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5화(405/817)
***
그녀가 처음 모스크바 상공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마무리되고 있었다.
적어도 프레아 칸이 느끼기엔 그랬었다.
종말 교단이 일으킨 방화와 폭동은 슬슬 정리되고 있었고, 교단원들은 군의 무차별 사격 앞에 벌집이 된 지 오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세상의 절반을 지배하던 국가의 수도 아닌가.
아야톨라가 직접 결계라도 펼치지 않는 이상, 고작 테러리스트 한 줌으로 모스크바 수도 방위군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서기장이 살아있던 시절이라면 이런 테러 자체를 상상도 못 했겠지만…
잠시 모스크바를 내려다보던 성검은 자신이 아야톨라가 나올 것을 대비해 불려 온 임시 전력이라는 걸 눈치챘다.
아무리 아야톨라가 귀찮은 적이라지만, 모스크바가 굳이 그녀를 부른 이유야 뻔했다. 가성비.
혹시 모를 일에 전력을 낭비하느니, 전문가인 그녀를 써먹고 호주에게 외교적 보답을 해주는 게 싸게 먹힌다는 거겠지.
이번 일의 대가는 아마 호주가 주도하는 핵 감축 조약에 참여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이미 산처럼 쌓인 핵무기를 조금 줄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종말의 시계를 늦추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멸종은 피할 수 있겠…
그렇게 잡념을 이어가던 그때, 그녀의 귓가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경고, 도시 동부 스베르들롭스크 방향, 도주 중인 아야톨라 확인. 반복한다. 아야톨라 확인.]드디어 일할 순간이 왔다. 프레아 칸은 안내를 따라 동쪽으로 날아가며 물었다.
-지원은?
[없다.]-그러면 우랄 방면군은? 허가는 나왔나? 우랄 연방 상공을 날아가도 되는 건가?
[우랄 관제 센터에 알리겠다. 우랄 방면군이 녀석을 처리하기 전에 먼저 아야톨라를 처리하길 바라지.]빌어먹을 보드카 새끼들. 동맹이 아니라 대놓고 심부름꾼 취급이었다.
성검은 욕지거리를 참으며 아야톨라를 쫓았다. 녀석은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녀를 떨쳐냈는데, 추격전이 시작되고 반나절 만에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도착할 정도였다.
덕분에 우랄 방면군이 먼저 아야톨라를 처리하는 일은 없었지만…
…아니. 사실은 일부러 안 잡은 거라면? 방면군 중 일부가 아야톨라에게 세뇌당한 거라면.
아야톨라의 도주 경로, 그녀를 노린 함정, 대공 미사일…
확증은 없었지만 정황증거는 차고 넘쳤다.
씨발! 이걸 이제야 눈치챈 자신도 씨발이었고, 군부대가 털리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스크바도 씨발이었다.
‘평화가 너무 길었어.’
노인네 같은 생각을 마지막으로, 프레아 칸은 눈을 떴다.
***
후우-
프레아 칸은 기다란 호흡과 함께 상념에서 깨어났다.
회복된 육체가 꿈틀거리고 성검이 축복을 거두는 가운데, 시베리아의 추위가 그녀의 몸을 간질였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녀는 대공 미사일이 들었으면 서운해할 소리를 지껄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타버린 옷까지 재생할 능력까지는 없는 탓에 단련된 육체가 햇빛 아래 노출됐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
“벌써 재생 끝났어? 내가 본 사람 중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빠르네. 아줌마.”
아, 한 명 있었다.
프레아 칸이 고개를 돌리자, 파순이 철문을 열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녀석은 어디서 구해온 건지 알 수 없는 옷을 던졌다.
낡긴 했지만, 아직 입을만한 옛 소련의 군복.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해온 거람.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은 프레아 칸은 군복 단추를 잠그며 투덜거렸다.
“아줌마 아닌데….”
“그렇다고 나처럼 꽃다운 처녀도 아니지.”
“….”
“그리고 아직 긴장 풀지 마. 지금도 눈물이 그쪽을 찾고 있으니까.”
녀석은 구멍 난 천장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시릴 정도로 맑은 시베리아의 하늘. 조금 전 아슬아슬한 상황을 떠올린 성검은 한숨을 쉬었다.
