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0)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0화(420/817)
***
알파 원이 말했다.
-넌 너무 쉽게 편하게 쓴다.
오르세 라날이 말했다.
-그냥 퀴니의 안배를 따라. 그게 너희도, 나도 편한 길이야.
청소부 작업반장님이 말했다.
-우리가 땀 흘린다고 거리가 항상 깨끗해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 몸이 편하면 무조건 더러워지는 법이다.
여명은 그리운 목소리를 음미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이게 끝이야? 이건 무슨 깨달음이지.
살짝 당혹감을 느끼며 일어서려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여자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깨달음은 무슨. 여기서 더 먹으면 죽는다.”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
여명이 눈을 떠보니, 작은 나무 의자 위에 앉은 여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금발과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녹색 눈동자가 그의 몸을 훑었다.
쇠미리와 닮았지만, 어딘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은 의자 난간에 팔을 올리고 삐딱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제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그저 먹어 치우기에 바쁘구나. 욕심이 그득그득해서는.”
“….”
“어디 말해보거라. 눈에서 빔 쏘는 게 그렇게 탐나더냐?”
인천의 국밥집 아줌마가 떠오르는 잔소리.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피비린내로 가득한 숲이었다.
녹색으로 물든 땅 위로, 아름드리나무와 어딘가 익숙한 시체들이 빼곡히 쌓여있는 곳.
시체가 늘어난 것만 빼면 예전에도 한 번 방문한 적 있는 장소였다.
그의 정신 속, 코끼리 파순과 쇠미리를 만났던…
“꿈과 무의식이 뒤섞인 곳이지. 주변 파악은 그만하면 됐다.”
그렇게 여명의 상념을 끊은 그녀는 녹색 드레스 자락을 출렁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명 또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세계수님.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혹시….”
파순처럼 제 무의식에 갇히신 겁니까? 질문보다 먼저 세계수가 물었다.
“왜, 이제와서 나를 불태운 게 후회되느냐?”
“…아뇨, 딱히. 그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세계수는 그대로 숲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밟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세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파 원과 싸운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에게서 무술을 훔치려 한 건 더 멍청한 짓이었고.”
“…결과는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지. 그 괴팍한 놈이 너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대련을 핑계로 널 죽였을 게다. 물론, 제대로 무술을 훔쳤어도 죽었겠지.”
훔쳤어도 죽는다? 여명의 고개가 기울어지기 무섭게, 세계수가 그의 가슴을 향해 눈짓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여명은, 순간 숨을 삼켰다.
꿈속 그의 가슴에 커다란 금이 가 있었으니까.
마치 가뭄을 맞이한 땅처럼 쩍쩍 갈라진 모습. 피 대신 빛나는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는 게, 여간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놀란 여명이 가슴을 더듬는 사이, 세계수는 다시 숲길을 밟으며 말했다.
“알파 빔을 제대로 익혔다면 그대로 터졌을 거다.”
“알파 빔… 이요?”
“멍청한 이름이지? 눈에서 광선을 쏘는 그 역겨운 무술의 이름이다. 미국인들은 단순한 걸 좋아하거든.”
“….”
그렇게 나쁜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여명은 괜히 오른쪽 눈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숲길의 피비린내가 줄어들고, 시체보다 나무와 풀이 더 많이 보일 때쯤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몸을 정상화할 때까지, 어떠한 무술이나 마법도 익히지 말라.”
“…익히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뻔한 질문을 하는구나. 내가 뻔한 정답을 알려주자면,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
여기까진 예상대로였다.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질문을 꺼냈다.
“그러면, 가진 무술의 경지를 올리는 건요? 이미 가진 걸 갈고 닦아도….”
“죽는다.”
“….”
이건 좀 충격이었다. 그러면 신명을 찾고 몸을 복구할 때까지 아무 수련도 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러면 진의로 무술을 만드는 건 어떻게 하지?
의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세계수는 숲길을 벗어나 나무 사이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새 무술을 익히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이미 가진 걸 키우는 것까진 어떻게 버틸 방법이 있다.”
“그걸 알려주시려고 나타나신 거군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
뜬금없는 선문답에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세계수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직후, 주변 모든 나무의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떨었다.
샤아아- 나뭇잎 떠는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두 사람의 길을 막고 있던 모든 식물이 휘어지고, 꺾이고, 멀어지며 모습을 바꿨다.
여명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높이의 통로.
휘어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는데, 통로 너머에서 날아오는 묘한 라면 냄새 덕분이었다.
