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화(41/817)
〈 41화 〉 성녀는 희생양의 꿈을 꾸는가
* * *
…물론, 우리는 여전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당당하게 그들을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이라 불러도 된다.
유식해 보이기 위해 ‘고차원적 에너지 생명체’ 라고 부르는 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무신론자는 되지 마라.
그들은 이제 농담거리조차 못되니까.
『신은 위대하지 않다 中 발췌』
***
로드 하우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수련실.
벽은 물론이고 바닥에도 마나 메탈이 코팅된 새하얀 방의 한 가운데에서, 세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새벽인 탓인지, 수련실은 조용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세티는 이런 고요함을 좋아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을 마음껏 음미하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고 느릿한 자세로 워해머를 들어 올렸다.
아카데미에서 지급된 워해머는 그저 쇳덩이를 뭉쳐놓은 조악한 물건에 불과했지만, 세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드워프가 만들지 않는 이상 워해머란 물건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고 해야 하나? 그저 휘두르다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면 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데미 지급품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워해머를 휘둘렀다.
정확한 자세로 마나 없이 휘두르는 망치는 그녀의 전신 근육을 모두 쥐어짰다.
뒤꿈치부터 어깨의 승모근까지. 모든 근육이 일제히 무게와 반동을 견뎌냈다.
겨우 몇 번 휘두르는 것으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세티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더 빨리, 더 무겁게, 더 강하게.
마침내 근육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마나를 일으켰다.
화아아악!
느릿한 궤적을 그리던 워해머가 순식간에 가속했다. 망치 머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공기가 갈라지며 바람이 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망치는 매 순간, 더욱더 빠르게 가속했다. 폭풍처럼 과격하고, 우레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 세티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그렇게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순간, 수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것은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호박석처럼 반짝이는 노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세티는 망치를 멈췄다.
후욱 수련실을 가득 채우던 바람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세티는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동생을 바라봤다.
“시리? 무슨 일이니?”
갑자기 수련이 끊겨 불쾌할 만도 했건만, 세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동생을 맞이했다.
시리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쪼르르 세티에게 다가갔다.
“언니, 여기 뉴스 좀 봐!”
“왜, 뭔데?”
“천여명, 그 오빠가 뉴스에 나왔어!”
“뭐? 정말?”
세티는 워해머를 집어던지고 시리가 내민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화면 위에는 유명 언론들의 기사가 좌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의 북만주 사상자만 세 자리.』
『북만주 기지 함락. 원인은 정체불명의 테러조직?』
『만주에 또? 국회는 ‘추경’ 기재부는 ‘난색’』
『대규모 괴물들 남하… 불안에 떠는 만주인들』
한참을 내리던 기사 목록 사이로, 천여명의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기사 제목은…
『젊은 용병과 성녀, 기적적인 싸움.』
뭐? 성녀?이년이 왜 만주에 있어?
세티는 반사적으로 기사를 눌렀다.
그리고 몇 줄 되지 않는 기사를 읽자마자, 세티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언니?”
세티는 바로 다음 기사를 찾아 읽었다. 그녀가 기사를 읽어내릴 때마다, 스마트폰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언니, 그거, 내 폰인데…”
시리는 기대감과 불안함이 반반 섞인 눈빛으로 스마트폰과 세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세티에게 들리지 않았다.
세티는 레이저를 쏠 기세로 스마트폰을 노려보면서, 여명과 성녀가 나온 뉴스들을 읽고 또 읽었다.
뉴스의 내용은 전부 비슷비슷했다.
어째서인지 성녀가 직접 북만주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으며, 두 명의 용병이 그녀를 도와 용(?)과 맞서 싸웠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군사적 이유로 검열당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문제는 찌라시 언론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성녀와 젊은 용병이 어떤 ‘운명적인’ 이유로 만난 것처럼 기사를 싸질러놨다.
개중에는 종교계가 대경실색할 만큼이나 자극적인 망상을 적은 기사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기사가 포탈 메인에 걸려있었다.
‘젊은 용병과 나란히 서 있는 성녀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
기사를 읽자마자, 세티는 이 기사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성녀는 투명 망토를 쓰고 다니는 빌어먹을 관음증 환자였고, 기자들에게 얼굴을 노출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은밀한 방식으로 맞잡은 두 손’을 운운하는 문단을 읽는 순간, 세티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까드득.