“고작 눈물 한 명한테… 이거 원, 쪽팔려서.”
그녀의 한숨을 바라보던 파순은, 두꺼운 겉옷 속에서 수통을 꺼내며 말했다.
“쪽팔린 건 알아서 다행이네.”
“….”
먼저 수통을 홀짝인 파순은 그녀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수통 주둥이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싸한 게, 물이 아니라 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보드카.
“…꽃다운 처녀가 대낮부터 보드카를?”
“거, 농담 담아두지 말고, 어쩌다가 그쪽 같은 양반이 함정에 빠진 건지 설명 좀 해봐.”
“….”
싸가지 없는 새끼. 성검은 보드카로 목을 축인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스크바를 도우러 파견된 것부터, 머저리처럼 아야톨라의 함정에 빠진 것까지, 대부분.
그렇게 그녀가 수통의 절반 정도를 비울 때쯤, 파순이 이죽거렸다.
“함정에 빠져서 잡아 먹히다니. 이거, 10강 꼴이 말이 아니네?”
“닥쳐, 인마.”
“이참에 나도 10강 해봐? 아야톨라 하나쯤은 나도 조질 수 있-.”
그때, 낯선 감각이 파순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성검이 긴장과 함께 검을 들어 올린 바로 순간.
아까 파순이 들어왔던 철문 너머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다.”
“뭐?”
“둘이다. 허무를 흘리는 자가 상공에서 10km가 넘는 대결계를 펼치고 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나가겠더군.”
그런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건 두꺼운 코트로 전신을 가린 거구의 남자였다.
그를 보며 하나 뿐인 눈을 번뜩이는 성검과 달리, 파순은 익숙하게 녀석을 맞이했다.
“시발, 그러면 우리도 갇힌 거야?”
“당연한 소리를.”
둘이 아는 사이인가? 성검이 눈치를 보며 슬쩍 검을 치우건 말건, 두 사람은 계속 쑥덕거렸다.
“결계는 얼마나 갈 거 같아?”
“투입된 타락석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24시간은 유지될 것 같다.”
“이야, 진짜 독하게 준비했네, 그깟 성검이 뭐라고….”
파순이 말끝을 흐리며 성검을 훑자, 프레아 칸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쪽에서 날 그렇게 원한다면야, 호응해주는 게 도리겠지.”
“오.”
“너희 둘, 내가 녀석들을 잡는데 협조하면 합당한 보상을 주마. 어때?”
갑작스러운 제안. 독화는 묵묵부답이었고, 파순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합당한 보상은 무슨. 공무원 주제에. 왜, 공무원 연금이라도 주게?”
“….”
“그리고 이미 한 번 뒤질 뻔한 함정 또 왜 들어가? 기껏 살려줬더니 또 죽으려고?”
“나 혼자라면 그렇겠지.”
프레아 칸은 두 사람을 훑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희가 합세하면… 둘은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파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고민하듯 뚫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아야톨라가 살아있는 쪽이 재밌을 거 같아. 당신보다는 걔가 죽여야 재밌어. 그리고 무엇보다… 할 일도 있고.”
“…할 일?”
프레아 칸이 되묻자, 파순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일. 아줌마, 목숨값도 빚졌겠다, 아야톨라는 내버려 두고 우리 일이나 도와줘. 공무원 연금은 안 받을 테니까. 어때?”
“….”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프레아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아야톨라의 결계가 약해질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아니, 녀석들을 감시하는 의도 또한 있었다.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건물을 뒤지는 초인이라니, 아야톨라만큼이나 구린 냄새가 나지 않나.
아무튼, 파순은 독화와 함께 무너진 건물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줌마, 여기가 어딘 거 같아?”
시베리아 어딘가에 버려진 폐건물… 하지만 그런 뻔한 답을 원했다면 굳이 질문도 꺼내지 않았겠지.
프레아 칸은 잠시 고민하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낡은 계단이 보일 때쯤 나름대로 답을 내놨다.
“아야톨라가 추적하지 못하는 걸 보면… 어디 군사 시설인가?”
“땡. 아쉽지만 틀렸습니다.”
“그러면?”
