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3화(403/817)
***
두 자루의 검, 두 명의 데스나이트.
세디달과 두메아 가주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차례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얇고 붉은 검은 세디달이, 탑이 새겨진 녹색 검은 두메아 가주가.
살아생전 쓰던 무기인 걸까? 검을 쥔 두 사람의 자세가 몹시 익숙했다.
마치 잃어버린 몸의 일부를 되찾은 것 같은 모습.
세디달은 살며시 검을 휘둘러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걸 어디서….
“다시 말하지만, 지구의 경매장에서 구했소. 두메아의 것은 내 조국에서, 당신의 것은 일본에서.”
오귀스트의 대답을 들은 두메아 가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전쟁은 도둑놈과 도굴꾼을 살찌우는 법이지. 얼마 주고 샀나?
그러자 오귀스트는 옛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잠시 수염을 쓸더니, 곧 담담히 말했다.
“그리 비싸지 않았네. 일본 스미토모 그룹에서 집요하게 노리긴 했지만… 10강이란 허명이 이럴 땐 또 도움이 되거든.”
-….
“그러니 가격 생각하지 말고, 받게. 분실물은 주인에게 돌아가야지.”
직후, 오귀스트는 상자를 닫았다. 지켜보던 두메아 가주는 물론이고 여명조차 감탄할 정도로 깔끔한 태도였다.
-분실물이라.
두메아 가주는 검을 들어 검날에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살아생전 전장을 누비던 초인은 그곳에 없었다. 이제는 술맛조차 느끼지 못하는 창백한 데스나이트의 얼굴만이 있었다.
그렇게 감상에 빠진 가주가 입을 다물길 잠시.
똑같이 검을 보던 세디달이 문뜩 여명을 불렀다.
-여명.
“예?”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세디달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명, 이 검은 제 딸이 태어난 걸 기념해서 드워프들에게 의뢰한 검입니다.
갑자기? 여명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세디달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제 딸을 잃고 나서야 이 검을 받게 되었죠. 그래서 전… 검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
-딸을 찾으면, 그때 가서 이름을 붙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딸을 만나지 못한 채로 죽었고….
세디달은 말을 끝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자락에는 잠든 딸과 손녀가 있었다.
-딸과 만난 날, 이 검 또한 제게 돌아왔군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운명? 우연?
“….”
-정답이 무엇이건 간에, 저는 드디어 검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검의 주인은… 제가 아니란 생각이 드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세디달이 그에게 검을 내밀었으므로.
은은하게 열기를 머금은 붉은 검.
내 것이 될지도 모르는 선물이라더니. 아까 쇠미리가 했던 말이 이걸 뜻했던 건가.
“세디달, 저는-”
-시리.
“….”
-그게 이 검의 이름입니다. 여명, 받아주시겠습니까?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쇠미리와 감정이 북받친 오귀스트, 그리고 잠든 시리를 차례대로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쓰겠습니다.”
검을 받자, 따스한 열기가 손을 데웠다. 산의 눈물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완성된 검이었다.
잠시 열기를 음미하던 여명이 허리에 검을 꽂자, 세디달이 한 걸음 물러나며 웃었다.
-그 검이 당신이 우리 모녀에게 해준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여명 또한 그녀를 따라 웃는 사이, 두메아 가주가 검을 내려놓고 한마디 했다.
-이런! 나도 저거 할걸.
“…뭘요?”
-검에 손녀 이름 붙여서 꼬시기.
“….”
-이 검의 이름을 살로메… 쓰읍, 이건 가주의 상징이라 그럴 수도 없군. 여명, 이 검을 줄 테니 우리 증손녀에게 전해주겠나?
“…그러지 말고 그냥 직접 주시죠.”
여명이 한마디 쏘아주자, 구경하던 오귀스트가 피식 웃었다. 두메아 가주는 투덜거리며 검을 들었다.
-이거, 보는 눈이 있어서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 나도 한마디 하겠네!
“안 하셔도 됩니다.”
-어허, 어찌 그러겠나? 분위기가 있는데. 어디 보자… 그래, 전 두메아 가주인 롭 리어 두메아가 가주의 보검에 대고 맹세한다. 나는…
그때, 여명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신 뒤에, 편히 성불하세요.”
말 꼬리가 잘린 두메아 가주가 뚱한 눈으로 여명을 바라보기 무섭게, 참지 못한 오귀스트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뒤에 있던 바라나 또한 껄껄 웃었고 세디달 또한 웃음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결정타는 시리였는데, 소란스러움에 깨어난 그녀는 비몽사몽인 얼굴로 오귀스트를 따라 손뼉을 쳤다.
