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2)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2화(412/817)
***
“예, 장관님. 저 천여명입니다.”
조웅찬 장관과 연락이 닿는 순간, 여명은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
전윤성의 팔을 자른 것 때문에 ‘알파 원’ 자신을 노린다는 사소한 문제부터, 때마침 그가 호주에 있어서 시드니에 갈 수 없다는 중요한 문제까지.
물론, 그가 부탁한 ‘물건’을 이미 챙겨놨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날 실망시키는군.
그리고 여명의 예상대로, 대단하신 장관님께서는 곧바로 불쾌감을 표했다.
-자네가 몸을 사리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정도를 안다고 해주시죠. 상대는 알파 원입니다.”
-그래, 알파 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네를 노린다? 그건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알려준 정보입니다.”
-조지 칸… 아카데미 교사 겸, 전직 미군이라고 했지? 천여명, 자네는 미국인을 믿나?
“사람보다는, 아카데미 교사라는 직위를 믿습니다.”
-직위를 믿는다라….
별 영양가도 없는 신경전을 이어가길 잠시. 휴대폰 너머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장관의 비서쯤 되는 놈이 뭔가를 알려주는 소리이리라.
예를 들어, 그의 경쟁 장관이 아직까지 ‘물건’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정보 같은 것.
그리고 이번에도 여명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조웅찬 장관은 몇 마디 더 불쾌한 말을 던지다가, 천천히 태도를 바꿨다.
-그래,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홍의원, 그 멍청이의 얼굴을 봐서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네.
“….”
-시드니에 아직 물건이 남아있네. 챙겨오게.
권력자의 화법이란 연극무대의 커튼과도 같아서, 한 번 벗겨지면 좀처럼 위엄이 서지 않는 법이었다.
여명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알파 원이….”
-내가 단순히 자네 아랫도리 즐거우라고 희생양들의 소유권을 넘긴 것 같나?
“….”
-희생양을 보내게. 알파 원이 그것들까지 노리진 않을 테니.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장관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 버렸으니까.
뚜- 뚜- 끊어진 통화연결음이 귀를 찔렀음에도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쁘지 않네.’
조금 전 통화로 알 수 있게 된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조웅찬 장관은 생각보다 아카데미 사정에 어둡다는 것. 지난 번 음식점에서 만났던 스파이들을 제외하면, 아카데미에는 그의 눈과 귀가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게 아니라면 조지 칸 선생과 여명 사이에 인연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그리고 둘째, 그가 불과 몇 분 만에 라이벌 장관의 작전 성공 여부를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한국 내부의 영향력이 뛰어나다는 것.
확실하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아마 FBI와 CIA의 관계처럼 조웅찬 장관이 국내를, 김관형 장관이 국외를 담당하는 게 아닐까?
여기에 국방부 장관을 더해서 장관 셋이 서로 경쟁하며 균형을 맞추고, 그 위에서 ‘각하’가 국가를 쥐락펴락하는 구조…
그렇게 머릿속으로 한국 정부의 조직도를 그리던 여명은 문뜩, 복수의 때가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반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
몇 시간 후, 아카데미 하수도 깊숙한 곳에 숨겨진 시련의 계단.
마나가 서늘하게 공간을 적시는 가운데, 세 명의 용사가 네 명의 데스나이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사실, 맞서고 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손도끼가 날아다닐 때마다 성녀가 악을 쓰고, 창과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세티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쇠미리는 어찌나 많은 마나를 썼는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성기사의 발차기를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윽고, 세 명 모두가 탈진 직전에 몰린 순간.
“[그만.]”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릇의 목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그러자 두메아 가주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멈췄다.
직후, 그의 검을 막아내고 있던 세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며칠간 강행군을 한 탓일까, 망치를 내려놓은 채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숨소리는 비루먹은 강아지의 그것처럼 가늘었다.
-이거야 원, 딸 같은 아이들을 두들겨 패려니 미안하구만.
두메아 가주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평소라면 성녀가 한마디 했겠으나, 다른 데스나이트에게 두들겨 맞은 성녀는 계단 난간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그나마 멀쩡한 그릇이 한마디 했다.
“[미안한 것 치고는 너무 잘 패지 않았나?]”
-뭐, 그거야 친딸은 아니잖습니까.
자신의 증손녀에게 존댓말을 하는 가주. 그릇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 증손녀는?]”
두메아 가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증손녀는 제가 안 팼잖습니까. 선배가 팼지.
“[….]”
가주의 선배, 그러니까 그릇에게 빙의한 마하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쉽게도, 그와 황당함을 함께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데스나이트들은 쓰러진 소녀들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니까.
성기사단의 전 부단장, 바라나 카시는 성녀님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하간. 나는 이 수련에 반대하네.
“[그 소리 한 번 더하면 벌써 스무 번째인 거 아는가?]”
그릇에게 빙의한 덕분에 다른 데스나이트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된 마하간이 이죽거렸다.
“[이 일은 그녀들 모두가 동의한 일일세.]”
-그래, 그래서 내가 백 살이나 어린 소녀의 몸에 빙의한 자네를 죽이지 않고 있는 거라네.
바라나 또한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각각 귀신과 데스나이트가 되어버린 늙은이들이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성녀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라나, 저는… 흐으, 괜… 찮아요.”
-성녀님.
“정, 말로, 괜찮, 아요.”
-천여명이 알면 반대했을 겁니다.
여명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성녀의 호흡이 길어졌다. 그녀는 계단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비밀로 한 거예요.”
-그게 문제란 겁니다. 성녀님, 제가 아는 여명이라면,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몇 배로 더 괴로워할 겁니다.