“연구소야. 그것도 소련 시절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
비밀 연구소? 프레아 칸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연구소의 이름을 꺼냈다.
“…시베리아 제1연구소?”
스탈린이 실종되었을 때 함께 사라진 전설의 연구소. 그 이름을 들은 독화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가운데, 파순이 피식 웃었다.
“오, 이번에는 좀 비슷했다.”
“….”
“하지만 아쉽게도 틀렸어. 여긴 제3연구소야. 제1연구소는 이 땅에 없거든.”
녀석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계단 아래에는 봉인된 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핵 방공호가 떠오를 정도로 두꺼운 철문.
프레아 칸이 이 문을 어떻게 열 거냐고 묻기도 전에, 독화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대뜸 문 위에 손을 올렸는데, 장갑으로 가린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된 붉은 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주가시빌리….’
옛 소련의 요원들을 상징하는 무술이 문에 흡수되기 무섭게, 철문이 기기긱-! 비명을 내지르며 스스로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딸깍거리고 철컥거리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걸 보니, 마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어마어마한 잠금이 걸려있던 모양.
대체 이렇게까지 감춰야 할 연구가 뭘까? 핵무기?
프레아 칸의 궁금증이 깊어지는 가운데,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철문 너머에서 가장 먼저 보인 건 깊은 어둠이었다. 무슨 불 꺼진 탄광 같은 어둠.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인 건…
붉은 글씨가 가득 적힌 종이 한 장. 독화는 허리를 굽혀 그 쪽지를 주웠다.
“우리의 선배들은 붉은 기를 들고 나치와 싸웠다. 우리는 일제와 싸웠다. 우리는 지옥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웠다. 우리의 존엄, 인민의 존엄을 위해. 인간을 실험동물로 보는 것들과 싸워 승리했다.”
뭔가 중요한 쪽지인가 싶었는데, 그냥 선동물이었나? 프레아 칸이 심드렁하게 한숨을 쉬려는 찰나.
독화가 종이 뒤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하지만 이곳에 인민은 없다. 레닌도, 마르크스도 없다. 조국을 사랑하는 이여, 여기서 돌아가라.”
“휘유- 무슨 공포 영화 시작 같네.”
어디가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파순은 휘파람을 불며 킥킥 거렸다. 독화는 쪽지를 꾸깃- 접어버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 녀석은 그대로 벙커 안으로 들어… 가지 않았다. 파순이 대뜸 그의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아, 전등 안 챙겨 왔다.”
“….”
“눈에 마나 두르면서 다니기엔 너무 넓은데… 아줌마, 성검 말인데, 그거 발광 돼요?”
프레아 칸은 하나 남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성검을 전등으로 쓰겠다고?”
“되죠? 평소에 번쩍거리는 거 보면 충분히 쓸 수 있는 거 같은데.”
“아니, 뭐, 되긴 하는데….”
성검이 부르르 울며 그녀에게 항의하는 것이 느껴졌다. 프레아 칸은 마음속으로 성검에게 사과한 뒤 검을 뽑았다.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자세. 눈 깜빡하면 두 사람의 목을 벨 수도 있는 범위였지만, 독화와 파순 모두 개의치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이야, 어두운 데서 보니까 존나 이쁘네. 전등 굿즈 만들어서 팔아먹으면 대박 나겠다.”
여유롭게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게 아닌가. 프레아 칸은 긴장한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아쉽지만 성검 관련 상품은 못 만들어. 저작권이 복잡하거든.”
“….”
묘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은 파순이 실망하는 사이, 일행이 동시에 정지했다.
성검의 불빛 너머, 빼빼 마른 시체들이 가득 쌓여있었으므로.
***
하나 같이 텁텁한 방부제의 향을 풍기는 시체들.
프레아 칸이 성검을 휘둘러 빛을 펼쳐보니, 복도에 쌓인 시체가 족히 수백구는 넘는 것 같았다.
“…시발, 여기 뭐야?”
“시베리아 제3연구소.”
“헛소리 말고,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농담을 던지던 가벼운 분위기는 여기까지였다. 프레아 칸이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독화가 콰직- 시체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탈린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저건 갑자기 또 무슨 개소리야?