그걸 본 여명마저 웃어버리자, 김이 샌 두메아 가주는 검을 꽂아 넣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에이, 딸 못 만난 사람은 억울해서 뭐 하겠나.
투덜거림과 함께 잔을 채운 그는 오귀스트에게 잔을 내밀었다. 검의 가격을 생각하면 참으로 값싼 술이었으나, 오귀스트는 거절하지 않았다.
기울어지는 술잔을 따라 밤이 깊어졌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웃는, 그런 밤이었다.
***
다음 날 새벽.
여명은 졸린 눈을 억지로 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청소부 시절이었다면 형들을 깨우고 다녀야 할 만큼 이른 시간.
하지만 지금 그의 일행은 원래 잠을 자지 않는 데스나이트들이었다. 여명은 1층 거실로 내려가자마자 잠 없는 자들의 꼬락서니를 마주해야 했다.
-마침 대작할 사람이 다 떨어졌는데, 와서 술 한잔할 테냐?
-거룩히 빛나시는 태양이시여, 사랑으로서 우리를 비추어…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는 두메아 가주와 아침 기도 중인 바라나. 그리고…
-호주는 새벽 영화도 안 틀어주나? 뭐 볼 게 없군. 여명! 와서 케이블 좀 연결해 줘!
낡은 TV 앞에서 투덜거리는 듀크 중령까지. 여명은 나중에 샤프슈터를 알려 달라는 말로 그를 넘긴 뒤, 주방으로 도망쳤다.
“아.”
하지만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움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방 바닥에는 문자 그대로 빈대떡이 된 구더기 공주가 누워있는 까닭이었다.
실수로 그녀의 엉덩이를 밟은 여명은 그녀가 미동조차 안 한다는 걸 깨닫고 그냥 그녀를 밟고 지나갔다.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아무튼, 냉장고 앞에 도착한 여명은 또 다른 식객과 마주해야 했다. 냉동식품을 우물거리고 있는 쇠미리.
“….”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자마자, 쇠미리가 입가에 있던 감자 쪼가리를 쏙 삼키며 말했다.
“어제 밥을 못 먹어서….”
“배고팠겠네.”
“그리고 힘도 많이 썼고….”
“그래, 배고팠겠네.”
“그렇다고 피곤한 여명에게 밥 차려 달라고 하기도 뭐해서….”
말꼬리가 길어지는 그녀를 향해, 여명이 말했다.
“밥 먹으러 나갈까?”
“예?”
“세팔리를 위해서 이것저것 생필품도 챙겨야 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비행기도 잡아야 하고… 오늘 할 일이 좀 많아. 밥 사줄 테니까, 같이 나가자.”
“…단둘이서?”
“다른 사람 데리고 가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아뇨, 아뇨. 둘이 가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쇠미리는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갔다.
여명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식탁을 정리한 뒤, 정문으로 향했다.
서늘한 밤공기가 코를 간질이는 가운데,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오귀스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인가?”
“…예, 일단은 학생이라서요.”
오귀스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덧붙였다.
“자네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묻지 않겠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테니. 그렇지?”
“예.”
“으음… 그러면 아카데미에는 따로따로 가지. 되도록이면 처음 만나는 척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안 도와주셔도….”
여명이 완곡하게 거절하려 했으나, 오귀스트의 뜻은 확고했다.
“내가 원하는 건 데스나이트들이 성불할 수 있도록 돕는 걸세. 혹시라도 그 대가로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게.”
“주와이외즈를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자 오귀스트가 슬쩍 눈을 뜨며 말했다.
“원하면 호주 총리의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줄 수 있네만.”
“예?”
“자네 머리 위로 호주 군이 미사일을 날렸잖는가. 애써 도와줬는데 엿을 먹이다니. 나 같으면 총리 관저로 날아가서 명치에 구멍을 내줬을 거야.”
“….”
역시, 이 늙은이도 성질머리가 정상은 아니었다. 10강은 다 이런가? 여명은 그녀의 증손녀를 두들겨 팬 세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드니에 아야톨라가 둘이나 있었다는 걸 알면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로 바빠질 텐데요. 뭐.”
“그런가? 알겠네. 그럼 내 몫만큼만 때리지.”
살벌한 말과 함께 오귀스트가 다시 눈을 감은 직후, 이쁘게 차려입은 쇠미리가 정문으로 내려왔다.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 새하얀 셔츠 원피스 차림. 깔맞춤인 듯 라임색 슈즈까지 챙겨 신은 그녀는 여명과 나란히 서며 물었다.
“어때요?”
여명은 평범한 남자가 그러하듯 옷이 이쁘다- 같은 말을 하는 대신, 피눈물의 환상을 일으켰다.
“너무 눈에 띄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외모가 백인 아줌마와 아저씨의 그것으로 변했다.
