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06)
을 위한 세계는 없다-406화(406/817)
***
아카데미에 도착한 여명을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성녀도, 세티도 아니었다.
전전대 마탑주 귀신, 마하간.
[잠깐 단둘이서 얘기 좀 할까. 용사.]무시하고 세티에게 가기엔 그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여명은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마하간과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할 말이 있으셨다면 시드니에서 하셔도 됐는데.”
아카데미 야외로 나선 여명이 가볍게 말하자, 마하간이 고개를 저었다.
[난 지박령에 가까워서, 로드 하우 아일랜드에서 멀어질수록 흐려진다. 시드니 정도만 가도 입을 열기가 어렵더구나.]“…그거, 성녀한테 말하지 마세요.”
[갑자기 그게 뭔… 아, 알겠다. 그러마.]“….”
그런 대화가 이어진 후, 여명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정원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마하간은 귀신답지 않게 태양을 등지고 여명의 옆에 앉았다.
그는 바로 말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혹, 지금 자네 몸에 무슨 문제가 있나?]“…네?”
여명은 징징 울리는 휴대폰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이상해서 그렇지. 피를 흘리는 자와 싸울 때… 녀석의 천벌이 자네만 비껴가지 않았나.]범위에 들어온 모든 물체에서 종양 비스무리한 살덩어리를 만드는 천벌.
빌딩을 통째로 살덩어리로 바꾸는 천벌을 맞고도 여명은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저는 그냥 주가시빌리 덕분에 이겨낸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살아생전에 아야톨라와 여러 번 싸워봤다네. 덕분에 자네 비슷하게 천벌을 무시한 사례를 몇 개 알고 있지. 뭔지 아는가?]마하간은 손가락으로 여명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망가진 몸에는 녀석의 천벌이 통하지 않네. 신의 저주를 받았다던가, 몸을 제물로 바친 적이 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시한부라던가.]“….”
날카로운 지적이 폐부를 찔렀다. 여명은 애써 쓴웃음을 삼켰다.
“시한부까지는 아니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건 맞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무슨 문제더냐? 암? 저주? 뭐든 간에 내가 도와주마.]오랜만에 도와줄 일이 생겨서 기쁜 건지, 마하간은 귀신답지 않게 눈을 빛냈다.
하지만 여명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하늘만 바라봤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음, 이건 무조건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암, 알다마다. 나 같은 귀신이 누구한테 떠벌리겠나? 걱정하지 말고 말해보게. 대마법사다운 조언으로 자네의 문제를 해결해줄 테니.]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여명도 조금 마음이 동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마하간의 조언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직후, 여명은 짧은 한숨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은 마하간의 표정을 일그러트리기에 충분했다.
꿈속에서 만난 새 머리의 거인을 시작으로, 파양결, 주가시빌리, 세계수, 용의 심장, 그리고 욕망으로 물든 진의… 뭉치지 못한 다섯 개의 힘과 그것을 하나로 묶어줄 신명에 관한 이야기까지.
여명의 말이 거짓이 아닌 점, 그리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하간이 역으로 당황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길다면 긴 이야기를 모두 끝낸 여명은 기대감을 가지고 마하간을 바라봤다.
그의 말마따나, 마탑주까지 했던 용사 파티의 대마법사 아닌가. 어쩌면 일행이 상상도 못 했던 방법을 알려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하간이 내놓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자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건가?]***
로드 하우 아카데미 1학년 여자 기숙사, 세티와 쇠미리의 방.
“우리는 운 좋게 결계 내부로 이동할 수 있었어요. 아마 차원문 마석이 타락석과 비슷한 덕분이겠….”
짐을 푼 쇠미리가 시드니에서 겪은 일은 설명하는 사이, 세티는 작은 상자를 열고 있었다.
[스위스 국립은행] 이란 단어가 박혀 있는 상자는 거의 봉인에 가까운 포장에 쌓여있었는데, 스위스 금고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마지막으로 열쇠를 꽂아야만 열리는 구조였다.조심스레 번호를 입력하고, 상자를 더듬길 잠시.
달깍, 상자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은 세티는 천천히 열쇠를 돌렸다.
