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2)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2화(402/817)
***
격돌의 순간, 여명의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본능이었다. 아야톨라와 10강의 전투에서 뭔가를 훔칠 수 없을까 하는 본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야톨라의 머리통을 내려찍는 지팡이의 궤도였다. 저번에 봤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교한 초식.
살기가 가득한 지팡이는 어린 아야톨라의 머리를 으깨버릴 듯 살벌했다.
그러나 그건 허초이자, 분신으로 만들어낸 가짜였다. 진짜는 내려찍는 게 아니라 옆에서 오고 있었다.
지하실의 텁텁한 공기 사이로 파고드는 손날.
만박불통의 본체는 아주 은밀하게 아야톨라의 목을 노렸다.
본인도 막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기습인 탓일까.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
아야톨라는 둘 중 하나도 막지 못했다. 지팡이에 맞은 두개골이 으깨졌고, 이어진 손날에 목이 잘렸다.
깨진 머리가 허공으로 떨어졌다. 허무할 정도로 가벼운 끝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여명이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아야톨라는 멀쩡히 서 있었다. 꿈? 환상? 아니, 아니었다. 만박불통의 분신과 본체에는 여전히 녀석의 피가 묻어있으므로.
“예나 지금이나 인사 예절이 꽝이시군요.”
진실을 흘리는 자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나라 잃은 분이라 그런가?”
여명과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불길한 목소리. 만박불통은 녀석이 아닌 여명을 향해 대답했다.
“이 녀석과 함부로 대화하지 마라. 말로 사람을 홀리는 게 특기인 악마 같은 놈이니.”
“사람을 홀리다뇨. 진실을 보여주는 거죠.”
“악마 같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군.”
만박불통은 곧바로 팔을 휘둘렀다.
손날에 담긴 마나가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했다. 아카데미에서 여명과 다툴 때 쓰던 것과 같은 무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아톨라가 주먹을 쥐었다. 여유롭고 또 무심하게.
천벌의 발동을 본 여명은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충격은 없었다.
소음도, 마나의 떨림도 없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었다. 만박불통은 손을 휘두르기 직전 자세로 멈춰 있었고, 아야톨라 또한 주먹을 쥐기 직전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만박, 왜 애꿎은 힘을 낭비하십니까. 후배 앞에서 힘자랑이라도 하시려고요?”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는구나. 나와 성검을 묶어두기 위해 수작질을 벌여놓고는!”
“제가요? 아니죠. 당신의 발을 묶은 건 오염된 토끼와 에뮤고, 성검은 눈물과 놀고 계십니다. 저는 그냥….”
“그 토끼를 오염시킨 게 네놈이라는 걸 모를 성싶으냐!”
만박불통의 말이 끝난 순간, 주변의 마나가 휘몰아쳤다. 번뜩이는 손날이 녀석의 목을 노리는 것과 동시에 아야톨라의 주먹이 쥐어졌다.
!
격돌의 결과는 조금 전과 똑같았다. 만박불통의 공격은 사용하기 전으로 돌아갔고, 아야톨라는 멀쩡했….
주륵.
다음 순간, 아야톨라의 볼에 얇은 혈선이 그어졌다.
녀석의 품에 안겨있던 여우가 낑낑거리며 피를 핥는 가운데, 아야톨라가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봤다.
“뭔가를 던지며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선배께서 싸우시는데, 구경만 하기 뭐해서.”
그렇게 말한 여명의 손 위로, 작은 유리 조각이 반짝였다.
아야톨라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라… 이자의 과거를 알면 그런 이야기는 못 하실 텐데.”
“혀가 길다.”
“사제란 무릇 혀로 먹고사는 법입니다. 양해해주시지요. 그리고… 흠, 혹시나해서 묻는 건데, 제 천벌이 뭔지 눈치채신 겁니까?”
“아니.”
솔직한 대답이었다. 녀석의 천벌이 시간을 되돌리는 건지, 아니면 어떤 일을 아예 없던 일로 만드는 건지… 아직도 애매모호했다.
“그런데도 그냥 던져본 겁니까?”
여명은 ‘같은 편이라고 오해받기 싫어서’ 라는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아야톨라는 ‘제물’이 들어있는 여명의 주머니를 힐끗 바라본 뒤, 만박불통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 편은 아무도 없군요. 이거 원 서러워서, 오늘은 이만하고 가야겠습니다.”