“….”
평소와 달리 바라나의 혓바닥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성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잠시 후,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는 세티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잘못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성녀님, 그건…
바라나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려는 찰나, 성녀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LA에서, 여명은 혼자서 데스나이트 일곱과 싸웠어요. 그런데 저희는… 일대일도 힘들잖아요? 즉, 강해지는 데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란 거죠.”
-그때와 달리 저희도 전성기에 가까운 힘을 되찾아서 그런 겁니다. 전부 성녀님께서 저희의 저주를 걷어낸 덕분이죠. 지금 저희 전원과 싸우면 아무리 여명이라도…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성녀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계단 위에서 빙의 된 그릇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녀는 바라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바라나, 저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여명은 성녀님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어… 그건 그렇죠….”
-….
“근데, 그건 여명에게 의지하는 거잖아요. 저는 의지가 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의지하는 여자가 되는 건 싫어요.”
멋진 이야기였다. 푼수 같은 성녀가 하는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멋진 이야기.
바라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성녀의 의지를 존중하는 뜻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로 그릇에 빙의한 마하간이 다가왔다.
“[거, 말 한번 이쁘게 하는군. 실력만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엿 먹어요, 마하간.”
[….]“손녀뻘보다도 어린 여자한테 빙의한 시점에서 대마법사의 위엄은 다 잃은 거, 아시죠?”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소통과 실력 향상을 동시에 잡기 위한….]“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마하간은 성녀와 말싸움을 하는 대신, 쇠미리와 세티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두 소녀가 성녀가 앉은 계단의 위아래로 자리 잡은 직후, 그는 그릇의 몸을 세 사람 사이에 앉혔다.
네 소녀가 계단을 두고 사각형으로 앉은 모습.
마하간은 계단의 마나를 움직이며 물었다.
“[이걸로 네 번째. 오늘은 퀴니의 경험을 불러낼 것이다. 그리고 시작하기 전에 늘 물어본다만… 포기할 사람 있나?]”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마하간이 빙의한 그릇조차도 다가올 시련을 준비했다.
이럴 줄 알았지. 마하간은 그릇의 몸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계단의 마나를 움직여 가짜 퀴니를 만들었다. 하나도 아니고 네 명이나.
하나하나가 생전 용사 파티원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환상이었다.
“[그러면… 시작하마.]”
그 말과 동시에, 네 명의 퀴니 코완이 각각 소녀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환상은 그대로 소녀들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체력이 바닥난 소녀의 몸은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성녀는 물론이고 세티와 쇠미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귀신에게 빙의되는 것 같은 모습.
사실, 저건 귀신에게 빙의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힘을 잃은 육체에 타인의 경험을 강제로 주입하는 광경이었으니까.
뒤에서 그 꼴을 보던 벨라디바가 기가 찬다는 듯 한마디 했다.
-아이고, 독하다, 독해. 요즘 것들은 진짜… 두메아 영감. 괜찮소?
-내가 뭐?
-그쪽 집안 증손녀 말이요. 저거 자칫하면 신경이 타버리거나, 고통에 정신이 나가버릴 수도 있는 짓 아뇨.
두메아 가주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증손녀를 바라봤다. 마하간에게 빙의된 채 퀴니 코완의 경험을 흡수하는 꼴이 고문당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진 건지, 그녀의 코와 눈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
두메아 가주는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성공하면 용사 파티의 경험을 얻게 되겠지. 천금을 줘도 얻을 수 없는 기회야.
-그러다 실패하면? 집안 대가 끊기면 어쩔 거요?
-나는 마하간 선배를 믿네. 실패해도 죽지는 않을 거야.
-염병, 병신 되는 건 괜찮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도박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 아닌가. 단기간에 강해지는데 그만한 위험은 당연하지 않나.
의외로 두메아 가주는 가족에게도 칼 같은 부분이 있었다. 정신 나간 귀족 양반이라 그런가? 벨라디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바라나 카시를 향해 물었다.
-바라나 영감도 같은 생각이신가?
-아니, 난 마하간을 믿지 않네. 여명에게 달라붙은 뒤에도 한동안 우리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마법사를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뭐, 성기사가 믿는 건 신뿐이다, 이런 말이오? 그러면 다섯 신께서 저 소녀들을 보우할 거라 믿으시나?
바라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당연히 보우하고 계시겠지. 성녀님께서 함께하고 있지 않나.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딱딱하신데?
-신들께서 모든 걸 해결해주신다면 성기사가 왜 있고, 사제가 왜 있겠는가? 나는 감히 그분들의 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그저 성공과 실패를 똑같이 걱정할 뿐이네.
-…성공을 걱정한다?
-알다시피, 강한 힘은 행복과 크게 상관없는 물건일세. 그런데 성녀님이 저렇게 강한 힘을 얻는다는 건… 자연스레 미래에 큰일이 날 거라는 뜻 아니겠나.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벨라디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용사 파티라… 살아생전에 이런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 이미 뒤졌으니까 살아생전은 아닌가?
-실패한 용사 파티가 가르치는 이 시대의 용사 파티… 역시 성불 안 하길 잘했어.
묘한 감상에 빠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기 무섭게, 집중하고 있던 마하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모자란 년아! 누가 실패한 용사 파티라는 거야?!]”
-거, 귀동냥하지 말고 일에 집중이나 하쇼.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벨라디바는 피식 웃은 후 속으로 기도했다.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꼬맹이들이긴 하지만, 부디 지금 그들이 겪는 고통이 미래에 흘릴 피를 줄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