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3화(413/817)
***
“일은 잘되고 있어?”
“장관이 지랄하고, 미국 초인은 날 노리고 있고… 애인이 수련하는 모습을 감추는 것만 빼면 뭐, 그럭저럭?”
“…아, 그러셔?”
이튿날 새벽.
햇빛조차 눈을 비비는 시간에 여명과 세티는 텅 빈 벤치에서 만났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앞에 세워진 벤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가장 부지런한 청소부라도 찾아오지 않을 곳.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아침 이슬뿐이었다.
“교장은 어때? 계속 너 찾던데.”
“별거 아니었어. 이거, 퀴니 코완이 남긴 또 다른 유산 때문이더라고.”
여명이 마총을 꺼내자마자, 세티의 미간이 좁아졌다.
퀴니 코완이 쓰던 마총인 걸 한눈에 알아봐서? 아니, 총기 위에 적힌 선명한 ‘쇠똥구리’를 읽은 탓이었다.
“…교장에게 정체를 밝힌 거야?”
“밝혔다기보다는, 다른 이름을 말해준 거지. 나쁜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쪽이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믿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세티는 별다른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이건 신뢰의 문제였다. 여명이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데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신뢰.
단지, 하나 느끼는 게 있다면….
“달라졌어.”
“응? 뭐가?”
“여명, 너 말이야. 인천에서 만났을 때랑은 많이 달라졌다고.”
“….”
“물론, 좋은 쪽으로.”
세티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똑같은 웃음을 그렸다. 두 사람 사이에 고여 있던 이슬이 햇빛을 머금으며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붙잡은 순간.
-어우, 이럴 줄 알았어. 저, 저 망측스러운 것 좀 봐.
수풀 저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름대로 숨긴 건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
세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쉿, 바보야. 그러다 들켜.
-들키긴 이년아. 이 시간에 남녀가 만나는데 그럴 정신 있을 거 같아?
-…그런가?”
-물고 빨고 시작하면 원래 보이는 게 없는 거야.
여명은 단박에 두 목소리가 네티와 막내의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세티도 마찬가지인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귀여운 미행이 붙었네.”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진짜 큰일 생기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이지 뭐.”
그렇게 말한 여명은 구경하는 처제들을 내버려 두고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조웅찬 장관의 명령부터 한국이 아야톨라에게 특별히 부탁한 ‘제물’, 그리고 호주에 있는 알파 원까지.
이야기가 끝난 직후, 세티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제물은 이미 챙겨놓은 상태지만, 알리바이와 김관형 장관이 제물을 챙기기 전에 시드니에 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호주에는 알파 원이 있어서 어렵다. 맞지?”
“맞아. 만에 하나 알파 원이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면 더 위험해질 테고.”
“그렇다고 조웅찬 장관의 말처럼 내 동생들을 보내는 건 꺼림칙하고?”
“응. 바로 그거야.”
여명의 대답을 들은 세티는 잠시 뭔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동생들이 다시 쑥덕거릴 때쯤, 손가락을 두 개 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방법은 두 가지야. 첫 번째는, 아예 못 간척하고 제물만 챙겨서 입씻기. 조웅찬 장관 인맥이 끊어지겠지만, 한국에 제물을 넘기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 단점은….”
“…장관의 인맥도 못 쓰고, 의심도 받을 거고, 마지막으로 제물에 장난질하는 것도 못 하겠네.”
여명이 그녀의 대답을 가로채자, 세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위의 단점을 싹 날려버릴 수 있는 대신… 의외의 단점이 생길 수도 있는 방법이야.”
“뭔데?”
“전윤성이랑 같이 가.”
“….”
“전윤성의 팔을 잘라서 알파 원이 화난 거라며. 그럼 전윤성하고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럴싸한 의견이었다. 전윤성만 괜찮다면 당장 내일 시드니로 갈 수 있으리라.
‘…전용섭을 살려둬서 다행인가?’
만약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면 속 편하게 시드니로 가자는 소리도 못 했겠지.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베푼 자비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단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꼈…
그때, 숨은 처제들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 시작한다.
-뭘 시작해?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야, 눈빛을 봐야지. 눈빛! 저것 좀 봐라. 눈빛만으로 임신시키겠….
여명은 그 이상 모른 척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수풀 뒤에 숨어 있던 두 소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네티와 막내.
-들켰잖아. 등신아.
막내의 투덜거림을 따라 묘한 시선이 오가길 잠시.
세티가 뚜둑- 목뼈를 풀며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성난 얼굴을 본 네티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치 그러면 혼나는 걸 피할 수 있을 것처럼.
-아.
그에 비해 눈치 좋은 막내는 폭력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
반나절 뒤, 정규 수업이 끝난 시간.