“왜, 밑천이 다 털리는 게 무섭냐?”
“아뇨, 아뇨. 저는 당신과 달리 호주 정부를 생각하거든요. 하루에 두 번이나 아야톨라가 튀어나오면 총리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10강 둘과 싸우는 건 제 운명이 아니라서요.”
둘? 만박불통이 여명이 아직 10강급은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콘크리트 천장이 벌겋게 물들었다.
‘프레시외즈… 오귀스트가 왔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지하실을 달구는 가운데, 아야톨라는 여명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녹아내린 천장이 무너졌다.
***
오귀스트는 지하실을 통째로 불태우며 등장했다.
정확히 그의 발아래 놓인 아야톨라의 머리 위로 재와 불길이 쏟아졌으나, 녀석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정체를 알 수 없는 천벌을 이용해 무사히 도망간 거겠지.
아무튼, 갑작스레 등장한 오귀스트를 본 만박불통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염병, 엘랑산 학살 머신이 왜 호주에 있어?”
“닥쳐라. 흑묘. 내가 어디를 다니던 네가 알 바 아니다.”
흑묘? 주고받는 이야기를 보니 두 사람은 구면인 듯했다. 그것도 꽤 사이가 안 좋은.
오귀스트는 만박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느냐? 엘ㅍ… 아니, 그 아이가 보냈다.”
여명은 그가 삼킨 단어가 엘프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쇠미리가 부른 건가? 기어코 관음했구나.
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허리를 굽혔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신경까지야… 흠, 일단 돌아가자꾸나. 중요한 순간이 남아있으니.”
“중요한 순간이요?”
“가보면 알 게다.”
오귀스트는 웃었다. 마치 손자에게 용돈을 주기 전 노인네의 그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어허, 어딜 마음대로 납치해가려고? 그 아이는 나와 함께 갈 거다.”
그때, 만박불통이 끼어들었다. 그는 오귀스트의 뒤통수를 향해 껄렁거리며 덧붙였다.
“아야톨라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걸 증언해줄 주요 참고인이다. 부외자는 꺼져.”
말투와 달리, 내용은 의외로 공적인 이유였다. 오귀스트는 잠시 여명과 만박불통을 번갈아보다가, 프레시외즈의 불길을 꺼트리며 말했다.
“아야톨라가 있었다는 건 내가 나중에 서면으로 증명해주지. 이 청년은 나와 함께 갈 걸세.”
만박불통의 눈썹이 슬쩍 휘어졌다. 지팡이를 챙겨 넣은 그는 여명을 향해 ‘둘이 뭔 사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여명으로서는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시리, 세디달, 오귀스트, 주와이외즈… 이 복잡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딱히 답을 떠올리지 못한 여명이 그냥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오귀스트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내 증손녀와 관계된 일일세.”
“…으, 응?”
“이 청년과 내 증손녀 사이에 말 못 할 문제가 있네.”
“…말 못 할 문제?”
“손녀의 치부일세. 그 이상은 묻지 말게.”
세티와 오귀스트의 증손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던 만박불통의 미간이 문자 그대로 찌그러졌다.
여명은 그제야 오귀스트가 증손녀에게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그를 말리려 했으나, 이번에도 오귀스트가 먼저 말했다.
“가족의 일이야. 흑묘, 이번에는 그쪽이 내 체면을 봐주면 좋겠군. 난 꼭 이 청년을 데리고 가야겠네.”
“어….”
만박불통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분명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잠시 후, 만박불통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죽이지는 말고 적당히 아랫도리만 적당히 지지고 끝내게. 젊은것들이 그럴 수도 있지.”
“…?”
대체 뭔 상상을 했길래 저딴 말이 나오는 거지? 기가 막힌 여명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만박불통은 지하실의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
“….”
짧은 침묵.
만박불통이 남긴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오귀스트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프레시외즈를 맞은 것도 그렇고… 자네, 내 증손녀와 무슨 사이인가?”
“…아무 사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 애인과 문제가 있는 거죠. 여명은 애써 뒷말을 삼켰다.
오귀스트는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으나,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가?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
“그보다, 우선 세디달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모두 기다리고 있을 걸세.”
***
오귀스트의 말과 달리, 세디달의 주택에 있는 모두가 여명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구더기 공주.
대체 술을 얼마나 처먹은 건지, 그녀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알콜 냄새를 풀풀 풍겼다.
