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17)
을 위한 세계는 없다-417화(417/817)
***
여명은 다가오는 병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를 휘감은 살기가 두려워서? 아니면 알파 원이란 이름에 겁을 먹어서?
아니, 주가시빌리를 익힌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병에 담긴 살기가 가짜라는 걸.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병은 머리카락이 눌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췄다.
“하, 눈 하나 깜짝 안 하신다? 이거 진짜 웃긴 새끼네.”
그렇게 말한 알파 원은 그대로 병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병이 깨지는 소리 대신, 파스스- 마나를 견디지 못한 병이 가루가 되는 소리가 들렸다.
흐읍.
잔뜩 긴장한 전윤성의 숨소리가 홀에 울리는 가운데, 알파 원은 처음 앉았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소리쳤다.
“주인장, 위스키 한 병 더!”
그러자 주방에 숨어있던 가게 주인, 푸른 쥐 조직원 카자 감자토프는 곧바로 위스키를 꺼내왔다.
그 와중에 여명을 향해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건 덤이었고.
‘내 영업장에 10강을 또 끌어들였어?’
여명은 애써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나중에 모리네에게 말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튼, 그사이 위스키 뚜껑을 딴 알파 원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둘 다, 와서 앉아라.”
조금 전 살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가벼운 말투.
여명이 긴장한 전윤성을 데리고 그의 옆자리에 앉자, 알파 원이 빈 술잔을 채워 여명에게 내밀었다.
“마셔.”
전윤성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명이 잔을 받았다. 원샷. 위스키 특유의 진한 향기가 그의 목을 타고 흘렀다.
탁- 여명이 빈 잔을 내려놓자, 알파 원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다고 그걸 진짜로 마시냐?”
“어른이 주는 첫 잔은 거절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특히 그게 공짜 술이라면요.”
“두 번째 잔은 거절하겠다는 말을 참 이쁘게도 하는군.”
그는 전윤성에게도 한 잔 내밀며 덧붙였다.
“거, 그래. 술 예절을 잘 배웠다는 건 알겠다. 고아가 아버지에게 배웠을 리는 없고… 용병들한테 배운 거냐?”
고아와 용병. 그의 뒷조사를 한 게 분명한 단어 선택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아는 어르신께 배웠습니다.”
“그래? 노인네들은 보통 술버릇이 고약한 법인데. 운이 좋군.”
그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전윤성도 눈치를 보며 잔을 비웠다.
녀석도 초인답게 원샷으로 잔을 비우긴 했지만, 여간 맛이 없는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윤성아, 비싼 술 마시고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다.”
여러모로 술꾼다운 말을 지껄인 알파 원은 쯧, 혀를 차며 다시 잔을 채웠다.
“됐고, 다시 이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천여명, 너 또라이냐?”
“….”
“널 엿 같이 생각하는 내가 시드니에 있다는 걸 알고도 윤성이를 끌고 나와? 왜, 한국에서 내 얼굴 좀 보라고 하디?”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말.
전윤성이 떨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가운데, 여명은 이번 질문이 어떤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머리통을 깨버릴 생각이었다면 조금 전 병으로 깨버렸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슬쩍 주방을 바라봤다. 문 너머로 네티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아마 벌써 119를 띄워놓은 상태이리라.
‘시드니 폐허에 주둔 중인 호주 군과 성검을 생각하면… 맞아 죽을 일은 없겠네.’
여명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위에서 시킨 일도 일이지만,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애매한 대답이었다. 사실은 마주치지 않는 게 베스트였으니까.
그러나 다행히 알파 원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또라이가 아니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었네.”
“….”
“그래, 날 직접 본 감상은 어떠냐?”
단번에 위스키를 털어 넣은 그는 꺼억- 술 냄새가 섞인 트림을 내뱉었다.
초인이 아니라 어디 길거리 알콜 중독자라고 해도 믿을만한 모습.
그러나 여명은 그 모습 뒤편에 숨겨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가짜 변경백이나 데메론드가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
그것이 마나인지, 아니면 어떤 경지나 이치인지 정확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미국 빅 쓰리라 불리기에 모자람 없는 강자라는 것.
여명이 대답했다.
“듣던 것 이상이십니다.”