…이 냄새는 순한맛인데?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따라오거라.”
여명이 코를 킁킁거리는 사이, 세계수는 그대로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여명 또한 안으로 들어서자,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대체 누가 그의 꿈속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 걸까?
다행히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통로를 따라 몇 걸음 걷자마자, 냄새의 근원이 나타났으므로.
***
[이 돼지 같은 년, 너만 처먹냐!]오르세 타불의 이복누이이자 하수도의 수룡, 오르세 라날은 버럭 소리 지르며 냄비를 집어 던졌다.
조금 전까지 라면으로 가득 차 있던 냄비는 데구르르- 빈 깡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텅 빈 냄비를 본 용은 또다시 울분을 토했다.
[이 저주받을 계집아! 너는 정량 배식도 모르냐?! 애인이 없어지니까 아주 아귀가 따로 없구나!]용의 목소리의 끝, 빈 그릇과 편의점 음식 봉투로 탑을 쌓은 여인은 대답 대신 삼각김밥을 뜯었다.
그리고 그걸 본 용은 더는 참지 못했다.
[야! 홍세티! 냄비 하나를 혼자 처먹고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응? 넘어가냐고!!]“응, 넘어가네.”
[이… 이…!]라날은 그대로 삼각김밥을 먹는 세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육중한 몸이 세티를 덮치기도 전에, 망치를 든 그녀의 손이 흐릿해졌다.
빠악! 망치가 용의 주둥이를 후려치는 소리가 둥지를 가득 울렸다.
깔끔하고 완벽한 일격.
그나마 살인적인 힘이 실린 건 아니었는지, 바닥에 쓰러진 용은 곧바로 일어나 가슴을 쿵쿵 쳤다.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여긴 내 둥지야! 내가 짓진 않았지만 내 집이라고!]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이 밥버러지들아! 라면밖에 못 끓이는 년들은 이제 필요 없어!]안타깝게도, 용의 악다구니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삼각김밥 봉투를 까는 세티는 물론이고, 성녀와 그릇, 그리고 쇠미리까지.
모두 자신들의 식사에 열중하거나 쓴웃음을 지을 뿐, 용을 돕거나 먹을 걸 내어주지 않았다.
“그만 징징거리고 수련이나 하시오. 변신술을 익혀서 직접 제자를 만나러 가면 되지 않소.”
오직 코르부스만이 안타깝게 혀를 차는 가운데…
세계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개판이로구나.]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탓이기도 했다.
당장 밥을 먹고 있는 일행들 앞에서 손을 흔들어봤지만,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의심을 키웠다.
[전부 현실이 맞다. 그것도 실시간이지.]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세계수의 대답을 들은 여명이 곧바로 되물었다.
[실시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겁니까?] [모든 것은 상호적이지. 누군가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그를 들여다보는 법 아니겠느냐.] […니체를 읽으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지구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의 아이들이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었겠느냐? 그러니 그런 질문 말고, 내 비유가 무엇인지나 생각해 보거라.]사실, 생각해볼 것도 뭣도 없었다. 너무 뻔한 이야기였으니까.
여명은 라임 뿌린 라면을 먹는 쇠미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리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절 관음한 거군요? 꿈과 꿈을 연결해서, 현실을 훔쳐보는 방식으로.] […관음이라니. 과년한 처녀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최소한 감시라고 하거라.]차마 범죄가 아니라고는 못 하시네. 여명은 피식 웃으며 쇠미리의 볼을 쿡쿡 찔러봤다.
꿈이라서 그런가, 그의 손가락은 쇠미리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이거, 나중에 또 할 수 있을까요?] [왜, 너도 이 아이를 관음… 아니, 감시하려고?] [….] [어른에게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다. 그리고… 너 혼자서는 못할 게다. 이건 엘프만 할 수 있는 거니까.]거기까지 말한 세계수 또한 쇠미리 곁으로 다가왔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는 동시에, 어딘가 달랐다.
단순히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세계수가 나무라면, 쇠미리는…
[선인장에 가깝지.] [예?] [누군가가 내 아이를 바꿔버린 탓이다. 직접 보려무나.]직후, 세계수는 쇠미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은 여명의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쇠미리의 가슴을 쑥- 뚫고 들어갔다.
뭐지?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뜬 바로 다음 순간, 세계수는 가슴에서 손을 뽑았다.
