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1화(401/817)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음모론 또한 어느 정도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근데,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드는 현실을 음모론 취급하면 안 되지. 이 좆만 한 새끼야.
[올턴 주지사, 자신을 음모론자 취급하는 기자의 코뼈를 부러트리면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하를 가득 채우는 앳된 목소리. 여명은 총알로 대답했다.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방아쇠에 힘을 실은 순간, 그의 폐가 멋대로 움직였다. 그다음으로 성대, 혀, 입술이 차례대로 의지를 벗어났다.
이윽고, 그가 의도하지 않은 대답이 입을 뚫고 나왔다.
“나는 천여명이다.”
직후, 여명은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이게 녀석의 권능인가? 육체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힘? 아니면 대답을 강요하는 힘?
진실을 흘리는 자란 이름을 생각해보면 후자에 가깝겠지만…
여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몸의 내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사이, 아야톨라가 말을 이었다.
“아, 유명인이셨군요. 저도 들어봤습니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국인.”
조심스러운 여명의 반응과 달리, 진실을 흘리는 자의 목소리에서는 긴장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이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오신 겁니까?”
이어지는 질문. 이번에는 멋대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명은 그제야 녀석의 능력이 무엇인지 어렴풋 예상할 수 있었다.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면 상대에게 대답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 예상이 사실이라면 진실을 흘리는 자란 이름에 어울리는 힘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저 힘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것. 여명은 시험 삼아 대답해봤다.
“아니, 지하에 있는 게 뭔지 모른다.”
대답을 들은 아야톨라는 뭔가 실망한 듯 품에 안긴 여우를 쓰다듬었다. 여명은 곧바로 추가 질문을 던졌다.
“넌 알고 있나?”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는지, 진실을 흘리는 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눈치가 좋으시군요. 고작 한 마디에 제 권능이 뭔지 떠보시다니.”
“….”
“하지만 천여명, 그런 식으로 질문하시면 안 됩니다. 이 지하에는 콘크리트도 있고, 철근이나 깨진 비상등, 심지어 당신도 있잖습니까. 조금 더 명확하게 대상을 지정하세요. 예를 들어… 정부가 이 지하에 준비한 게 뭔지 알려줘. 어떻습니까?”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굴지? 여명은 녀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질문. 아야톨라씩이나 되는 놈이 왜 여기 있지? 길거리 쓰레기도 아니고, 한 도시에 두 놈이나 몰려 다닐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자신이 권유한 질문을 하지 않아서인가, 진실을 흘리는 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론, 표정과 상관없이 녀석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실패를 대비한 것뿐입니다. 저는 피를 흘리는 자가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왔습니다.”
실패? 피를 흘리는 자가 끝내지 못한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여명은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대화의 때가 끝나고 폭력의 시간이 왔다는 신호였다.
그때, 여우를 어깨에 올린 아야톨라가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워, 워. 우리끼리 싸울 필요 없습니다. 우린 적이 아니에요.”
“…만물의 적을 자처하는 교단의 사제가 할 말은 아니군.”
“아, 그건… 다섯 쓰레기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선동일 뿐입니다. 진실은 조금 더 복잡하지요.”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여명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구가 불을 내뿜고, 총알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순간.
진실을 흘리는 자가 주먹을 쥐었다. 천벌을 발동하는 자세.
그동안 봐온 모든 천벌이 일격필살의 살인기라는 걸 떠올린 여명은 곧바로 범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저 날아간 총알이 녀석의 발치에 박혔을 뿐.
빗나간 총알을 본 녀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 혹시 미필이신가요?”
빌어먹을 사격 실력. 이건 왜 늘질 않지?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듀크에게 샤프슈터부터 배워야겠다고 다짐한 여명은 검을 뽑아 들었다.
총알이 빗나갈 걸 알고 천벌을 발동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방어용 천벌인 걸까?
어느 쪽이건 하루에 두 명이나 아야톨라를 죽일 기회였다.
마나를 머금은 아카데미 학생 용 검이 번뜩이는 가운데, 아야톨라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처럼 한국 정부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증거는?”
“그건… 제 사정상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질문과 대답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겁니다.”
아야톨라가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멈추지 않았다.
“좆 까.”
“말을 참 고풍스럽게도 하시군요. 음….”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녀석은 여명이 달려들기 직전,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전 김관형 장관의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
김관형? 세티에게 양치기를 보냈던 장관의 이름이라는 걸 떠올린 여명은 검을 멈췄다.
“그쪽은 어느 장관이 보내서 왔습니까?”
녀석은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던졌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으면서 자연스레 질문을 던지기는. 여명은 여전히 검에 마나를 두른 채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다.”
“…생각보다 더 이득을 좋아하시는군요. 예, 어디 질문해 보시죠.”
여명은 바로 질문을 하는 대신 걸음을 돌려 보일러실의 문 고리를 다시 붙잡았다.
장관이 의뢰한 물건이 숨겨진 장소.
끼이익- 불길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에서 보인 건…
“씨발.”
방 안 가득 쌓인 마른 고기 덩어리와 그 고기 덩어리 위에 놓인 검붉은 보석 하나.
문제는, 보석 아래 깔린 고기 덩어리가 모두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를 빼다 못해 말라버린 인간의 심장.
싸구려 고어 영화에서나 볼법한 광경을 바라보던 여명은 고개를 돌려 아야톨라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
“제물이죠. 피를 흘리는 자가 섬세하게 집행한 인신 공양의 결과물입니다. 아름답지요? 지금은 기억하는 자가 거의 없지만, 본래 인간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마법 재료였습니다.”