“…아, 그래? 누구한테 나에 대해 들었는데? 언론? 잡지? 그것도 아니면 애니메이션?”
말꼬리를 잡는 알파 원. 여명은 미군 출신 데스나이트요, 라고 대답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동안 데스나이트를 요긴하게 써먹긴 했지만, 이번에는 통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팔아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팔기로 했다.
“한국의 높으신 분들이요.”
“…가장 븅신 같은 것들한테 들었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쯤 되자, 여명을 보는 전윤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러다 큰일 나면 어쩌지- 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
그리고 그런 전윤성과 여명의 얼굴을 번갈아 본 알파 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생각보다 더 웃기는 새끼였네.”
“….”
“솔직히 팔 한 짝은 뽑으려고 했는데… 윤성이도 그걸 바라는 눈치는 아니고. 쯧, 술 예절이 살렸다. 그 어르신께 감사해라.”
그렇게 말한 알파 원은 곧바로 위스키 두 병을 추가 주문하더니, 양손에 각각 한 병씩 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냥 가시려는 건가? 전윤성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알파 원이 고개를 돌렸다.
“안 따라오고 뭐 하냐?”
“…예?”
“둘 다 따라와. 좋은 거 챙겨 줄 테니.”
***
가게를 나온 알파 원은 술 나발을 불며 시드니 시내를 어슬렁거렸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뒤를 따르게 된 전윤성과 천여명은 이게 다 뭔가 싶었지만, 항의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항의할 틈이 없었다.
알파 원이 쉴 새 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린 덕분이었다.
“윤성아, 정말로 내가 너희 부자를 구해줄 때 생각 안 나냐?”
“승만 시티의 이승만 동상, 그거 사실 내가 부순 거 알고 있냐? 한국 놈들이 날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야.”
“사실, 내가 광고한 버번 위스키보다는 콘 위스키를 더 좋아해.”
“천여명, 너 진짜로 그 이름 이상한 자매 네 명 때문에 한국 정부랑 붙어 먹는 거냐? 별로 이쁘지도 않던데.”
“내가 유독 흑인 범죄자만 골라잡는다는 건 언론이 만든 프레임이야. 사우스케롤라이나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라고.”
“그리고, 난 사실 민주당 지지자야.”
개인적인 취향부터 정치적인 입장, 심지어 숨겨진 역사 이야기까지.
그 살아있는 정보를 들으며 경악과 감탄을 보여주는 전윤성과 달리, 여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뒷골목 주정뱅이가 그러하듯, 안주가 없는 술꾼은 헛소리를 안주 삼는 법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떠들던 안주가 바닥날 때쯤.
일행은 시드니 외곽, 한적한 도로변에 도착했다. 작은 상가 건물과 호주 특유의 가로로 넓은 단독주택들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도로를 잠시 바라보던 알파 원은, 갑자기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타국에서 베타 급 기밀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장 확실한 해법이 뭔지 아나?”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베타 급 기밀 문제가 뭔지도 모릅니다.”
“대단한 뜻은 없어. 그냥 정상적인 첩보로는 정보의 실체를 알아낼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지. 예를 들어, 신출귀몰한 빨갱이나 종말 교단 같은 것들이 나타나는 상황.”
“….”
“때마침 시드니에는 둘 다 나타났군. 다시 묻지, 이럴 때 가장 최선의 해법이 뭘 것 같냐?”
여명과 전윤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알파 원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술병을 집어 던지며 작은 주택으로 향했다.
주변 주택들과 비교해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평범한 주택.
띵동-
그곳의 초인종을 누른 알파 원은 두 사람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답은, 일대의 첩보망을 다 불태워버리는 거다.”
“…예?”
“도망 다니는 쥐 새끼를 하나하나 쫓는 것보다, 폐허를 뒤지는 게 더 쉽거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택 문이 활짝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방탄복을 입은 백인 세 명이었다. 그들은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문을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안녕, 쥐 새끼들?”
알파 원이 인사를 건넨 직후,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피하세-!”
뒤늦게 살의를 느낀 전윤성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이려는 순간.
딱.
알파 원이 한발 앞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총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푸확- 소리와 함께 한 줌 핏물로 돌아갔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건 내부에서 폭발한 듯한 동그란 흔적과 주인을 잃은 소총뿐.