교직원 휴게실 주변 나무에 주섬주섬 사격 과녁을 걸고 있는 여명의 뒤통수를 향해, 네티가 투덜거렸다.
“형부, 형부는 믿으시죠? 저희는 미행한 게 아니라, 미행에서 언니를 지켜준 거라니까요?”
그녀는 막내와 함께 사격용 과녁에 물감을 찍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언니가 너무 뻔하게 기숙사를 벗어나니까… 동생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이해하시죠?”
“그래, 그래.”
“뭐, 저도 언니가 저렇게 삐쭉거리는 거 이해해요. 요즘 수련이다, 뭐다 해서 피곤하잖아요? 거기다 팔선녀 목록도 계속 채워지고. 근데, 그렇다고 동생을 이렇게 두들겨 패는 게 맞아요?”
네티는 보란 듯 이마를 내밀었다. 뽀얀 이마에는 세티에게 맞아서 생긴 혹이 아직도 벌겋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명은 혹 대신 다른 걸 물었다.
“…팔선녀?”
“….”
실수했다는 듯 합- 입을 다물어버리는 네티. 여명이 추궁하려고 하자, 막내가 눈치껏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전윤성은 뭐래요?”
“….”
“오늘 훈련실에서 단둘이 따로 만났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파다해요.”
“뭐 얼마나 지났다고 소문이 나?”
두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여명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막내가 붓을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올림피아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 시점에서 몰락한 2등과 새로운 1등이 만나는 건 당연히 시선을 끌죠.”
“….”
그게 그렇게 되나? 여명은 턱을 쓸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 일이 있으니까, 같이 시드니 좀 다녀오자고.”
“그래서 뭐래요? 같이 가기로 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과녁을 만드는 대신 다른 해법을 찾고 있었겠지?”
여명은 완성된 과녁을 주변 나뭇가지에 걸며 말했다. 이걸로 14개째. 대충 두어 개 정도 더 만들면 샤프슈터를 수련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아무튼, 여명이 다음 과녁을 준비하는 사이 네티가 중얼거렸다.
“전윤성 그 새끼가 도움 되는 날도 있네요.”
“….”
“사람 인생은 역시 모른다니까.”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묘한 적의,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막내까지.
여명은 지나가듯 물었다.
“왜 그렇게 전윤성을 싫어해?”
“좋아할 수가 없죠. 그 새끼가 큰 언니를….”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네티는 말을 끝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막내와 네티가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네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세티 언니가 말 안 해줬어요?”
“응. 내가 일부러 안 물어본 것도 있고.”
“아하… 그러면… 저 말고 언니한테 듣는 편이….”
네티가 말끝을 흐리며 빠져나가려는 데, 막내가 대뜸 말했다.
“전윤성은 하얀 양, 우리 큰 언니의 비밀 애인이었어요.”
“….”
뭐? 갑작스러운 고백에 여명은 물론이고 네티마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내는 무덤덤하게 붉은 물감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그놈 애비가 미국으로 튀기 전부터 사귀던 사이였죠. 사귀는 동안 언니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몰라요. 무술, 감정, 시간… 줄 수 있는 건 다 줬어요. 그런데 전윤성은 그걸 다 쪽쪽 빨아 먹고는… 올림피아에서 큰 언니를 반죽음 상태로 두들겨 팼어요.”
“….”
여명은 본능적으로 이어질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저번 올림피아의 실패를 이유로, 하얀 양은 폐기되었다.
‘…그래서였나.’
그래서 시리를 비롯한 자매들이 여명을 그렇게나 경계했던 건가? 여명은 두 자매를 보며 착잡한 마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내는 푹- 붓에 물감을 적셨다.
“뭐, 우리가 가축으로 태어난 게 가장 큰 죄죠.”
“…시스.”
여명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향하는 시스의 녹색 눈동자가,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래서, 형부한테 더 고마워요.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줬잖아요?”
“….”
“게다가 마음도 넓어서, 모지리 같은 우리 자매들을 한 그릇에….”
“그만! 적당히 해 이년아.”
네티가 못 봐주겠다는 듯 막내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시스는 끝까지 ‘자매 취향은 거기서 거기다…’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걸 본 여명이 웃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는 막내를 질식 직전까지 몰고 간 네티가 입을 열었다.
“형부, 이번에 시드니 갈 때 저도 끼워주세요.”
“…뭐?”
“장관이 저희도 보내라고 했다면서요? 기왕 알리바이를 만들 거라면 저희 자매를 한 명 껴서 가는 게 좋죠.”
“….”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네티는 굴하지 않고 계속 주장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또, 전윤성하고 단 둘이서 시드니에 가면 웃기는 소문이 돌 거라고 확신합니다.”
“웃기는 소문이라니….”
“요즘 언니랑 꽁냥거리는 거 잘 안 하시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남자끼리 외박을 다녀온다? 이거 완전….”
