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1화(421/817)
***
새벽과 아침 사이 어딘가, 부지런한 새들과 사람들이 도시를 깨우는 시간.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흑인 남성이 아침이슬이 고인 벤치에 앉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FBI 요원, 존은 오랜만에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아카데미에서는 꺼내지 못한 낡은 지포 라이터의 불길이 햇빛 아래에서 춤을 췄다.
뻑뻑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 그의 눈동자에 비추는 시드니의 도로는 아직 한산했다.
아직은 사람보다 아침이슬이 더 많을 시간이었다. 씁, 너무 일찍 나왔나?
별 감흥 없이 시간을 축내는 그의 시야로, 청소부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늙은 청소부였는데, 줍고, 쓸고, 닦는 모습에서 묘한 경지가 느껴졌다.
자세 하나하나 절도가 있다고 해야 하나?
존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니코틴을 느끼며 조용히 청소부를 구경했다.
시간을 때울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 청소부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 덕분이었다.
그래, 다른 놈이 어지른 걸 치운다는 점에서 둘은 동종업계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청소부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묘한 동업자 정신 비슷한 것을 느끼며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다 피운 꽁초를 바닥에 버리는 대신, 굳이 쓰레기통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버렸다.
별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나, 그것을 본 청소부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왠지 오늘은 일이 잘 풀릴 것 같군.
존은 기분 좋게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곧장 팍 기분이 상해버렸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뚱뚱한 백인 놈이 바닥에 멋대로 술병을 버리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내저은 존은 그대로 남자에게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병을 주우며 말했다.
“이런 곳에 술병을 함부로 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
뚱뚱한 백인은 어떤 새끼가 시비를 거냐는 듯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존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층 더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존? FBI가 여기 왜 있어? 해외는 CIA가 관리하는 거 몰라?”
“손이 바쁘면 발이 와서 도와야지요. CIA는 모스크바 일 때문에 바빠서… 제가 오게 됐습니다. 알파 원.”
존이 고개를 숙이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뚱뚱한 백인, 알파 원이 콧방귀를 끼었다.
“바쁘긴 지랄. 괜히 처맞기 싫어서 널 보낸 거겠지.”
“…CIA가 처맞을 짓을 했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아카데미 교사가 내가 시드니에 온 걸 알고 있더군. 그것도 브라우닝의 이름을 팔아서… 누구 짓인지 뻔하지.”
“….”
그런 일이 있었나. 존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괜히 호주에 오겠다고 고집 부리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CIA는 내심 메이커님을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메이커는 무슨, 지랄하고 있네. 용섭이 턱주가리 박살 날 때까지 붉은 별의 소재 파악도 못 한 것들이….”
말끝을 흐리는 알파 원. 존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붉은 별에게 복수할 때까지 안 돌아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새끼, 너까지 그렇게 눈치 없이 굴래? 복수는 무슨 복수야? 내가 그렇게 분별없어 보이냐?”
예… 존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며 대답했다.
“전용섭 대행자님하고 친구 사이시잖습니까. 당연히 복수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용섭이가 죽었다면 그랬겠지.”
“….”
“근데, 현장에 가보니 알겠더군. 붉은 별은 딱 제압만 하는 수준에서 끝냈어.”
“그 빨갱이가… 대행자님을 봐준 겁니까?”
“내가 보기엔 그래. 죽일 기회가 있는데도 그냥 제압만 하고 떠났어. 당장 옆에 있던 CIA요원도 살려뒀고, 납치된 대행자도 뒤진 것 같지는 않고….”
말끝을 흐린 알파 원은 턱을 벅벅 긁었다.
“붉은 별 그 새끼, 사실 이름만 빨갱이 아닐까?”
“…주가시빌리를 그 정도로 쓰는데요?”
“아니 뭐, 소련이 망하고 회의감이 들었을 수도 있지.”
…나처럼.
존은 알파 원이 꺼내지 않은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모른 척 주제를 돌렸다.
“아, 맞다. 전윤성은 만나셨습니까?”
“그래, 마침 시드니에 왔길래 만났어. 재밌는 놈하고 어울리더군.”
“재밌는 놈이라면…?”
“그 왜, 있잖아. 윤성이 팔 자른 새끼.”
“아, 그놈이요?”
그는 곧바로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용병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전윤성과 함께 뉴스를 장식하고, 이번 초인 올림피아 예상 배당금 1위에 빛나는 녀석인데.
