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5화(415/817)
***
진짜 주가시빌리.
그 단어를 마주한 순간,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가 익힌 주가시빌리는 좋게 말해도 야매로 익힌 무술이요, 솔직하게 고백하면 도둑질로 완성한 무술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여명은 괜히 이렇게 되물었다.
“진짜 주가시빌리라니… 주가시빌리에 가짜도 있는 겁니까?”
그러자 듀크는 데스나이트답지 않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구를 처음 배우던 시절, 쇠똥구리를 보던 청소부 형들의 그것과 닮은 미소였다.
-그래, 그 대답만 들어도 네가 정식으로 익힌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
-하기야, 냉전도 끝난 판에 그딴 정신 나간 무술을 누가 정식으로 익힐까.
그렇게 말한 듀크는 곧장 자매들에게 총을 내리고 쉬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본인 또한 나무에 어깨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빨갱이도 아닌 네가 어떻게 주가시빌리를 익힌 건지 진득하게 설명 좀 해봐라.
“대단한 건 없었습니다. 그냥 자연 발생 주가시빌리를….”
-자연 발생?
“그게… 음, 제가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의도로 무술을 익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기가 강해져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여명이 말꼬리를 흐리자마자, 듀크가 눈을 크게 떴다.
-살기가 강해서 주가시빌리를 자동으로 익히게 됐다고? 그건 또 뭔 소리야?
“….”
시작부터 대화가 꼬였다. 시대 차이 때문일까? 이상함을 느낀 여명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했다.
무분별하게 살인 무술을 익히고, 그 탓에 살기가 너무 강해서 정신적으로 이상해지는 걸 자연 발생 주가시빌리라고 부른다… 라는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듀크가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걸 요즘은 자연 발생 주가시빌리라고 부르나? 우리 때는 그냥 디아볼로스라고 불렀는데. 확실히 비슷하긴 하지만, 재생력이 다르잖아. 재생력이.
“예?”
-동양 철학에서는 심마라고 하던가? 그걸 예수를 시험한 광야의 악마에 비유해서… 아, 설명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지. 됐고, 계속해 봐.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이 주가시빌리를 익히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파순의 무술을 훔쳐 쓰면서 살기가 폭주한 것부터 코르부스에게 두들겨 맞아 살기를 조절한 것, 그리고 비코프의 완성형 주가시빌리를 도둑질한 것까지, 전부.
요약해도 꽤 긴 이야기였지만, 희생양 자매들과 듀크는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았다. 특히 비코프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모두가 눈을 반짝일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난 직후 듀크는 턱을 벅벅 긁으며 물었다.
-네가 겪은 부작용이 뭐였다고?
“정신이 좀 이상해졌습니다. 자제력이 줄어들고, 피를 보는 게 익숙해졌죠.”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뭘 했냐고.
“어… 처음 보는 사람의 팔을 잘랐고….”
-애인을 모욕해서 그런 거라며. 그 정도는 나도 해. 그거보다 심각한 건?
성녀를 희롱하고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처제들을 본 여명은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적.
듀크가 그 정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턱을 긁던 손을 멈추고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는 말이다, 살기와 주가시빌리의 부작용이라고 하면… 이미 인간이 아니었어. 피아 구분 없이 주변에 보이는 건 다 때려 죽이고, 식인은 덤이었지.
“….”
코르부스에게 이미 들었던 사실. 하지만 처음 들은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듀크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감이 다른 까닭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빨갱이들은 참 지독한 놈들이라, 그렇게 미쳐버린 녀석들도 알뜰하게 써먹었거든. 냉장고처럼 차가운 관에 미친놈들을 넣고 꽝꽝 얼려 놨다가… 필요한 곳에 집어 던졌어.
거기까지 말한 듀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냉전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첫 등장은 버마였지. 빨갱이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투입된 정부군 머리 위로 소련에서 보낸 관 다섯 개 떨어졌고… 다 죽었지.
“…다 죽었다고요? 누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네티가 되물었다. 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라고는 소총뿐이었던 정부군 수백 명과 돌아버린 주가시빌리 다섯 명, 전부.
“….”
-그 후로 소련은 특수전에서 뭔가 꼬일 때마다 관을 던졌지. 엿 같은 새끼들.
희생양 자매의 과거가 떠오른 걸까? 네티는 질색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사람이 무슨 소모품도 아니고.”
