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0)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0화(410/817)
***
몇 시간 뒤, 교직원 휴게실 앞.
오르세 라날 때문에 코르부스가 늦게 온다는 사실을 들은 여명은 지체 없이 데스나이트를 꺼냈다.
그와 함께하는 데스나이트 중 유일한 지구인, 듀크 중령.
인벤토리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얼룩진 군복과 군화부터 털었다. 거칠고 단단한, 죽은 후에도 군인다운 사내였다.
-아카데미에서 사람 죽여달라고 불렀을 리는 없고… 아, 샤프슈터를 배우려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듀크는 자신을 부른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예, 제 사격 실력이 좀… 처참해서요.”
-처참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못 쏘나 보지? 어디 그럼 사격 실력 좀 보자. 샤프슈터도 기본적으로 사격이 기본이니.
“….”
여명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미리 준비한 훈련용 소총을 꺼냈다. 실탄이 아닌 공기탄을 사용하는 총. 듀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탄으로 훈련하는 편이 나을 텐데?
“아카데미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 성녀는 몰래몰래 실탄을 가지고 다니지만, 그는 성녀가 아니었다.
미국인인 듀크는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일단 실력부터 보자는 듯 팔짱을 꼈다. 여명은 훈련용 총으로 과녁이 걸린 나무를 조준했다.
과녁까지 거리는 어림잡아 50m 내외, 여명은 설마 이걸 못 맞추겠냐는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당- 타당-
위력을 줄인 납탄이 여섯 발이 실탄과 비슷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과녁을 명중하기는 했다. 중앙에 명중한 게 하나도 없어서 그렇지.
그 처참한 결과를 본 듀크 중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장난이지?
“….”
묘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불어왔다. 듀크는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이거, 샤프슈터가 문제가 아니군. 사격을 따로 배운 적은 있나?
“없습니다.”
-이 미필 새끼. 주변에 총 잘 쏘는 여자가 몇인데 그거 하나 안 배웠어? 레독스의 총은 국 끓여 먹었어?
여러모로 기시감이 드는 문답이었다. 여명이 어색하게 볼을 긁자, 듀크 중령이 그의 소총을 낚아챘다.
-됐고, 일단 기본부터 시작하지. 어려운 거 아니니까 금세 익힐 수 있을 거다.
그런 말과 함께 듀크는 정말로 사격술의 기본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총기 상태 확인 법과 기본적인 조작법으로 시작해, 서서, 앉아서, 무릎 꿇고, 누워서 등등 여러 자세에 따른 조준 방법까지.
-초인의 경우 더 강한 반동을 버틸 수 있어 자세에 자유로운 편이다. 중요한 건 조준이다. 팔과 눈에 동시에 마나를 운용해라.
중간중간 초인의 힘과 감각을 이용한 사격 이론 또한 빼놓지 않았다.
-집중해! 오늘 배운 사격술이 언젠가 네 목숨이나 동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
역시 냉전이 정점 달하던 시절의 미군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여명이 자세를 틀릴 때마다 쪼인트를 깠다.
여명이 의외로 빠르게 배워서 다행이지, 만약 일반적인 사람과 비슷한 속도로 익혔다면 종아리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뭐, 아무튼.
듀크의 수업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의외로 여명이 사격 자세를 익히는데 재능을 보인 덕분이었다.
-그만, 그만.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어디 가서 미필 소리는 안 듣겠어.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가운데, 듀크는 땀에 흠뻑 젖은 여명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면 이제 바로 샤프슈터로 넘어갈까요?”
여명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잠깐 쉬지.
“예? 저는 괜찮습니다.”
-너 말고, 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이 짬에 교관 짓이라니, 아주 힘들어 뒤지겠네.
“….”
그렇게 농담을 던진 듀크 중령은 곧바로 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여명 또한 피식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세기의 명화를 보듯, 감상에 젖은 눈으로 나무 사이로 저무는 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뭇잎이 벌겋게 물들 때쯤. 여명이 대뜸 이런 질문을 꺼냈다.
“중령님. 혹시 알파 원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알파 원?
“예, 미국 빅 쓰리 중 한 명인데, 이번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요. 혹시 아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듀크는 고개를 저었다.
-하, 브라우닝도 누군지 몰랐는데, 그런 녀석을 알 리가 있나.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빅 쓰리란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유치하잖아.
유치하긴 하죠. 무지막지하게 강해서 그렇지.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듀크가 덧붙였다.
-우리 때 최강 초인은 그보다 훨씬 위엄이… 아, 혹시 그 알파 원이라는 놈. 흑발에 키 크고 뚱뚱한 백인 새끼냐?