프레아 칸은 파순을 향해 해답을 요구했지만, 녀석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거, 분위기 잡고 싶다는 데 그냥 맞춰 줍시다.”
“….”
결국, 두 사람은 말라 비틀어진 시체를 밟으며 독화를 따라갔다.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스탈린이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스탈린도 언젠가 늙어 죽을 거라는 사실.”
“엘릭서가 수명을 늘려준 탓에 모두 잊고 있었지만, 죽음은 만물이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으니까.”
녀석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운 프레아 칸과 달리, 파순은 심드렁하게 보드카를 홀짝거렸다.
“예, 예, 그러시겠죠. 위대한 서기장님 만세.”
“…세간의 평가가 어떻건 간에, 스탈린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 이래로 가장 넓은 땅을 지배하는 자였고, 파시스트를 무너트린 영웅이자, 인민의 아버지….”
그때, 성검이 그의 말을 끊었다.
“…인민의 아버지는 뭔, 엿 같은 독재자였겠지.”
“그래, 엿 같고, 잔혹한 독재자였지. 권력을 위해 수십만을 죽이고, 수십억의 목숨을 쥔 독재자.”
끼이익- 독화는 성검의 빛에 의지해 복잡한 복도와 철문을 넘었다.
입구로 몰려가다가 죽은 건지, 연구소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의 시체들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 불길함은 더욱더 짙어졌지만.
“아이러니한 건, 수십억 공산주의자 중 누구도 그보다 뛰어나지 못했단 사실이다. 물론, 후계자 후보들은 있었지. 베리야, 예브게니, 등소평, 호네커…”
“….”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정한 스탈린의 후계자로 취급받지 못했다. 당의 위원들도, 인민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 기껏해야 스탈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나 할 수 있는 정도? 그런데 여기서 웃긴 점이 뭔지 아나?”
하나도 안 웃겨 씨발. 파순이 중얼거리는 사이, 프레아 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웃긴 점?”
“권력을 잡은 뒤, 스탈린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게 웃기냐? 빨갱이들의 유머란.”
파순이 이죽거리기 무섭게, 독화가 멈췄다. 그의 앞에는 앞선 시체들과 확연히 다른 시체가 놓여있는 까닭이었다.
작은 아이의 시체.
그것을 본 성검의 빛이 부르르 떨리는 가운데, 독화는 시체를 밟지 않고 조심스레 옆으로 치웠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공산권 내부에는 국가와 세력을 뛰어넘은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
“아니, 스탈린이야말로 우생학이 추구하던 가장 우월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공감대.”
성검의 하나 남은 눈동자가 팍 찌그러졌다. 굳이 표정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파순이 준 보드카를 마시고 있지 않았다면, 바로 쌍욕을 내뱉었을 표정.
독화는 아이의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조심스레 시체를 치우며 계속 말했다.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당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위대한 지도자를 향한 우상화와 그 우상화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지도자. 이게 우월한 인간이 아니라면 뭐겠나?”
그러자 꿀꺽, 남은 보드카를 통째로 비운 성검이 역으로 물었다.
“그런 거 치곤 스탈린 자식들은 다 평범하지 않았나? 특히 손자인 예브게니도 할아버지 빽으로 자리 유지하던 등신이었고.”
독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스탈린의 혈통은 대단할 게 없었지. 그의 부모도, 자식들도. 아마 유전학에서 말하는 돌연변이였던 거겠지.”
“…뭔 시발, 우생학은 유사 과학이 맞다니까. 그냥 그럴싸하면 다 가져다 붙여요. 아주.”
성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계속 질문했다.
“그래서? 뭐, 스탈린 클론이라도 찍어내려고 했나?”
“물론,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다.”
“….”
그러려고 했다? 성검은 불현듯, 여태껏 만난 어린아이의 시체가 전부 남자아이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설마?
독화는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 지껄였다.
“아쉽지만, 그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기술 부족도 있었지만, 스탈린의 유일성을 해친다고 생각한 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어.”
혓바닥 위에 남은 술맛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파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지, 수통 하나를 더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보드카였다.
성검은 다시 입을 적신 뒤 물었다.
“유일성…? 무슨 성녀도 아니고, 빨갱이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일 텐데.”