이름이…
“천여명. 만나보니 웃기는 새끼더군.”
“딱히 웃긴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니, 외모 말고 행동이 웃겼어. 나보고 대뜸 대련 좀 해달라던데?”
그건 미친 새끼 아닌가? 존은 고개를 저었다.
“…전윤성은 잘도 그런 녀석하고 어울릴 생각을 했군요.”
“사내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 주먹질하면서 친해지고, 총질하다가 친해지고….”
“저도 남자지만, 그런 감성 이해 못 하겠습니다.”
“그럼 고추 떼던가.”
“….”
할 말을 잃은 존은 고개를 저으며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빈 유리병을 버리며 주변을 둘러봤으나, 청소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남긴 건 깨끗해진 거리뿐이었다.
‘청소부는 그나마 결과가 눈에 보이기라도 하네.’
짧은 상념을 떠올린 존이 고개를 돌리자, 알파 원이 어딘가로 향하는 게 보였다.
저 인간이 그새를 못 참고… 존은 재빨리 알파 원의 뒤를 쫓았다.
“같이 가셔야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폐에 숨이 가득 찰 정도로 달리길 한참.
알파 원은 시드니 폐허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후우, 대체, 왜, 갑자기, 폐허에….”
존은 거친 호흡을 조절하며 물었다. 알파 원은 폐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존, 기왕 이렇게 만난 거, 뒤처리 좀 부탁하자.”
“뭐, 무슨, 후우… 뒤처리요?”
알파 원은 대답 대신 폐허를 향해 턱짓했다. 바로 어제 생긴 것처럼 생생한 구멍과 구덩이들이 가득한 폐허.
“아야톨라가 만든 폐허에서 뭘….”
잠깐, 어제 생긴 것처럼 생생한? 존은 눈에 마나를 집중하고 다시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이곳의 흔적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여기 있는 흔적 전부, 천여명이란 놈이랑 대련하고 남은 흔적입니까?”
“그래.”
“….”
학생과 알파 원이 대련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만한 흔적을 남겼다니.
존은 이마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건 못 숨깁니다… 주둔 중인 호주군도 봤을 거 아닙니까.”
“그쪽은 신경 쓸 거 없어. 성검이 입 다물게 해줄 테니.”
“성검이 왜요? 아니, 그래도 이만한 흔적을 숨기는 건….”
“누가 숨기래? 뒤처리하랬지.”
“예?”
직후, 알파 원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존은 그제야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깨닫고 기겁했다.
“대련 흔적을 지워서 어쩌시려고요?”
“녀석이 관심받는 시간을 늦출 거다.”
“…관심은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신성 아닙니까.”
“그딴 대중적인 관심 말고, CIA와 펜타곤의 관심 말이다. 적어도 올림피아 전까지는 나와 대련한 사실을 숨겨야 해.”
존은 농담인가 싶어 알파 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진심이었다. 그가 되물었다.
“…이유라도 알려주십쇼.”
“그 녀석, 실력이 윤성이 이상이었어. 심지어 혜성검과 주와이외즈를 동시에 쓰더군.”
“….”
“무슨 말인지 알겠지? 고작 그 나이에 그 실력이야. 그놈이 용사 핏줄이 아니라면, 성공한 철혈이 분명해.”
철혈의 아이들. 존은 그제야 알파 원의 속내를 간파했다.
“…녀석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실 생각이시군요. 예, 진짜가 있다면 대체품은 필요 없겠지요.”
부정도, 반박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알파 원은 조용히 눈에서 빔을 발사했다.
폐허는 빠르게 망가졌다. 붉은 빔에 닿는 콘크리트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조각난 돌들이 구덩이를 메운 덕분이었다.
잠시 후, 존은 한층 더 개판이 된 폐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서 본국으로 귀환하시죠. 뒤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존. 고맙다. 이 빚은 나중에 갚으마.”
알파 원은 그대로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쯤, 존은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뒤처리를 시작했다. 누가 쓰레기를 버렸는지 따지지 않고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와 마찬가지로.
***
비슷한 시각, 모스크바.
얼마 전 종말 교단의 소요 사태가 거짓말인 것처럼, 도시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특히 크렘린궁이 보이는 붉은 광장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있었는데, 휴대폰을 든 구경꾼들과 카메라를 설치한 기자들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듯 수많은 인파가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몇 년 만에 돌아온 초인 올림피아 신청 행사 때문이었다.