“…흑발에 키가 큰 건 맞는데, 뚱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 때도 비슷한 놈이 하나 있었거든.
“비슷한?”
-알파 에이라고, 비슷하게 유치한 이름을 단 새끼가 있었어. 물론, 우리 부대원들은 그냥 딕이라고 불렀지만. 딕 존슨.
“….”
-여러모로 재밌는 꼴통 새끼였지. 군복 대신 정부에서 지급한 쫄쫄이를 입고 다녔는데… 그게 진짜 웃겼어. 진짜 존나 게이 같은 복장이었거든.
그게 웃겨요? 여명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현대인은 냉전 시대 미국 마초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
-뭐, 그놈이 살아있으면 딱 빅 쓰리로 불릴 나이이긴 한데… 혹시 알파 원이란 놈이 FBI 국장을 때려 죽였나?
“아뇨.”
-그럼 아니군. 진짜 딕이었다면 빅 쓰리가 되는 순간 FBI 국장을 찢어 죽였을 테니.
“…FBI 국장을요? 왜죠?”
-쫄쫄이 복을 입힌 게 FBI 국장이었거든. 엿 같은 게이 새끼, 그 검은 쫄쫄이는 분명 그 새끼 취향이었을 거야.
“….”
꼴통 같은 이야기만 역사의 비밀이 되는 걸까, 아니면 꼴통 같은 이야기라서 역사가 숨긴 걸까.
짧은 상념을 삼킨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곧이어, 그걸 본 듀크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담은 이만하면 충분하고… 이제, 샤프슈터를 익혀볼까? 아무리 너라도 이걸 익히려면 며칠은 걸릴 거다.
“그거야 배워보면 알겠죠.”
-하, 내기할까? 나는 최소한 삼 일은 걸린다에 걸지.
“그러면 저는 새벽이 오기 전에 배울 수 있다에 걸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명 또한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듀크 중령 또한 두고 보자는 듯 총을 꺼냈다.
***
아쉽게도, 여명과 듀크 중령 모두 승리하지 못했다.
사프슈터의 기본이 되는 공간 감지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려는 찰나, 의외의 인물이 여명을 찾아왔으므로.
“쇠똥… 아니, 천여명. 역시 여기 있었군.”
“리메?”
쇠미리의 호위이자,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외모의 엘프. 귀를 숨기고 아카데미 정원사로 위장한 그녀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여명에게 다가왔다.
“미리 동지가 누구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데, 너는….”
그녀가 여명에게 화를 내려는 찰나, 듀크가 철컥- 총을 장전하며 말을 끊었다.
-귀쟁아. 좋은 빨갱이의 조건이 뭔지 아느냐?
“….”
-그래, 좋은 빨갱이는 조용한 빨갱이다. 알았으면 이제부터 주둥이 조심하도록.
그렇게 분위기가 살벌해지려는 찰나, 여명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시드니에서 같이 싸운 사이에 왜들 그러십니까. 중령님도 참으시고, 리메는… 왜 찾아온 거야? 미리 때문에?”
“…미리 동지를 애칭으로 부르지 마라!”
“응? 하지만 미리는 애칭으로 부르길 바랄 텐데?”
여명이 능글맞게 대답하자, 리메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녀는 여명에게 삿대질하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꼴을 본 듀크가 킥킥거리길 잠시,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난 미리 동지의 일이 아니라 교장 때문에 왔다. 만나기로 해놓고 왜 안 오냐고 묻더군.”
“아, 맞다.”
한국 사절단 행사 전에 뭔가 부탁이 있다고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여명이 코를 긁적이는 사이, 리메가 말했다.
“교장께서 기다리고 있다. 훈련은… 나중으로 미뤄줄 수 없겠나?”
리메가 듀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여명 또한 그래도 되냐는 뜻을 담아 듀크를 바라보자, 그는 팔짱을 꼈다.
-뭐,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있는 사람과의 약속이 더 중요한 법이지. 내기는 내일로 미루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명은 듀크에게 꾸벅 인사한 뒤 인벤토리로 그를 회수했다.
리메는 잠시 데스나이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따라와라.”
그녀는 자연스레 앞서 나갔다. 그녀는 꽤 빠르게 숲길을 가로질렀다. 대화하기 싫은 눈치였기에, 여명은 굳이 입을 열지 않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교장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할 때쯤.
리메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천여명. 최소한… 공주님을 울리는 일은 없도록 해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던 여명은 그녀를 바라봤다.