“그리고 인민들에게는 때때로 아편이 필요하지. 스탈린이 바로 그런 존재였고.”
거기까지 말한 독화는 복도 너머의 그림자를 빤히 바라봤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끈적한 그림자.
그것은 그의 과거처럼 영원히 그에게 붙어있을 어둠이었다.
“그래서 당의 수장들은… 스탈린이 세운 금기를 어겼다.”
독화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인체실험을 넘어 창조를 시도했다. 새로운 혈통의 창조… 그깟 초인이 아닌, 진짜 우월한 존재를 만들기로 한 거다.”
성검은 말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떠드는 독화뿐이었다.
“초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영약을 먹이고, 아샤인과 지구인을 교잡하던 시대였다. 데이터는 많았고, 실험용 쥐들은 더더욱 많았다.”
독화는 성검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시베리아에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던 시절, 소련의 훈장을 자랑스레 걸고 다니던 시절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과 대중에게 이 계획을 어떻게 숨기는가 뿐이었다. 당의 위원들은 시베리아에 비밀 연구소를 만들어 돈과 인재를 빼돌렸지. 그리고….”
“…스탈린이 그걸 찾았군. 그 직후에 시베리아 사태가 터진 건가?”
“….”
독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프레아 칸은 독화가 그곳에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때, 시베리아에서… 실종된 스탈린을 수색한 거냐?”
독화는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스탈린의 실종 직후 시베리아는 조용했었다. 그때는 괴수도, 만주와 모스크바로 도망치던 난민도 없었지.”
있는 건 태풍이 몰려오기 전의 그것처럼 섬뜩하고 차가운 침묵뿐.
그곳에서 독화는 동료들과 함께 스탈린을 수색했다.
당시의 그는, 독화가 아닌 제3번 주가시빌리라 불리던 그는 별 걱정 하지 않았다.
연구소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언정, 스탈린은 무사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멋대로 실험을 벌인 부하들을 징계할 계획을 짜며 휴가를 보내고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스탈린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그와 동료들은 제1연구소의 잔해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찾은 시베리아 제2연구소에서 발견한 건… 스탈린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뭔가를 잃었다. 그게 신념이었는지, 아니면 애국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화는 어둠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선배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파시스트들과 싸운 이유가 뭐였지? 인민의 존엄을 위해서였다. 공산주의는… 인민을 위해, 인간을 실험동물로 보는 것들과 싸워 승리했다.”
하지만 시베리아 제2연구소에 인민은 없었다. 레닌도, 마르크스도 없었다.
“…우리가 찾은 건 아이들이었다. 철혈의 군주 스탈린을 이을 철혈의 아이들.”
“….”
“그것들은 단순히 혈통의 교잡으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아니었다. 우주인 남편과 아내를 결혼시키거나, 아샤의 귀족과 인민 영웅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과는 달랐어. 그 아이들은 모두… 금지된 인체실험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가 그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당의 윗분들은 그 ‘자료들’을 파기하고자 했다.
스탈린이 실종된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이상이 더럽혀지느니, 연구소를 통째로 없애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베리야, 그 역겹고 애미 없는 KGB 수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스탈린이 사라진 시점에서 더욱 그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철혈의 아이들이야말로 공산주의의 미래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그 애미 없는 소리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스탈린 실종의 배후가 베리야란 심증이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그래, 베리야는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아군도 많았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잃은 이상 분열은 필연이었고, 분열의 불씨가 피어오른 건 불운이었다.
그리고 그 필연과 불운 속에서, 당은 찢어졌다.
베리야,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중국의 등소평…
그나마 차원문 너머 공산주의자들이 조용히 입을 다문 게 다행이었다.
데메론드가 이 권력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렀을지 몰…
“…아, 재미없는 권력 이야기는 됐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그때, 파순이 그의 말을 끊었다. 독화가 고개를 돌리자, 성검의 빛은 주변의 어둠을 몰아낼 정도로 커져 있었다.
프레아 칸이 사납게 물었다.
“그래, 아이들은 어떻게 했지?”
“대부분은 베리야에게 끌려갔다. 그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아마 베리야의 실종과 관계된 일이 아닐까 하는 예상뿐.”
“…네가 넘긴 거냐?”