그녀의 손을 따라 얇은 덩굴, 혹은 풀줄기가 딸려 나왔는데, 줄기 곳곳에는 가시와 함께 선인장꽃과 닮은 금색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검게 타락했을 줄 알았건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 예상보다 아름답구나.] […타락이요?]세계수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쇠미리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작은 줄기를 뽑아냈다.
쇠미리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녹색 나뭇잎이 무성한 줄기였다.
[그건 뭡니까?] [네 몸이 붕괴하는 걸 막아줄 끈이다. 세계수의 덩굴은 봉인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존재들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기능이 있지. 참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니더냐? 쉘 실버스틴이 양심이 있다면 엘프들에게 저작권료를 줘야 할 것이다.] [….]농담인가? 여명이 눈을 깜빡이자 세계수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두 줄을 꼬았다.
그렇게 두 줄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단단한 끈이 된 직후, 세계수는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여명의 목에 끈을 걸었다.
[그걸 차고 있는 동안에는, 수련으로 몸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새로 무술을 익히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으니… 조심하거라. 알겠느냐?]목에 걸린 끈을 만지작거리던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끈이 목에 걸린 순간부터 가슴의 균열이 확연히 줄어들었으므로.
그리고 그 가슴을 확인한 세계수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쇠똥구리.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꾸나.]세계수가 그렇게 떠나려는 순간, 여명이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뭐냐?] [타락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여명의 시선은 쇠미리, 정확히는 그녀의 가슴에서 나온 줄기를 향하고 있었다.
세계수 또한 똑같은 것을 보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모든 것은 상호적이다. 내 아이는 연결하지 말아야 할 것과 자신을 연결했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게 타락입니까? 저랑 꿈을 연결한 게요?] [그래, 그게 타락이다.]그녀가 단언했다. 여명은 그제야 쇠미리의 꿈속에서 불태운 세계수와 눈앞의 세계수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미리를 선인장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비유라면 타락과 거리가 먼 것 아닙니까? 선인장은 타락한 게 아닙니다. 환경에 적응한 거죠.] [비유를 비유로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숲에서 자랄 나무가 사막의 선인장이 되었다. 이게 타락이 아니고 무엇이냐?] [어차피 같은 둘 다 식물…]세계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다르다. 대부분의 식물은 낮에 이산화탄소를 합성하지만, 선인장은 밤에 한다.]갑자기 생물학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여명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는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녀가 꿈에서 멀어지는 찰나, 뭔가 떠올린 여명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낮이나 밤이나 광합성 할 수 있는 식물이 있긴 합니다.] […?] [쇠비름이라고, 건조할 때는 밤에 광합성하고, 날이 좋으면 아침에 하는 지구 식물이 있습니다… 아, 때마침 이 풀도 쇠 씨네요. 우연인가?]쇠비름? 세계수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여명이 한마디 더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세요. 정말로 있는 식물이니까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사막이 아니고, 쇠미리도 타락한 게 아닙니다. 그냥, 운명이 정해준 길로 가지 않은 것뿐입니다.] [….] [하지만 또다시 운명을 선택해야 할 때… 예를 들어 엘프를 구해야 할 때라면, 언제든 그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제 좋을 때마다 광합성 방식을 바꾸는 쇠비름처럼?] [네. 그게 제가 받은 은혜에 대한 약속입니다.] […은혜라, 딸 도둑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로군.]세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멀어지기도 전에 발을 멈추더니, 희미해지는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만난 김에, 조언을 몇 가지 남기마.] [경청하겠습니다.] [모두를 위한 축제는 없는 법이니… 기억해라.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도 모두를 살릴 수 없는 법이다.]축제? 올림피아를 뜻하는 것일까? 여명이 그녀의 말을 기억하는 순간,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네 목에 건 그 끈… 영원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몸에 이상이 생길 거 같으면, 내 아이를 침실로 끌어 들이거라.] […?] [그 이후에는 네 진의대로 하라.]그것으로 끝이었다.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세계수는 빠르게 꿈속에서 사라졌다. 첫 만남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여명은…
[이거 어떻게 깨어나는 거지.]볼을 긁적였다. 그나마 용의 둥지에서 식사하는 세티 일행 덕분에 혼자가 아니란 점이 다행이었…
“…아, 여명 냄새 맡고 싶다.”
“성녀님, 제발….”
“뭐, 왜. 땀 냄새 좋잖아. 넌 싫어?”
“아니, 저는….”
“싫어?”
“….”
내가 없는 사이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여명은 꿈속에 쪼그려 앉아 성녀가 시작한 자신의 뒷담을 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