-소모품 맞아. 아가씨, 공산주의 치하에서 인민이란 체제를 위한 소모품이란 걸 몰랐나?
무슨 반공 만화에서 나올법한 이야기였으나, 네티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몸으로 냉전을 겪은 경험자였으니까.
아무튼, 그 경험자는 현대의 주가시빌리를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익힌 방법은 정식과 거리가 먼 야매에 도둑질이고, 쓰는 방식도 진짜하고는 다른데… 결과물은 분명 주가시빌리란 말이지. 그것도 원본에 없던 기능까지 추가된 주가시빌리. 단순히 진의 때문인가?
이번에는 막내가 끼어들었다.
“짭 주제에 원본보다 낫다고요? 최악의 도둑이네요.”
-아니면… 저게 원래 올바른 사용법일지도 모르지. 뭐, 나로서는 어느 쪽이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뭐, 중령님은 주가시빌리를 사냥한 사냥꾼이시지, 제작자가 아니시니까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전통파가 아니라면 별 상관 없는 거 아닙니까?”
-그게… 흠.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뭔가 골똘히 고민하는 듀크 중령을 보며 여명은 묘한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듀크는 그의 불안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명, 주가시빌리가 만들어진 정확한 배경은 알고 있나?
“살인에 특화된 무술을 무분별하게 익히다 보니 정신이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걸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무술 아닙니까?”
-그래, 그게 정설이지. 하지만 소련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한 적 없어. 그래서 내가 아직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다른 여러 가설들도 있었지. 그때는 전부 병신 같은 소리라고 넘겨 버렸는데….
군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 듀크. 네티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른 가설이요? 뭔데요?”
-주가시빌리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가설.
“…?”
네티의 눈썹이 궁금증으로 휘어지자, 듀크가 여명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사실, 저 친구가 너무 쉽게 익혀서 그렇지, 주가시빌리는 수십 년 동안 완성한 사람이 열 명도 안 되는 정신 나간 난이도의 무술이야. 살기가 워낙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다 보니… 그래서 자연스레 의심도 따라왔지. 하필 왜 살기일까.
네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이상한가요? 형부만 봐도 어마어마한 재생력에, 살기만 있으면 거의 무한에 가깝게 싸울 수 있잖아요. 이 정도라면 부작용이 있어도 충분히 양성을 시도할만한 것 같은데.”
-가성비가 문제지. 군대라는 건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집단이라, 아무리 성능이 좋은 무기라고 해도 가성비가 떨어지면 못 쓰는 법이거든.
“아, 가성비….”
-전쟁터에서는 사람도 총도 전부 돈이야. 재생력? 무한한 마나? 어차피 대가리 날아가면 땡이고, 적의 살기가 없으면 효율도 꽝인데?
“….”
-미친 녀석들을 관에 넣고 던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작 과정에서 사람이 무수히 갈려 나가는 판에 가성비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었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으나… 여명은 가볍게 반론했다.
“소련이 비효율적으로 사람을 갈아버린 일이 어디 한두 개입니까. 인민을 언데드처럼 굴리던 곳인데.”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했으니 가설로만 끝났지. 근데… 너를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군.
듀크는 나무에 기댄 채로 여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뭐요?”
-이 세상에 너만큼 주가시빌리를 다룰 수 있던 사람이 정말… 너뿐이었을까? 물론 내가 본 주가시빌리 중에는 네가 최고지만, 내가 모든 주가시빌리와 싸워본 건 아니야. 특히 최초로 주가시빌리를 완성했다는 스탈린은 구경도 못 해봤지.
“….”
스탈린. 그 이름을 들은 여명이 시선을 돌리는 사이, 듀크가 노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공기나 마나처럼, 살기는 실존한다. 실제로 살기를 쓸 줄 아는 초인들도 흔하고… 하지만 살기를 직접 다루고, 심지어 마나로 바꿀 수 있는 무술은 주가시빌리 하나뿐이야. 신기하지 않나?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나 긴 서론을 내뱉는 걸까? 여명은 어느덧 저무는 해를 보며 말했다.
“…빙빙 돌리지 마시고, 그냥 본론을 말해주시죠.”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노을이 만든 그림자가 드리우는 가운데, 듀크가 대답했다.
-다시 말해, 주가시빌리의 정점에 이른 자는 모든 살기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때마침 아샤에도, 지구에도 살기의 신은 없고.
