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4)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4화(404/817)
***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쇠미리와의 식사가 끝나고 얼마 후.
여명은 세디달의 주택으로 돌아와 각종 생필품과 의약품, 그리고 경보기를 꽉꽉 채워 넣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세팔리와 세디달 두 사람만을 남기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의외로 시리는 덤덤했다.
여명이 이유를 물었더니-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라고,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최근 부쩍 웃음이 많아진 처제를 보며 안심한 여명은 곧 데스나이트들을 차례대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오귀스트는 다음에 보자면서 첫 만남만큼이나 제멋대로 떠났다.
그렇게 일행을 줄이고 줄이자 차원문을 넘어갈 사람은 다섯. 여명, 시리, 엘프 둘, 구더기 공주.
여명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구더기 공주를 대충 짐 가방에 쑤셔 넣은 뒤,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뭐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건 아니었고, 마나의 흐름을 숨길 마법진과 황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마석이면 충분했다.
플레이어가 마지막 발악으로 남긴 차원문과 타락석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마석.
쇠미리는 일행들에게 마석을 내밀며 말했다.
“각자 마나, 혹은 피를 부으세요.”
처음이 아니었는지, 시리가 가장 먼저 손바닥을 째서 마석에 피를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차례대로 마석에 피를 부었다.
기절한 구더기 공주의 경우에는 여명이 얼음 바늘로 손가락 끝을 살짝 피를 냈는데, 움찔거리는 걸 보니 쪽팔려서 자는 척을 하고 있는 듯했다.
뭐, 아무튼.
준비를 끝낸 여명은 마지막으로 피와 마나를 불어넣었다. 작은 마석이라고해서 우습게 봤는데, 역시 차원문은 차원문이었다.
마석에 손을 대는 순간, 아찔할 정도로 마나를 쑤욱 빼먹는 게 아닌가.
세티의 금제를 풀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
다행히 그의 마나가 바닥나기 전에 마석이 활성화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번쩍- 빛과 함께 벌어진 마석은 2M가 조금 모자란 높이의 황금색 장막으로 변했다.
차원문.
국가가 운영하는 거대 차원문과 비교할 수 없는 작디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엄연히 차원문이었다.
여명은 흥미로운 눈으로 차원문을 살펴보다가, 문뜩 이 차원문의 수명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한마디 했다.
“가성비가 영 꽝이네. 이만한 마나로 몇 분이 한계라니.”
그러자 쇠미리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이것도 나름대로 개조한 거예요. 처음에는 한 사람 넘어가는 것도 아슬아슬했다니까요?”
“아, 그래서 네티 혼자 보낸 거야? 근데 왜 네티였어?”
“…정당한 가위바위보의 결과였죠.”
그런 뒷사정이?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한 일행은 차례대로 차원문을 넘기 시작했다. 리메, 쇠미리, 그리고 여명이 차원문에 발을 담근 찰나.
세디달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혹여 잊은 게 있는 걸까?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마지막으로, 시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명.
검? 아니면 손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직후,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당황하는 시리의 손을 붙잡고 차원문을 넘었다.
***
한때, 신을 마약으로 취급하던 자들이 지배하던 땅이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를 삼키고, 이제는 괴물을 토해내는 땅.
시베리아.
신과 공산주의자 모두에게 버림받은 그 땅에서, 신성한 섬광이 번쩍였다.
지구 너머, 다섯 신이라 불리는 신들의 빛.
이제는 어떤 항공기도 지나지 않는 시베리아 공중 항로가 오색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파.
!!!
충격파가 구름을 밀어낸 자리로 두 개의 점이 추락했다.
시베리아의 드높은 나무들조차 고개를 들어야 할 높이에서 떨어진 두 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에서 자세를 바꿨다.
중력을 무시하는 자유로운 움직임.
가까이서 보니, 그중 하나는 안대를 찬 여인이었다.
갈색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는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염병.”
그녀의 시선이 하늘의 반대편, 정확히는 수백 미터 떨어진 상공에 멈춰 선 남자를 향했다.
눈코입이 막힌 새하얀 가면에 금빛 자수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은 남자.