펑퍼짐한 옷에, 화장기 없이 드러난 주름, 흉터… 변신한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평범한 노동자 부부처럼 보였다.
“아, 진짜! 여명!”
애써 꾸미고 나온 쇠미리가 거울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길 잠시. 그녀는 주섬주섬 신발을 신는 여명을 보며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뭐… 이것도 같이 늙은 부부 같아서 나쁘지 않네요.”
신랄하다하면 신랄하고, 솔직하다면 솔직한 평가.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바깥에서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바닷바람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이제 막 잠을 깬 도로와 건물이 깨어나고, 부지런한 자동차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교외의 풍경.
두 사람은 그 속으로 파고드는 대신 해변가로 향했다. 새벽 해변가의 바람은 생각보다 심했는데, 장난꾸러기 아이가 두 사람의 머리를 후후 불어 재끼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나마 멀쩡한 시드니 외곽에 도착한 두 사람은 느긋하게 쇼핑몰을 돌아다녔다.
세팔리와 세디달 모녀를 위한 생필품과 아카데미에서 쓸 물건들을 구매하고,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한 예비품들을 채워 넣고….
그렇게 한참 쇼핑을 한 두 사람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비행기표 예약뿐이었는데…
“이번 일 때문에 한동안 비행기가 안 뜨네요.”
시드니 공항은 먹통이었다. 다른 도시의 공항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아카데미가 문제였다.
테러를 대비하기 위해 적어도 삼 일은 공항을 닫는다나.
배를 타고 가는 수도 있겠지만, 밀수선을 수색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이틀은 걸리는 일이었다.
대충 이틀은 더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소리. 세티가 아카데미에 있는 만큼 큰 걱정은 없었지만…
“이틀은 제가 여명을 독점하는 거네요? 하, 성녀님이 아쉬워하겠어요.”
쇠미리는 쌤통이라는 듯 웃었다. 여명은 일행이 이렇게 많은 데 독점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묻지 않았다.
-띠리링.
때마침, 성녀의 전화가 걸려 온 탓이었다. 쇠미리는 그의 휴대폰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뭐냐, 한국 속담 같네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호랑이면 낫지. 적어도 총은 안 쏘니까.”
여명의 농담에 쇠미리가 킥킥거리는 사이, 그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안녕 여명. 몸은 어때? 괜찮아?
예상외로 부드러운 성녀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나야 괜찮지. 그쪽은 어때?”
-이쪽도 문제없어. 네가 없어진 걸 눈치챈 용이 밥 달라고 징징거리는 것만 빼면.
“….”
-아무튼, 언제 올 거야?
여명은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걸린다는 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가 으르렁거렸다.
-귀쟁이한테 전해. 뒤지기 싫으면 오늘 내로 차원문 열고 오라고.
“…차원문?”
-귀쟁이한테 물어보면 잘 알려줄걸?
“…?”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성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초인 올림피아 신청이 코앞이니까, 늦지 말고 와. 알았지?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세티가 한 말이니까 꼭 지키고!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여명이 쇠미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애꿎은 커피를 쿡쿡 찌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 태도를 본 여명이 웃으며 물었다.
“…차원문은 또 뭐야?”
“드레이테리얼에 네티를 보냈을 때, 기억하시죠?”
“응.”
“그거예요. 플레이어를 죽일 때 남은 작은 조각, 그걸 사용하면 차원문을 열 수 있거든요. 마나가 무식하게 많이 들어가서, 실전적인 용도로는 쓰기 어렵지만.”
“…내 마나를 다 털면 시드니에서 로드 하우로 날아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여명은 식당 메뉴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바로 돌아가자.”
“…다, 당연하죠. 저도 진짜로 이틀이나 있을 생각 없었어요.”
“진짜? 내가 이틀 더 있자고 하면 어쩔래?”
“….”
쇠미리는 샐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녀였다면 이럴 때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글쎄, 대답 안 하고 총 쏘지 않았을까.”
“….”
그 정도야? 할 말이 없어진 쇠미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는 성녀처럼은 안 할래요. 그냥… 약속대로 단둘이서 같이 밥먹기. 괜찮죠?”
보란 듯 메뉴판을 펼치는 쇠미리.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쇠미리는 최대한 식사 시간을 늘려보겠다는 듯 메뉴판에 고개를 박았다. 그냥 다 시키면 될걸. 뭘 고민하는 건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린 여명의 시야로, 문뜩 매장 내 TV가 들어왔다.
곧이어 여명의 시선이 TV에 고정됐다. 화면 너머에서는 그의 다음 목표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미래를 목도하라.] [새 시대를 이끌어나갈 별들의 대전!] [지구와 아샤 157개국 참여, 초인 올림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