“…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여명의 눈이 가늘어진 바로 다음 순간, 듀크가 덧붙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요, 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에너지 생명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가시빌리는 인공 신을 만들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 그게 내가 들었던 가설이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반론의 여지가 너무 많아서 더욱 황당한 이야기.
하지만 여명은 단 한마디도 반론할 수 없었다. 그가 만난 스탈린은…
별들이 가지고 있던 ‘운명의 주사위’를 들고 있었으니까.
***
답을 찾을 수 없는 무거운 고민과 그보다 무거운 침묵.
길게 늘어지는 노을 그림자와 함께 이어지는 침묵을 깬 건, 파란 머리의 희생양이었다.
“살기의 신… 에이, 형부랑은 안 어울리는데요? 저 얼굴로 어떻게 살기의 신이 돼요?”
-저 얼굴이 어때서?
“아니, 저 얼굴이면 살기보다는 하렘의….”
네티가 헛소리를 내뱉기 무섭게, 듀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는 그저 가능성을 말한 거다. 저 녀석이 쓰는 주가시빌리는 내가 활동하던 시절과 비교해도 말이 안 되니까. 뭐… 가설은 가설일 뿐. 정확한 건 신성 쪽 전문가들과 논의해봐야 알겠지.
“전문가? 성녀님이요?”
-아니, 걔는 빼고.
“….”
뭘 또 수긍하고 있어?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네티의 이마를 꾹 누르는 사이, 옆에서 탄창을 갈아 끼우는 소리가 들렸다.
막내가 낸 소리였다. 그녀는 소총의 약실을 확인하며 말했다.
“네, 네 재밌는 이야기였습니다. 형부의 주가시빌리는 스탈린이 떠오를 정도로 이상… 아니, 대단하다는 거죠?”
“….”
“자, 결론 나왔고. 내기는 언제 다시 시작해요? 통금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뭐, 지금 바로 시작하지.
그렇게 말한 듀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네티가 부랴부랴 재장전하는 사이,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공간 감지는 이만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시죠.”
듀크가 그럴까?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네티가 빽 소리쳤다.
“뭐? 안 돼요! 형부!”
“….”
“아니, 제가 형부를 쏘고 싶다는 건 아니고…!”
이대로라면 제가 내기에서 진다고요! 힐끗거리는 네티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 한 탄창만 더 쏘면 안 돼요? 네?”
차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한 부탁이었다. 여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한 탄창만.”
허락과 함께 주가시빌리를 일으킨 여명은 그 사이로 공간 감지를 사용했다.
자연스레 두 무술이 뒤섞이는 광경을 본 듀크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가운데, 네티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
-이런 음흉한 새끼.
자매들이 쏜 납탄을 회수하는 와중에, 듀크가 혀를 찼다.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또 왜 그러십니까.”
-내기 말이다. 일부러 동점 만들어줬지?
“….”
여명의 몸을 많이 맞추는 쪽이 이기는 내기.
듀크의 지적처럼, 마지막 한 탄창을 비운 자매들의 점수는 동점이었다. 총알을 일부러 맞고 피해야만 가능한 일. 공간 감지를 뒤섞은 주가시빌리가 이뤄낸 일이었다.
뭐, 덕분에 가랑이 사이에 납탄을 맞긴 했지만.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둘 다 소중한 처제인데, 어느 한 명만 편들 수는 없잖아요.”
-예, 그러시겠죠. 조셉 스미스님.
“…조셉 스미스는 또 누굽니까?”
-몰몬교 창시자.
“….”
몰몬교가 어때서 저러는 거야? 그냥 평범한 기독교 교파가 아니었… 아.
“…일부다처제를 고집하다가 연방 정부랑 싸웠던 교파였죠? 거기?”
-오, 드디어 눈치챘군.
“….”
여명은 대답 대신 주운 납탄 하나를 듀크를 향해 튕겼다. 팅-! 공간 감지로 납탄을 낚아 챈 그가 피식 웃었다.
-부러워서 그런다, 인마. 주가시빌리에, 이쁜 처제들에… 어우, 게다가 빨갱이 사냥까지?
“진짜로 부러운 건 마지막 하나고, 나머지는 그냥 놀리고 싶으신 거죠?”
-아, 역시. 난 눈치 좋은 후임이 좋더라.