-마법 이론과 재현 분야는 2번 줄입니다! 반복합니다! 마법 이론과 재현은 2번 줄입니다!
-신청서 작성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우측 천막에서 작성 뒤에 줄 서주시기 바랍니다!
-모스크바 초인 교육원 출신들은 모두 이리로 모여라!
나라의 미래라 불리는 젊은 초인들과 그들을 이끌고 나온 현역 초인들. 그리고 그들을 구경하러 온 인파까지.
고작 신청서 작성에 이런 행사를 여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 행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련이 망하기 전, 스탈린이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신청서를 작성하며 결의를 다짐하던 전통을 지키는 거라나?
“꼴값 떨고 있네.”
우르르 몰리는 인파를 보며 파순은 혀를 찼다. 옆에 줄을 서 있던 다른 러시아 초인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노골적인 조롱.
“스탈린이 살아 있었으면 여기 줄 서 있는 새끼들 중 열에 아홉은 실력 부족으로 모가지 따였을 텐데.”
“…크흠.”
그녀의 조롱을 들은 누군가가 불쾌한듯 헛기침했지만, 파순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모스크바 초인 교육원 수준도 많이 떨어졌네. 대련 4강은커녕 16강에 들만한 놈도 안 보이네?”
“….”
“하긴, 그러니까 모스크바가 종말 교단 같은 등신들한테 털린 거겠지.”
그녀가 킥킥거리기 무섭게, 그녀의 앞줄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끼어들었다.
“거, 뭐 좀 알고 말하시지? 모스크바의 피해는 경미했소.”
파순은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성검이 아야톨라를 둘이나 상대해준 덕분이지. 한 놈만 왔어도 도시 전체가 개판 났을 텐데. 안 그래?”
그녀가 아픈 곳을 찌른 건지, 남자는 발끈했다.
“모스크바 초인군이 나섰다면 그깟 사교도 수장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소.”
“아, 그래? 근데 그걸 어떻게 믿나? 모스크바 초인군은 성검이 아야톨라 둘을 쓰러트리는 동안 병영에 처박혀서 딸딸이 치고 있었는데?”
“….”
“여기도 초인군 출신 있을 텐데… 영 안 보이네. 흠, 아야톨라가 왔을 때처럼 숨어서 그런가? 언제 은신술 전문으로 바꾼 거래?”
처음 끼어든 중년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초인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파순은 그중에서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꼽냐? 꼬우면 덤벼봐.”
이런 조롱을 그냥 넘어갈 러시아 남자는 없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웃통을 벗고 파순에게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주먹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데, 정작 파순은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코트 차림의 두 남자 덕분이었다.
독화와 이름 모를 누군가. 그들은 파순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사실, 덤벼드는 사람만 패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앞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두들겨 팼다.
인파가 가득한 줄 사이에서 주먹질이 오가니, 질서가 망가지는 건 필연이었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초인들이 중재하러 달려왔을 땐 이미 줄이 엉망이 되어있을 정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파순의 노림수였다.
그녀는 세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을 줄 맨 앞에 서서,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접수원과 마주했다.
“뭐해, 신청서 안 받아?”
“네? 예, 예 신청 받겠습니다. 용병 파순. 용병 인증은 스위스에서 받으신 거고… 나이 제한은 통과….”
그렇게 접수원이 그녀의 이름을 명단에 올린 직후, 파순이 서류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대리 신청은 불가능합….”
접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순의 뒤편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다란 코트를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빼빼 마른 남자.
조금 전까지 사람을 두들겨 팼다는 걸 증명하듯 그의 주먹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파순은 녀석의 허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신청자 왔네. 이러면 대리 신청 아니지?”
“예, 확인했습니다. 이분 성함은… 쇠똥구리? 저, 죄송하지만 가명은…”
“뭐, 씨발. 우리 엄마가 지어준 소중한 이름이거든? 쇠똥구리!”
“….”
뻔하디뻔한 억지. 접수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이 억지를 거절 할 수 없었다. 원칙은 멀고, 주먹은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저편에서 주먹질을 하고 있는 독화가 너무나 두려웠다.
등록해도 올림피아 측에서 알아서 컷 해주겠지.
결국,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파순과 쇠똥구리를 명부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