그의 가면에는 붉은 눈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꼴이 몹시나 혐오스러웠다.
안대의 여인, 프레아 칸이 욕을 내뱉을 정도로.
“눈물, 이 애미 없는 씹새끼.”
눈물이라 불린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욕설을 무시했다. 잠시 성검을 바라보던 그는, 그녀에게 손바닥을 겨누며 말했다.
“성검, 부디 부질없는 저항은 그만하시오.”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권능은 성검이라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삶은 고통이요, 죽음은 해방이니. 나는 그대의 해방자라오.”
역겨운 목소리를 따라 감정이 들끓었다. 침착, 불안, 갈등… 프레아 칸은 성검을 꽉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
“…몇 번을 당해도 엿 같은 권능이란 말이지.”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든 순간, 차가운 시베리아의 공기가 전율했다.
한 걸음. 공중을 밟은 그녀의 몸이 가속했다. 공간이 좁혀지며 빛이 번뜩였다.
동시에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기이한 마나가 움직이며 그를 중심으로 소리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 – !!!
소리가 비명이 되어 공기를 때렸다. 귀를 찢는 비명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퍼져 나갔다. 충격이 어찌나 큰지, 저 아래에 있는 나무들이 출렁거릴 정도였다.
피할 방도는 없었다. 성검은 몸으로 비명을 맞아가며 남자의 가면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공중에서 내지르는 검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검세. 마나를 머금은 성검은 10강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푸확!!
신성한 검은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토막내는 걸로도 모자라 몸을 반으로 잘랐다. 깔끔한 십자 베기.
피가 왈칵 쏟아지며 토막 난 남자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성검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사나워진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허공 저편에서 똑같은 가면을 쓴 놈이 또 튀어나왔다.
“구원자를 위한 구원자는 없는 법. 당신은 모스크바에 구원을 주었지만… 대가가 이것이오.”
저벅- 눈물이라 불린 남자는 허공을 밟으며 성검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아래, 시베리아의 눈 덮인 땅에는 성검이 썰어버린 녀석의 시체가 가득했다.
대충 120번쯤 죽였나? 프레아 칸은 새로 다가오는 녀석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대가는 내가 알아서 받아낼 거니까, 신경 꺼 새끼야.”
“왜, 고통을 늘리는 것이오? 빠져나갈 구멍은 없소.”
눈물이 속삭였다. 지난 이틀 내내 지껄였던 그대로.
“이제… 끝내시오. 고통을 끝내시오.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시오.”
녀석의 목소리는 뱀의 그것처럼 사특하고 사과의 그것처럼 달콤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씨발, 프레아 칸이 성검의 신성력을 끌어올려 녀석의 권능을 떨쳐낸 찰나.
뭔가가 그녀의 감각을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베리아 상공 저편에서 기다란 꼬리 구름과 함께 날아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아 이 진짜 씨-.”
소리보다도 빠르게 날아온 그것은 성검이 쌍욕을 내뱉기도 전에 그녀의 코앞에 도착했다.
수십, 어쩌면 수백 킬로미터 바깥에서 날아온 대공 미사일.
프레아 칸의 몸이 빛나며 재빨리 회피기동을 선보였지만, 마나 유도 방식을 사용한 미사일은 기어코 그녀의 꼬리를 붙잡았다.
콰아아아앙 – !!
조금 전 둘의 격돌에 지지 않을 만큼 격렬한 폭발.
연달아 불청객들의 방문을 받은 시베리아의 나무들은 우수수 눈을 쏟아냈다.
그리고 폭발이 남긴 죽음의 연기가 땅으로 추락하길 잠시.
검은 먼지 사이에서 프레아 칸이 튀어나왔다.
“아오!”
그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상반신의 절반은 새까맣게 타버렸고, 허벅지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에 들린 성검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켜 눈에 띄는 속도로 상처를 재생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곳을 겨누고 있는 대공 미사일은 한 발로 끝이 아니었다. 당연한 준비였다. 상대는 성검 아닌가.
눈물은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대는 충분히 노력했소.”
“닥쳐.”