성검의 목소리가 살벌했으나, 독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 난 일개 군인이었다. 그럴만한 권한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내가 받은 명령은 아이들 중 일부를 우랄산맥 너머로 구출하라는 것이었고, 나는 명령대로 움직였다.”
“…빼돌린 아이들은?”
“갑자기 개입한 미군에게 빼앗겼다. 뒤쫓았지만, 우리가 찾은 건 핏자국이 전부였지.”
“….”
살아남았다면 이미 성인이 됐을 아이들. 프레아 칸은 가장 먼저 푸른 쥐를 떠올렸다.
푸른 쥐가 세상에 나타난 시기와 철혈의 아이들이 끌려갔다는 시기가 비슷하긴 했지만, 모리네를 제외하면 푸른 쥐 떨거지들은 인체실험의 결과라기엔 다 고만고만했다.
그렇다면 철혈의 아이들은 다 죽은 걸까? 아니,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외부에 철혈의 아이들의 정보가 흘러갔다.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감금된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확실하다고? 뭐가?”
독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파순이 홀짝이던 보드카를 던져주고 나서야, 그는 술기운을 빌려 입을 열었다.
“현재 비정상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은 전부 철혈의 아이들 프로젝트를 모방한 결과물이라는 것.”
“….”
“지금은 사라진 나의 조국, 마탑, 미국… 어쩌면 한국이나 호주까지. 적어도 그 데이터를 받은 자들은 자신들만의 잡종을 만들었을 거다.”
다음 순간, 성검은 하나뿐인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그거참, 존나 밥맛 떨어지는 소리네.”
“….”
“후, 씨발… 떠오르는 이름이 너무 많네. 됐어. 다 집어치우고, 그래서 여기로 온 이유가 뭔데? 이 연구소에 철혈의 아이들 데이터가 남아있기라도 한 거냐? 만약 그 데이터를 구해서 팔아먹을 생각이라면…”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러면?”
독화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철문으로 향했다.
여태껏 넘어온 철문들과 달리 잠금장치가 몇 개나 걸린 문.
독화가 이번에도 주가시빌리로 잠금을 열었지만, 문 너머에서 뭔가 걸린 듯 잘 열리지 않았다.
성검이 다가가 빛을 비춰보니, 문 앞에 시체가 가득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문 너머에서 죽은 듯한 시체들.
독화는 힘으로 시체들을 밀어내며 말했다.
“제3연구소는 제2연구소의 백업 연구와 동시에… 영혼을 연구했다.”
“영혼…?”
성검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독화는 그 예감을 현실로 만들었다.
“스탈린을 윤회시키기 위한 시도였지.”
다음 순간, 파순이 품에서 전등을 꺼냈다. 아니, 이 씹새끼가?
프레아 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건 말건, 파순은 손전등으로 방 한가운데를 비췄다.
딸깍- 전등 불빛 끝자락에는 시체가 있었다. 밖으로 도망치던 모든 시체와 달리 앉아 있는 걸로도 모자라, 방금 죽은 것처럼 피부가 멀쩡한 시체.
이 연구소의 시체들은 저걸 피해 도망쳤던 걸까? 아니, 분명 그런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하나, 파순이 왜 여기에 왔느냐뿐.
프레아 칸은 파순의 목에 성검을 겨누며 물었다.
“저게 뭔지 말해.”
“어, 아마도… 스탈린?”
“….”
성검이 파순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신성한 칼날을 따라 마인의 피가 흐르는 가운데, 파순이 미소 지었다.
“무슨 상상하는지 아는데,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궁금증 때문에 온 거야.”
“궁금증?”
“그래, 궁금하지 않아? 저기에 들어있는 영혼이 스탈린이라면 그는 제1연구소에서 죽은 거겠지. 하지만 저기에 들어있는 게 스탈린이 아니라면…?”
“….”
“스탈린은 살아있는 거야.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파순이 킥킥거리고, 프레아 칸이 충격에 말을 아끼는 그때. 독화가 전신에서 주가시빌리를 일으키며 시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까드득-!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주가시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 살벌한 마나에 성검이 재빨리 전투 태세를 갖추는 가운데, 파순이 어깨를 풀며 말했다.
“자, 이제 숨겨진 진실을 까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