“….”
너무나 갑작스러운 살인이었지만, 알파 원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익숙하다는 듯 작은 위치 추적기를 건물 안에 던지고 문을 닫았다.
“일단 한 팀. 이제 다음 구역으로 가자.”
전윤성과 여명 모두 순순히 그를 따랐다. 전윤성은 갑작스러운 살인에 놀란 탓이었으나, 여명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일대 첩보망을 다 죽인다고 했지. 그게 정말일까?
그의 궁금증은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시드니에 퍼진 첩보망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까닭이었다.
정체 모를 상가 건물 지하에 숨어있던 스파이부터, 무덤 관리인으로 위장한 영세한 네크로맨서, 그리고 미국과 호주 양국에 정보를 팔아먹은 끄나풀들까지.
알파 원은 모두를 손짓 한 번으로 죽여버렸다.
지켜보던 전윤성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일방적인 도살.
그렇게 드넓은 시드니 곳곳이 피로 물들고 더 이상 첩보망이라고 할만한 게 남지 않았을 때쯤, 여명이 물었다.
“좋은 걸 챙겨주신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게 좋은 겁니까?”
“아니, 진짜는 마지막에 남겨뒀다. 이건 그냥 일이야.”
알파 원이 그런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시드니 한인 타운에 자리한 작은 마트였다.
크기에 비해 있을 건 다 있는 전형적인 지역 마트. 알파 원은 마트 안으로 들어서며 설명했다.
“이 마트는 종말 교단의 시드니 지부다.”
“….”
“얼마 전까지 아야톨라가 이곳, 정육 코너 냉동고에 숨어있었지.”
전윤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마트가 그런 무시무시한 곳이라니?
잔뜩 긴장하는 전윤성의 태도와 상관없이, 알파 원은 주류 코너에서 멈춰 술을 고르기 시작했다.
여명은 눈치껏 물었다.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남은 지부 놈들을 죽이고 언론에 알려라. 가서 기삿거리 하나 만들어.”
“….”
“시드니 휴가 나온 두 학생이 종말 교단의 잔당을 퇴치하다… 꽤 괜찮은 그림 아닌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가벼운 말. 여명은 이게 즉흥적인 계획이라는 걸 눈치챘다. 문제는, 왜 자신을 이 계획에 끌어들였느냐는 것.
“윤성이야 그렇다 치고, 저는 뭐가 이뻐서 이런 일에 끼워 주십니까?”
그러자 알파 원은 주류 코너에서 멋대로 위스키를 꺼내며 대답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군. 종말 교단과 접촉한 게 한국인 것 같아서? 아니면 단순히 네가 마음에 들어서 일 수도 있지.”
“….”
“난 술 잘 먹는 또라이를 좋아하거든.”
미친놈인가? 아니면 강자 특유의 괴벽인가.
여명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안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윤성과 함께 마트 정육 코너로 향했다.
전윤성은 내키는 얼굴이 아니었으나, 종말 교단 지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전윤성은 냉장실 문에 걸린 마법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시드니에 괜히 왔다 싶냐?”
“어.”
“그럼 나중에 비싼 거 부탁해. 뭐든 들어 줄 테니까. 아, 그렇다고 너무 비싼 건 안 되고.”
여명이 너스레를 떨자, 전윤성은 긴장이 풀린 듯 피식 웃으며 냉장실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두꺼운 냉장고 문 너머에는 피가 흥건했다. 양, 돼지, 소, 그리고 사람이 흘린 피였다.
“…누구냐?”
저벅- 핏물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시체 사이에서 뭔가를 챙기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숫자. 이 좁은 곳에 잘도 처박혀 있었네.
“누구냐고 물었다!”
대표로 보이는 녀석이 뭐라 지껄이건, 여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도축 칼을 주워들었다.
그는 죽을 놈 질문에 대답해줄 정도로 친절하지 않았다.
전윤성 또한 마찬가지인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진한 피 냄새 사이로 마나가 모이는 순간.
“사, 살려… 주세….”
냉장실 구석, 시체 사이에서 누군가가 읊조렸다. 여명의 관심을 끌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였다.
“김… 장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