“동지가 아니라, 공주님이야?”
“….”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리메는 여명을 노려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떠났다. 거, 여러모로 부끄러움 많은 엘프라니까.
아무튼, 여명이 교장실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교장의 비서가 그를 맞이했다.
비서를 따라 야근 중인 선생님들이 가득한 교무실을 지나고, 익숙한 문 몇 개를 지나자 교장이 그를 반겨줬다.
“오, 왔구나.”
책상 위에 어마어마하게 쌓인 서류와 종이컵 너머, 교장이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예,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많이 바쁘신 거 같네요.”
여명이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교장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가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고여 있었다.
“엿 같은 올림피아 덕분이지.”
“….”
“올해 일정이 밀리는 바람에 일이 곱절로 늘었어… 게다가 디지털 시대에 서류를 고집하는 등신들 덕분에 작업을 두 배로 해야 하지. 악순환의 반복이랄까.”
“…고생하시네요.”
교장은 여명의 말에 위안을 얻은 것처럼 푹 한숨을 쉬더니, 그제야 서류 더미에서 손을 놓고 책상에 몸을 기댔다.
“천여명 학생, 왜 불렀는지 알지?”
“뭐,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다고….”
“그래, 부탁… 부탁이 있지.”
교장은 바로 부탁을 꺼내지 않았다. 뭔가를 고민하듯 잠시 책상을 두들기다가, 곧 차게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동시에, 비밀스러운 부탁이란다. 가능하다면 성녀님이나 네 여친에게도 비밀로 해주겠니?”
“….”
이건 또 갑자기 뭔소리람. 여명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다.
“어… 그런 거라면 저 말고 다른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시는 게…?”
“이미 믿을 만한 사람은 다 동원했어. 결과가 안 나왔을 뿐이지. 모리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차선이라는 소리였다. 여명은 애써 쓴웃음을 삼켰다.
“어쨌든, 비밀을 지켜주겠니?”
“물론입니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들일지 말지는 정확히 무슨 일인지 듣고 정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흠, 한 번 더 말하지만, 비밀 유지 부탁해.”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지?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이 책상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권총, 그것도 마나가 느껴지는 묵직한 권총이었다.
여명도 익히 아는 총이었다. 어떻게 잊겠나? 이 총에 고환을 맞아 죽을 뻔했는데.
“이건…?”
여명이 묻자, 교장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초대 학장님의 총이야. 세상에 몇 개 없는 진짜 마총이지.”
“….”
역시나였다. 계단의 시련에서 나타난 가짜 퀴니 코완이 쓴 총이 아니라, 진품 마총.
여명은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지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그녀가 이걸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아무튼, 여명이 총을 보며 침을 삼키는 사이 교장이 총을 내밀며 말했다.
“총에 여기, 이거 보이니?”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교장이 가리킨 위치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그가 읽을 수 없는 글씨로 뭔가가 적혀있었다.
“이건…?”
“쇠똥구리.”
“예?”
“이 총을 계승한 사람의 이름이지.”
“…?”
여명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표정을 오해한 교장이 덧붙였다.
“초대 학장님께서 남겨두신 안배란다. 총의 적법한 주인이 나타났을 때, 총에 이름이 떠오르지.”
“….”
여명은 그제야 교장이 무슨 부탁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어… 그러니까, 쇠똥구리란 사람을 찾아 달란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거란다. 그리고 이 쇠똥구리란 사람은 아마… 아카데미에 있을 거야.”
“….”
“이상하지? 무슨 코드 네임 같은데… 이건 그런 마법이 아니거든. 진짜 이름이 쇠똥구리인거야. 세상에나.”
여명… 아니, 쇠똥구리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교장의 한숨이 길어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쇠똥구리란 사람을 찾으란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찾으면 어쩌실 겁니까?”
“누군지 본 뒤에 정해야지. 총을 넘겨줄지, 아니면 죽일지.”
“…죽인다고요?”
그가 놀라 눈을 깜빡이자, 교장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교육자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개자식일 가능성도 있잖니.”
“초대 학장님의 안배라면서요? 개자식이 뽑힐 리 없….”
“나도 그 초대 학장님의 안배 중 하나란다. 사기꾼이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이지… 하, 뚫린 입이라고 너무 많은 걸 말했구나. 미안해.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렴.”
“….”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이 마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태껏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제정신은 아닐 거야. 여명 학생,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이거 알면서 떠보는 건가? 여명은 ‘제가 쇠똥구리입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교장을 바라봤다.
다음 순간, 교장은 마총에 적힌 이름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쇠똥구리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