그녀가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졌다.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을 본 시리가 빽 소리 질렀다.
“언니!”
“아, 그게…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티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시리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녀는 우왕좌왕하는 세티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뒤, 히죽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성녀한테 또 뺏길까 봐 그러는 거지?”
“…시리. 뺏기다니, 무슨 소리니?”
세티가 되묻건 말건, 시리는 입꼬리를 내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뭐긴 뭐야, 그 사람이지. 성녀가 중간에 낚아채 갈까 봐 그러는 거지? 으이구, 그게 그렇게 무서웠쪄요?”
“…야.”
“정색해봤자 찔린 표정 다 티 나거든? 그리고 언니, 제에발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그 사람이 성녀하고 붙어먹겠어?”
“붙어먹다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정곡을 찔린 듯, 세티가 쌍심지를 켰다. 시리는 겁먹긴커녕 그녀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만, 그만. 언니는 그게 문제야. 성녀 이야기만 나오면 확 돌아버린다니까.”
“…딱히?”
“아 그러셔?”
시리는 눈썹을 씰룩거리곤, 팔짱을 꼈다. 노란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럼 내기할래? 오늘 그 사람한테 연락 안 하고 버티기.”
“….”
“딱 하루만 버티면 언니 말이 맞는 걸로 하고, 스마트폰 부숴 먹은 것도 용서해줄게. 어때?”
시리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핸드폰 하나를 꺼냈다. 여명과 연락하기 위해 준비한, 세티의 대포폰.
“야! 너, 그거…!”
세티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리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이리저리 흔들어 그녀의 손을 피했다.
“어쩔거야?”
음흉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수련실에 오기 전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한 게 틀림없었다.
세티는 한 방 먹은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내기할 거야? 안 할 거야?”
시리가 물었으나, 세티는 대답 대신 휙 핸드폰을 낚아챘다.
“내기는 무슨!”
깔깔거리는 동생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세티는 두다다다 휴대폰을 두들겼다.
[안녕하세요 여명씨? 저 세티에요. 이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명이 눈을 뜬 곳은 사방이 새하얀 회복실이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딱딱한 환자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팔에 붙어있던 수액이 덜컹거렸다.
“요, 일어났네.”
방정맞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에 익숙한 손 두 개가 둥둥 떠 있었다.
투명 망토 뒤에 숨은 성녀.
그녀는 과도로 사과를 깎고 있었는데, 껍질을 벗긴다기보단 사과를 난도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명은 불쌍한 사과에게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여기는?”
“만주 기지 국군병원.”
“….”
“인터뷰 중에 뻗어버려서, 바로 여기로 데리고 왔지.”
성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여명은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카할 마그두가 자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지원부대와 마주쳤다.
지원부대는 성녀와 여명을 생존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북만주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집요하게 물었다.
헛걸음을 시킨 거라면, 성녀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거라는 협박도 곁들여서.
하지만 북만주가 무너진 것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돼지머리 괴인과 군인들의 시체를 확인한 지휘부는 성녀와 여명을 순순히 풀어줬다.
거기서 끝났어야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성녀가 경고한 기자들, 그들이 우르르 몰려온 뒤가 진짜 심문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여명이 알고 있던 존경할만한 종군기자와는 전혀 달랐다. 아마 그런 종군기자들은 지원부대를 따라 북상한 듯싶었다.
아무튼, 여명과 성녀를 둘러싼 기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핑계 삼아 두 사람에게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입학식에 가시지 않고 왜 북만주로 오신 겁니까? 혹시 어떤 예언을 받으신 겁니까?
젊은 용병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신들께서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두 분께서 함께 맞서 싸운 상대가 카할 마그두라는 게 사실입니까?
부적절한 질문들부터, 상식적인 질문들까지.
인터뷰를 빙자한 심문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그 인터뷰가 얼마나 징글징글했는지, 여명은 악명도 유명세니 기자 하나쯤 두들겨 패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로 기자들을 패버리지는 못했다. 여명은 피로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여명은 심만 남아버린 사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성녀께서 여기에 계신 이유는?”