“그리고 근데 하필 그곳에서 진실을 흘리는 자가 튀어나온 거죠. 놀라서 오귀스트를 호출 했….”
쇠미리의 목소리와 복잡한 장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화음을 이뤘다. 딸각, 딸각.
강제로 열릴 때를 대비해 준비된 마법진이 상자 안에서 해제되고, 뚜껑이 천천히 열리며 내용물을 드러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빛을 내뿜는 눈물 모양의 진주.
그 때깔도 때깔이지만, 크기부터가 평범한 진주와는 달랐다. 언뜻 보기에도 탁구공보다 더 큰 크기.
만약 이 진주로 장신구를 만들면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떠올린 세티는 조심스레 진주를 꺼내 꼼꼼히 내용물을 살폈다. 그러다 문뜩, 진주 뒤편에서 작은 실선을 찾아냈다.
‘깨졌… 네? 정신 나간 스위스 놈들, 물건을 대체 어떻게 관리한 거야?’
일이 꼬인 걸 직감한 세티가 인상을 확 찌푸린 순간.
쇠미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녀의 정신을 확 잡아끌었다.
“근데, 세티 정말로 깨무는 거 좋아해요?”
“…뭐?”
“여명이 숨겨둔 가장 은밀한 비밀 중 하나가 그거더라고요. 세티 치열이 엄청 이쁘다고….”
“….”
세티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거리는 미리를 향해 말했다.
“…너까지 이럴래?”
“왜요, 성녀만으로도 힘들어요?”
“어, 그러니까 제발, 너까지 그러지 말아줘.”
“큰부인께서 그걸 원하신다면야.”
쇠미리는 연기하듯 과장된 자세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엘프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세티, 긴장 좀 풀어요.”
그러자 세티는 진주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안 돼. 최근에 일이 잘 풀려서 긴장 풀었더니 바로 문제가 생겼잖아. 사람 하나 구하러 갔다가 아야톨라가 둘이나 튀어나왔어. 이게 정상이야?”
“정상… 은 아니죠.”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야. 여명의 몸도 걱정이고, 올림피아는 코앞이고, 가짜 변경백은 어떻게 쓰러트려야 할지 아직 감도 안 잡히고, 미국이랑 한국은 또 사람을 보낼 거고, 우리 자매 신명도 남아있고 또….”
주저리주저리 고민거리를 늘어놓던 세티는 상자 속 진주를 노려봤다.
“…여명이 퀴니 코완에게 받은 우라간의 폼멜. 깨져서 왔어.”
“….”
“은행 쪽에서 별말 없는 거 보니 몰랐던 거 같아. 그러면 아마 저번에 스위스 은행이 습격 당하는 과정에서 깨진 것 같은데… 하아,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제야 진주를 발견한 쇠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럽지만, 여명 일행에서 세티가 부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은 까닭이었다.
“세티, 혼자서 고민하지 마. 여명도 있고, 나도 있고, 성녀… 도 있긴 하잖아? 같이 머리를 맞대면 다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조언이 도움이 된 걸까. 세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혼자 고민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겠지… 오늘 모이면 차례대로 논의해야겠다. 미리, 자료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래?”
“물론.”
쇠미리는 웃으며 세티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깨는 돌처럼 무거웠다.
“근데, 여명은 무슨 맛이었어?”
무거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지만, 세티의 반응은 싸늘했다.
짧은 침묵.
‘화났나?’
갑작스러운 침묵에 놀란 쇠미리가 시선을 피하길 잠시.
엘프의 오해와 달리 세티는 진지한 대답을 내놨다.
“맛 때문에 깨무는 건… 아니야. 내 흔적을 남기는 거랑, 여명이 보여주는 반응 때문에 깨무는… 뭐야, 왜 웃어?”
“아뇨, 그냥…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대답이라서.”
“….”
무어라 반박하려던 세티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뒤늦게 쇠미리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직후, 쇠미리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성녀한테는 무조건 비밀로 할게.”
***
수업이 모두 끝난 방과 후.
여명은 남들보다 먼저 용의 둥지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오르세 라날이 밥 이야기부터 꺼냈다. 비스듬히 누워서 지느러미를 벅벅 긁는 꼴이 아주 상전이 따로 없었다.