“….”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그걸 회수하러 온 겁니까?”
여명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조웅찬 기획재정부 장관.”
“아… 한국인들이란. 그새를 못 참고 서로 권력을 탐한다니까요.”
상황을 이해한 녀석이 투덜거리는 사이, 여명은 손을 뻗어 심장 위에 놓인 검붉은 보석을 쥐었다.
보석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역겨움이나 마력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수많은 심장의 피를 빨아 먹은 물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잠시 보석을 내려다보던 여명은 이 역겨운 물건을 분석해줄 사람 명단을 떠올리며 주머니에 보석을 쑤셔 넣었다.
아야톨라가 말했다.
“제 눈치는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장관과 한 거래는 한국 정부에 그 물건을 넘기는 것이었으니까요… 김관형 장관에겐 애석한 일이지만, 저희에게는 모두 똑같은 한국인일 뿐입니다.”
“….”
“그보다, 저와 조금 더 대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당신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
안대로 가려져 있지만, 여명은 녀석의 강렬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거절한다.”
진실이란 때때로 미사일보다 무서운 법. 만에 하나 ‘니가 붉은 별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되돌릴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할만한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여명이 걸음을 돌리려는데, 아야톨라의 질문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신은 바깥에서 온 자입니까?”
“…뭐?”
“플레이어? 아니면 감독? 그것도 아니면 작가?”
“….”
그 순간, 여명은 문뜩 이게 종말 교단의 진실을 알아낼 기회가 아닐까 고민했다.
싸움을 피하는 것과 진실을 아는 것.
위험을 피할 것이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갈 것이냐? 짧은 고민을 삼킨 여명은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인데.”
대화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 아야톨라는 여우를 꼭 끌어안으며 웃었다.
어딘가 성녀를 닮은 미소였다 여명은 묘한 불쾌함을 참으며 물었다.
“종말 교단의 목표가 뭐지?”
직구처럼 정직한 질문. 아야톨라 또한 강타자처럼 질문에 답했다.
“우리 교단은…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 자유를 위해 테러를 벌인다고? 살인할 자유를 말하는 거냐?”
상상도 못 한 단어에 여명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야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가 추구하는 자유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 폭력은 수단일 뿐입니다.”
“….”
“흠, 비유하자면… 이 세상은 누군가 멋대로 만든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이는 무대입니다. 무대 위의 인간들은 우리를 종말의 사도라 부르지만, 저희는 그들을 노예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인형으로 사는 것보다, 무대를 불태우는 게 낫다?”
“예, 바로 그겁니다.”
녀석들도 시나리오와 운명의 적이란 말이었다. 여명은 혹시 그들과 손잡을 여지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들과 손을 잡으면 결국 자신도 미쳐버릴 뿐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여명이 대답했다.
“바깥에서 온 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난 아냐.”
“….”
짧은 침묵. 아야톨라는 얼굴을 기울이며 여명을 바라보다가, 살짝 입을 벌렸다.
“진실… 이군요. 놀랍게도.”
진실 여부도 알 수 있는 건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이었다. 여명은 저 권능을 어떻게 더 이용해 먹을까 고민하다가, 팔짱을 끼고 다음 질문을 꺼냈다.
“한국을 지배하는 각하의 정체는… 이승만이냐?”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건지, 진실을 흘리는 자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냥 누구냐고 묻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자들은 보통 이름이 여러 개지.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가명을 진실이랍시고 꺼내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의 대답을 들은 아야톨라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벌써 이 대화의 요점을 깨달으셨군요. 훌륭합니다… 뭐, 질문에 대답하자면 정답은 아니오 입니다.”
이승만이 아니라고? 짐짓 각하의 정체가 이승만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여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승만이 아니라는 말장난을 하려는 거라면….”
“아뇨, 아뇨. 1875년, 3월 26일에 태어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뜻하는 게 맞습니다. 그는 각하가 아닙니다.”
“….”
확고한 대답을 들은 여명의 생각이 깊어졌다. 아야톨라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이승만 말고도 100년 가까이 살면서 한국을 뒤에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걸까.
그의 고민과 상관없이, 아야톨라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붉은 별 운운하는 질문만큼이나 치명적인 질문이었다.
“천여명, 당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알려주시지요.”
“…엿 같은 질문이군.”
“재밌는 질문이기도 하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가장 은밀한 비밀이어야 합니다.”
아야톨라가 뭔가를 기대하듯 입술을 핥는 사이,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고민 사이로, 무언가 마법적인 힘이 그의 주변을 감도는 게 느껴졌다. 아마 이번 대답을 강제하기 위한 권능의 힘이리라.
잠시 후, 그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입에 담았다.
“세티는 입질이 심해.”
“…예?”
“내가 재생력이 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습관인지 모르겠는데, 감정 조절 안 될 때마다 귀, 목덜미, 가슴을 가리지 않고 깨물어. 치열이 가지런해서 되게 이쁜 모양이 나오는데, 깨물고 나서 미안해 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막….”
“자, 잠깐!”
어린아이 같은 외형이 변장은 아니었는지, 아야톨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딴 게 당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입니까? 정말로?”
“비슷한 게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것도 야한 거군요.”
“은밀하고, 사적인 거지.”
“….”
진실을 흘리는 자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녀석은 여명을 흘겨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쓰읍, 계속하시죠. 다음 질문은 뭡니까?”
“아니, 아쉽지만 질문은 여기까지야.”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느낀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왜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만.”
여명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망가진 비상등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아야톨라가 서 있던 그 자리.
손가락을 본 진실을 흘리는 자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만박불통?”
익숙한 노인네가 녀석을 향해 지팡이를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