“…완전, 뭐?”
“….”
여명이 역으로 묻자, 네티의 눈썹이 슬그머니 휘어졌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
잠시 후, 막내가 쯧쯧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네티가 입을 열었다.
“…게이 같다?”
“….”
“잘생긴 남자 둘이 붙어 다니면 당연히 그런 소문이….”
저건 또 뭔 소리지? 여명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네티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농담이었어요. 근데, 한국 언론에서 나쁘게 볼 수도 있는 건 사실이에요.”
“….”
“그러니까 진짜로 딱 한 번만, 저 데리고 가주시면 안 돼요?”
“네티… 놀러 가는 거 아닌 거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자매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 도움이….”
그때, 과녁을 칠하던 막내가 끼어들었다.
“제일은 무슨, 서포트라면 내가 제일 낫지.”
“야, 넌 빠져.”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이게 언니한테….”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듯 네티가 주먹을 든 순간, 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누군가의 말투를 따라 한 게 분명한 목소리로.
“시리 고년 눈깔 봤어?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아이고, 걔는 어떻게 순서라는 걸 몰라.”
“이 미친년이 진짜….”
“솔직히 순서를 생각하면 네 번째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자, 잠깐.”
“나도 데스나이트 할머니가 있었으면 성녀님하고도 해볼 만했을 텐데.”
“….”
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티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 이상 모른 척해줄 수 없던 여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네티가 막내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려는 찰나.
휴게실의 문이 열리며 듀크 중령이 고개를 내밀었다.
-샤프슈터 훈련장 만들랬더니, 아주 염병을 떨고 있군.
“….”
-그리고 천여명, 너 몰몬교였냐?
“예?”
-뭔 소리인지 모르면 됐다.
투덜거리는 데스나이트를 마주한 두 자매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듀크가 설렁설렁 밖으로 나왔다.
그는 휴게실 주변 나뭇가지에 이리저리 걸린 과녁판을 보며 잠시 뭔가를 가늠하더니, 대뜸 군복 주머니에서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두 자루 꺼내며 말했다.
-내가 안에서 듣다 보니, 아가씨들끼리 뭔가를 두고 경쟁하고 있던데. 이왕 경쟁하는 거, 이놈 도와주면서 하는 게 어때?
“…?”
두 자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듀크 중령은 친절하게 탄창을 꺼내 장난감이라는 걸 확인시켜준 뒤, 두 사람에게 각각 권총을 쥐여줬다.
“이건 왜…?”
-샤프슈터의 공간 감지 능력을 익히기 위한 첫걸음이지. 날아오는 총알 피하기… 뭐, 사실 맞기 전에 아는 것에 가깝지만.
“….”
-아무튼, 내가 천여명에게 공간 감지를 가르쳐준 후에, 수련 도와주는 겸 내기를 하지. 물론, 총알을 많이 맞추는 쪽이 이기는 걸로.
쉽게 말해, 여명을 향해 총을 쏘란 이야기였다.
“중령님, 갑자기 그런 내기를 하시면….”
당사자가 당황하건 말건, 듀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왜? 나 때는 많이 맞추는 놈한테 포상 휴가도 줬어.
“….”
-나 혼자 쏘는 것보다야 둘이 쏘는 게 훈련도 더 되겠지. 왜 저번에는 하룻밤이면 익힐 수 있다며. 이제와서 꼬리를 빼는 건가?
묘하게 속 좁은 군인 같으니, 그걸 또 기억하고 있으시네.
여명은 한숨과 함께 애써 핑계를 댔다.
“둘 다 미성년이잖아요. 여학생 둘이 쏜다고 뭐 얼마나 훈련이….”
그의 말보다 먼저, 네티와 막내가 방아쇠를 당겼다.
팅팅팅팅-!
스프링의 탄성을 따라 발사된 장난감 총알들은 순식간에 주변 과녁을 후려쳤다. 그것도 단 한 발의 오차도 없이.
직후, 네티와 막내는 보란 듯 총구에 입김을 불었다. 성녀와 비슷한, 그래서 더 자신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걸 본 여명이 할 말을 잃은 사이, 듀크가 마무리를 날렸다.
-어딘가의 미필 씨보다 훨씬 잘 쏘는군. 그렇지?
“….”
이쯤 되자, 여명도 가만히 있기 뭐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뒤, 듀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중령님. 저번에 한 내기, 아직 기억하시죠?”
-뭐, 하룻밤에 샤프슈터를 익힐 수 있다고 했던 거?
“예, 제가 이기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시는 겁니다.”
듀크는 웃었다. 그리고 권총을 뽑으며 말했다.
-그래, 이길 수 있다면야, FBI 국장 팬티색까지 기꺼이 알려주지.
본인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