇠미리는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바로 자세를 잡고 의자에 눕는 걸 보니 아마 꿈으로 훔쳐볼 생각인 것 같았지만.
‘제발 너까지 성녀처럼 되지 마라.’
별 의미 없는 생각을 떠올린 여명은 마지막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조웅찬 장관이 준 지도.
그건 난리가 난 시드니에서 뭔가를 챙겨오라며 준 지도였다.
장관이 직접 다른 장관을 엿 먹이는 짓이라고 했으니, 꽤 중요한 물건이 있는 위치일터.
조웅찬과의 대화를 떠올린 여명은 군인들의 눈을 피해 흉물스레 고개를 내민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지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우연인지, 어떤 마법적인 기적 덕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하 주차장 입구가 멀쩡한 덕분이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조차 없이 아래로, 아래로.
반쯤 무너진 계단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여명은 지도에 표시된 지하 보일러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어린아이의 인기척.
“…누구냐.”
그가 고개를 돌리자, 깨진 비상등 불빛 아래로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곧이어, 아이처럼 앳된 목소리가 물었다.
“그건 질문입니까?”
“…그럼 뭐겠냐?”
여명이 긴장하며 총을 꺼내는 순간, 그림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불빛 아래에서도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안대까지.
품에 작은 여우를 안고 있는 소년은 성녀의 남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뭐지? 환상? 여명이 마나를 잔뜩 끌어올리는 가운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진실을 흘리는 자입니다.”
“….”
아야톨라? 여명의 본능적으로 총구를 겨눈 순간.
“당신의 질문에 대답했으니, 이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소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