“전우가 걱정돼서?”
“헛소리하지 말고.”
“진짠데.”
성녀는 키득거리면서 사과를 내려놨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과일 바구니에서 다음 희생물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꽤 비싸 보이는 배였다.
사각, 사각.
잠시 배 껍질을 난도질하던 성녀는, 대뜸 입을 열었다.
“너, 성검이랑 무슨 관계야?”
“…성검?”
“프레아 칸. 위대한 찬탈자. 성기사단의 수치.”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혜성검을 알아본 건가? 아니, 분명 알아봤으니 이런 질문을 한 것이리라.
그는 성검과 성녀의 관계를 떠올렸다. 둘 다 성스러운 신의 이름을 섬기는 관계로 보이지만, 실상은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원문 너머의 성국은 불신자, 그것도 지구인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걸 인정하지 못했다.
감히 신의 선택을 의심하냐는 반론은 소용없었다. 그들은 신이 아니라 성검이 프레아 칸을 선택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프레아 칸, 네가 정말로 자신 있다면 성국의 오대 신전으로 와서 시련을 받아라.
성국은 프레아 칸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물론, 호주 정부와 프레아 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성검은 그 자체로 핵무기에 맞먹는 결전 병기였으니까.
짧게 정리하자면, 성국의 인정을 받은 성녀와 성검 프레아 칸은 정치적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성녀가 프레아 칸을 입에 담은 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니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프레아 칸의 관계를 묻는 이유는?”
“…말꼬리 돌리는 거 보니 진짜로 뭔가 관계가 있긴 한가 보네.”
성녀는 푹 한숨을 쉬었다. 과도가 빗나가며 배가 뭉텅 썰려 나갔다. 먹을 거 가지고 아깝게 뭐 하는 짓인지.
불쌍한 배가 어떻게 되건, 성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프레아 칸의 제자?”
“아니.”
“그럼 애인?”
“….”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니고… 설마, 아들이야??”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성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본인이 묻고도 무안했는지, 그녀는 크흠 헛기침했다.
“어허, 표정 봐라. 농담도 못 하냐?”
“…한 번만 더 그딴 농담하면 이 방에서 쫓아낼 줄 알아라.”
“어이구 살벌하셔라. 그래서, 프레아 칸하고 정말로 무슨 관계야?”
성녀의 손이 가까워졌다. 투명 망토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얼굴을 들이미는 거겠지.
여명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냥 스쳐 지나간 인연 중 하나다.”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자마자, 성녀가 과도를 빙글, 돌렸다. 형편없는 칼솜씨에 비해 멋드러진 묘기였다.
“스쳐 지나간 인연… 뭐, 그럼 별문제 없겠네.”
휘리릭, 탁. 묘기를 끝낸 성녀는 과도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불쾌한 질문을 해서 미안. 프레아 칸하고 친한 사이랑 같이 일하면 노인네들이 개지랄할 거 같아서 그랬어.”
“…일? 개지랄?”
“그래, 일.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하하는 괴물들도 처리하고, 노인네들 모르게 만주에서 찾을 것도 있고.”
“….”
여명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성녀는 방정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카할 마그두랑 싸워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명색이 성녀인데, 보디가드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
성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명이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보디가드를 찾는 거라면 다른 용병들에게 의뢰해라. 만주 어느 용병단을 가도 나보다 실력 좋은 용병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조건도 안 들어보고 단박에 거절하냐.”
“당연히 거절하지. 우리가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성녀께서 갑자기 날 보디가드 삼으려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만.”
“…야, 너 말이 좀 그렇다?”
“용병이 싫다면 성기사라도 불러. 그쪽 보디가드라면 하려는 사람이 줄을 설 테니까. 어쨌든, 난 거절이다.”
여명의 거절이 예상외였던 걸까, 성녀는 양손을 부들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투명 망토 사이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야, 너 어느 용병단 소속이라고 했더라?”
“…뭐?”
“아, 찾았다. 선죽 용병단 3번 팀, 천여명.”
여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도질당한 사과와 배가 담긴 그릇이 덜컹거렸다.
“까짓거, 돈 주고 용병 사지 뭐.”
투명 망토 너머, 씨익 웃는 그녀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