“느끼고 있지 않소. 모스크바부터 시베리아까지… 이 모든 함정은 당신을 위한 것이오.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걸 만들어 뒀으리라고 보시오?”
“…하, 감당할 자신은 있냐?”
“그대의 죽음? 물론이오. 성검의 몰락으로 바뀔 운명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소.”
“….”
“이미 예정된 운명이 너무나 많이 비틀려버렸소.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고, 네 번째로 나서야 할 꿈이 벌써 죽었으며, 빨갱이들은… 길을 잃었지.”
“….”
“죽음을 피하지 마시오. 우리가 그대에게 끝을 약속했음이니, 그대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오.”
프레아 칸은 퉤- 한 번 더 피를 뱉었다. 엿 같지만, 녀석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신족통만 쓸 수 있었어도….’
성검이 자랑하는 순간 이동의 이름. 하지만 시베리아의 상공에 도달한 순간부터 성검은 다섯 신과 연결된 대부분의 기적을 봉인 당했다.
게다가 눈앞에는 무한히 재생하는 아야톨라가 있고, 뒤통수에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대공 미사일이 조준된 상황이라니.
참 독하게도 준비한 함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아가리 놀리지 말고 덤벼.”
그녀의 완고한 태도를 본 아야톨라, 눈물을 흘리는 자는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가 운명의 희생자요. 같은 고통을 나누는 형제이니. 그대는 나를 탓하지 마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검이 아야톨라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팔다리만 잘라 부활을 막을 심산이었는데….
그녀가 팔을 자른 직후, 아야톨라가 자폭했다.
꺄아아아아-!!!
피와 살점, 그리고 비명이 뒤섞인 폭발. 성검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폭발의 상처는 별거 아니었지만, 폭발 뒤에 따라올 다음 수작이 문제였다.
저편에서 날아오는 또 다른 대공 미사일, 그것도 세 발.
성검은 욕할 시간도 아낀 채 검기를 뿌렸다. 콰아아앙-!! 백색 신의 축복을 가득 머금은 검기가 넓게 퍼지며 미사일 하나를 격추했지만, 나머지 두 개는 그녀의 마나를 인식하고 곧바로 궤도를 틀었다.
염병할 현대 무기.
프레아 칸은 마지막까지 몸을 가속해 폭발에서 벗어났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직격을 피했을 뿐, 폭발에 휘말리는 건 다르지 않았다.
!!!
귀를 찢는 이명. 피부가 타오르며 손에 쥔 성검 외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추락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하늘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건, 적어도 3분은 치유의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
아야톨라가 그만한 여유를 줄까? 상관없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프레아 칸이 필사적으로 치유에 매달리길 잠시.
애써 한쪽 눈을 재생한 그녀가 처음 마주한 건, 시베리아의 맑은 하늘도, 눈으로 뒤덮인 숲도 아니었다.
낯선 콘크리트 벽.
천장이 뻥 뚫린 채 찬바람이 들어오는 걸 보니, 시베리아에 버려진 옛 소련 건물에 추락한 듯싶었다.
‘운이 좋군.’
그녀가 성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데, 의외의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일어나지 마. 미사일을 두 발이나 처맞고 벌써 일어나면 미사일이 서운해한다고. 응? 그게 얼마짜린데.”
“….”
프레아 칸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색 단발의 계집이 그녀를 향해 히죽거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파… 순…?”
“날 알아봐? 이거, 영광이네.”
“…날, 구한, 거냐?”
“아직 고민 중이야. 죽일까 말까.”
“….”
농담이 아니었다. 파순은 언제라도 그녀의 목을 타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손을 겨누고 있었다.
저 일격을 피할 정도로 몸을 치유하려면 적어도 1분은 더 걸릴 터였다. 프레아 칸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대충 10초쯤 지났을까? 뭔가를 고민하던 파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봐, 아줌마. 질문 하나만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살려줄게.”
“…뭐냐?”
프레아 칸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보겠다는 듯 퉤- 침을 뱉었… 아니, 뱉으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질문은 받는 순간, 그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당신한테 성검을 넘긴 거, 전대 성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