“저 미필입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던 여명이 납탄을 다 수거할 때쯤, 듀크가 휴게실에서 여러 총기를 들고 나왔다.
자매들이 사용하던 모델건과 달리 실탄이 장전 된 진짜 총기.
-오늘 내로 샤프슈터를 익히겠다고 했지? 어디 실력 좀 볼까.
“두고 보시죠.”
여명은 그가 내미는 권총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타고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죽음의 무게였다.
듀크는 권총을 쥐락펴락하는 여명을 보며 말했다.
-샤프슈터의 배경은 아까 설명했고… 우리가 유독 주가시빌리와 자주 싸운 이유도 말해줬던가?
“아뇨, 하지만 알 것 같습니다. 주가시빌리를 죽이는 최선의 방법은… 머리통을 터트리는 거잖습니까. 샤프슈터가 딱이었겠죠.”
-그래, 맞아. 아무리 강화한 머리통이라고 해도 근거리에 소총탄을 먹여주면 얄짤 없이 뒤졌지.
듀크는 입술을 핥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헬멧에 방탄 토시를 차고 머리를 보호하면 이야기가 달랐어. 장거리에서 기관포라도 갈기면 모를까, 시가전에서 만나면… 우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지. 나 죽을 때만 해도 교환비가 1:1이었다니까?
“….”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 눈치챘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듀크의 몸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죽은 육체 속을 내달리는 마나의 흐름을 봤다.
“…샤프슈터의 진의가 그속에 있군요.”
듀크는 손뼉을 쳤다.
-그래, 맞아. ‘총을 뽑은 자는 총에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게 총으로 나라를 세운 미국인이 만든 최초의 무술이자, 미군의 첫 번째 진의다.
“어, 멋지긴 한데… 저는 첫 무술이라면 독립선언서 문구 같은 걸 따올 줄 알았습니다.”
-그건 주가시빌리나 샤프슈터처럼 더러운 전쟁에 쓰이기에는 너무 고상하지. 그런 무술은 따로 있어.
“….”
-자,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새겨보게. 총을 뽑은 자는 총에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여명은 그렇게 했다. 듀크의 마나를 똑같이 따라하면서, 공간 감지를 사용하고, 미국의 진의를 되새겼다.
천천히 감기는 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미군도 아니오, 듀크도 아니었다.
넓은 황야와 바람을 따라 굴러다니는 회전초, 그리고 총을 든 카우보이.
그건 작업반장님과 함께 봤던 서부극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왜 이 순간 이런 장면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명은 그 심상을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정신, 혹은 마음이 마나를 따라 차오른다.
심재좌망,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러 놓은 무아지경의 감각이었다.
여명은 이 깨달음이 몸을 망가트릴까 무서워서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을 억누르려 했다.
두메아 가주가 가전 무술을 알려줬을 때처럼, 그리고 전윤성이 깨달음을 방해했을 때처럼.
하지만 이미 잔뜩 쌓인 깨달음은 그가 억누른다고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상 속 카우보이 또한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천천히 그에게 총을 겨눴다.
‘아.’
여명은 방아쇠가 움직이는 걸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아지경을 겁내는 마음도, 몰아치는 깨달음도,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저 총알까지도 전부, 자기 자신일뿐이었으니까.
탕.
카우보이가 쏜 총은 여명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주가시빌리라도 맞으면 즉사하는 위치.
하지만 여명은 죽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깨달음 속에서 눈을 떴다.
-뭐야? 왜 벌써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듀크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여명의 손에는 그가 건네줬던 권총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권총은 가벼웠다. 각오의 무게였다.
여명은 그 권총을 하늘로 겨누며 말했다.
“중령님. 제가 이겼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듀크는 사납게 웃었다.
-그거야… 보면 알겠지.
여명은 말없이 총을 하늘로 겨눴다. 그리고… 심상 속 카우보이와 똑같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머리 위로 달아간 총알은 노을과 달빛 사이 어딘가에 펼쳐진 포물선을 따라 휘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방향을 바꿔, 총을 들지 않은 여명의 왼손을 꿰뚫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앗.”
멋지게 총알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실탄이라는 걸 깜빡했다.
이게 이렇게 되네. 여명이 구멍 뚫린 왼손을 보며 허탈하게 웃기 무섭게, 듀크 또한 허탈하게 웃었다.
-하루도 안 걸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