여명은 녀석의 엉덩이를 차준 뒤, 음식 대신 돗자리를 펴고 호주에서 챙겨온 간식거리들을 쫙 늘어놨다.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어쨌거나 그가 간식을 준비하는 사이, 코르부스를 시작으로 일행들이 한 명 한 명 둥지에 도착했다.
“여명! 괜찮아?! 몸은 어때?”
개중 성녀는 여명을 보자마자 몸을 살펴본다는 핑계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어찌나 강하게 끌어안았는지, 지켜보던 용이 ‘고작 그거 안 봤다고 유난 떤다’ 며 혀를 차고, 먼저 와있던 구더기 공주가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 시선을 돌릴 정도.
물론, 성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야톨라를 둘이나 만나지 않았나. 그녀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한참이나 여명의 몸을 더듬었다.
결국, 그녀가 멈춘 건 일행이 모두 모인 뒤였다.
여명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예외가 있다면 숙취에 시달리는 구더기 공주와 그릇 정도일까.
여명이 준비한 돗자리 위에 동그랗게 모인 일행은 간식거리를 집어 먹으며 눈치를 살폈다.
눈치가 있다면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눈치가 없어도 적당히 분위기를 풀기에 좋은 상황.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편안한 분위기는 되지 않았다. 여명의 옆에 붙어있는 귀신, 마하간의 표정이 너무나 살벌한 까닭이었다.
가벼운 분위기는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위한 가림막인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일행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다렸다.
하지만 여명은 말문을 떼지 못했다. 그가 한참이나 말을 아끼자, 결국 기다리던 세티가 손을 들었다.
“여명, 나 먼저 말해도 될까?”
“응, 물론이야.”
세티는 일행이 다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스위스 중앙은행에서 온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 진주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그릇이 눈에 띄게 크게 반응했다.
크흠,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은 세티가 말을 이었다.
“이 진주는 우라간의 무기… 그중에서 폼멜이야.”
“퀴니 코완이 스위스 은행에 남겼던 거? 오늘 온 거야?”
“응, 오늘 아카데미 봉쇄를 뚫고 온 걸 열어서 확인했어. 부정할 수 없는 진품이야. 문제가 있다면….”
그녀는 진주를 들어 뒤로 돌렸다. 대부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시력이 좋은 여명은 진주 사이에 미세한 실선을 볼 수 있었다.
“…깨졌네?”
“응,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보관 중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큰 진주야. 아무 마력도, 능력도 없어.”
능력이 없다고? 잠시 진주를 보던 여명은 우라간의 몸통을 꺼내며 말했다.
“미리, 유니콘의 뿔 있지? 잠깐만 꺼내 봐.”
‘그냥 큰 진주’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쇠미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냈다.
바이콘의 뿔로 만든 몸통과 유니콘 뿔로 만들어진 손잡이.
어째서인지, 바이콘과 유니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여명이 몸통에 손잡이를 연결하고, 손잡이 끝 부분에 진주를 꽂아 넣을 때까지, 계속.
[소용없다. 주인이여.] [운명이 뒤틀렸군! 수룡이 남긴 마나가 전부 사라졌어!]바이콘과 유니콘은 폼멜과 연결되자마자 동시에 소리쳤다. 여명은 둘을 내려놓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유니콘이 대답했다.
[우리처럼 영혼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원래 그 안에는 용의 마나가 남아있었노라.]그릇이 깨져서 마나가 다 흘러 나갔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도 수리하면?”
이번에는 바이콘이 대답했다.
[깨진 그릇을 수리하면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미 흘린 물은? 답이 없지.]“다른 용의 마나라면 당장 구할 수 있는데.”
여명이 카할 마그두의 심장을 떠올리며 말하자, 유니콘이 대답을 가로챘다.
[안 된다! 용의 기운이 너무 강해 우리와 조합이 깨지고 말 테니… 아! 안타깝도다! 이런 엄혹한 시대에 마나를 담아줄 정도로 선량한 수룡을 어디서 찾겠는가!]다음 순간, 일행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과자 상자를 통째로 우걱거리고 있는 용.
과자에 정신이 팔려있던 오르세 라날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왜, 또,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