“어으, 우리, 동섕- 왔여? 또, 또, 됸 벌어왔나?”
손을 흔드는 꼴을 보아하니 오늘 토하고 기절하거나, 내일 숙취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 하거나.
-쯧, 술이 이렇게 약해서야.
아무튼, 그녀와 겸상하고 있던 늙은 데스나이트들은 혀를 차며 여명을 반겼다.
-여, 이렇게 늦은 걸 보니 엘프와 재미를 본 건 아니겠고… 또 무슨 사고에 휘말린 건가?
“예, 별로 재밌는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뭐, 여자랑 나갈 때부터 그럴 줄 알았지.
실없는 말을 내뱉는 두메아 가주와 그를 보고 끌끌 웃는 듀크 중령과 바라나.
데스나이트 어르신들에게 인사한 여명은 먼지가 가득한 웃옷을 벗은 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리 가족을 바라봤다.
옆자리의 술판 달리, 세 모녀는 조용했다. 시리와 세팔리 모두 울다 지쳐 잠이 든 까닭이었다.
그중 시리는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눈물 자국과 은은한 미소가 담긴 얼굴을 보아하니, 고생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오셨군요.
그사이, 딸과 손녀를 내려다보던 세디달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명은 그녀에게도 꾸벅 인사한 뒤,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워낙 사람이 많은지라, 넓은 거실이 꽉 차 보였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작은 만족감이 느껴지는 풍경.
그 풍경 속 세디달이 말했다.
-오귀스트는요? 같이 오지 않았나요?
“같이 오셨습니다. 차에서 뭔가 챙길 게 있다고 하셔서, 저 먼저 왔습니다.”
-그런가요.
거기까지 말한 세디달은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어려운 부탁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시선을 돌린 채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한 여명은 먼저 말을 꺼냈다.
“세디달.”
-예, 여명.
“한동안 여기서 따님과 함께 계세요.”
-….
역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세디달은 데스나이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여줬다.
커진 눈, 떨리는 눈썹, 그리고 꽉 쥐어진 주먹.
-하지만, 그러면… 당신을 도울 수가…
“따님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게 절 도와주시는 겁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저는 아무리 늦어도 반년 안에 모든 복수를 끝내고… 차원문 너머로 갈 겁니다.”
-모든 복수?
“제 개인적인 복수… 아니, 따님과 손녀의 복수도 포함해서요.”
-….
딸의 복수가 언급되자, 세디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여명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한동안 아카데미에 있을 거고, 아카데미에 따님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함께 따님을 지켜주세요.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세디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심장이 꿈틀거린 탓일까,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그때, 오귀스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길쭉한 직사각형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걱정하시오? 세디달.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은혜 갚을 날이 오는 법이오.”
세디달은 물론이고, 취하지도 않는 술을 홀짝이던 두메아 가주조차 뭔가를 느낀 듯, 오귀스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크흠, 헛기침하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는 천천히 상자의 잠금을 풀며 말했다.
“바로 오늘처럼.”
저건 또 뭔 소리야? 여명이 그를 따라 들어온 쇠미리에게 뭐냐고 묻자, 쇠미리가 작게 덧붙였다.
“유품이죠.”
“유품?”
“예, 어쩌면 여명이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유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자가 열리며 안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암시장에서 본 적 있는 특수한 상자가 틀림없었다.
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용을 살펴본 바로 다음 순간, 두메아 가주가 딱!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놨다.
-아니, 그걸 왜 자네가 가지고 있나?
“샀지. 빌어먹을 지구의 경매장에서.”
-이런 씨, 증손녀가 어쩐지 유품 이야기를 안 하더라니!
성난 두메아 가주의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아름다운 모양의 칼 두 자루였다.
한 자루는 은은하게 녹색 빛을 머금은 장검이었는데, 넓은 칼날에는 마탑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칼은 비교적 수수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손잡이와 얇은 칼날이 지구의 기병용 세이버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겉만 수수했지 내용물은 심상치 않았다. 은은하게 붉은색을 띠는 칼날이 통째로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마나 메탈 합금?
여명이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두 자루 모두 시카고 VIP 암시장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고급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귀스트는 저런 검을 왜 지금 꺼낸 걸까?
“설마…?”
여명이 검의 정체를 떠올린 그 순간, 세디달과 두메아 가주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