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2)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2화(422/817)
정의는 타락하고, 명예는 잊히며, 신념은 뒤틀린다.
하지만 돈은? 돈은 원래 더럽다.
[어째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냐는 질문에, 초대 FBI 국장의 대답.]***
점심시간, 성녀가 휴게실에 처박힌 여명을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점심 도시락도 아니오, 하다못해 성서도 아닌 한국의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여명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신문.
[용감한 학생들, 종말 교단의 꼬리를 밟다.]신문에는 담담한 제목과 달리 국뽕으로 가득 찬 끔찍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천여명 학생은 특유의 뛰어난 감각으로! 미국의 전윤성이 찾지 못한 교단의 음모를! 밝혀냈다!”
“….”
“호주 경찰은 그의 놀라운 실력에 감탄하며! 역시 한국인이란 말을…!”
저게 뭔가 싶어 지켜보던 여명은 성녀가 특유의 방정맞은 목소리로 기사를 낭독하자마자, 재빨리 신문을 빼앗았다.
기사에는 뛰어난 한민족 어쩌고, 전윤성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네 저쩌고 하는 내용이 줄줄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뭔 기사를 팩트가 아니라 상상으로 써놨어?”
여명은 황당하다는 듯 신문을 던져버렸다.
그러자 성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른 신문을 꺼냈다. 이번에는 제목부터 맛이 간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이미 올림피아는 끝났다… 천여명이 직접 나서자 생긴 일! 전윤성, ‘한국에 사과하고 싶어.’]이건 내용을 볼 것도 없었다.
여명이 또 신문을 빼앗아 반으로 찢어버리자, 성녀가 빵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그렇게 웃겨?”
여명이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히죽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당연히 웃기지. 너는 생각도 없는데, 한국 정부는 김칫국에 숭늉까지 먹고 있잖아.”
최근에 한국 음식을 먹여서 그런가, 비유가 참 한국적이었다.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며 대답했다.
“정부만 그런 건 아니지.”
“응?”
“일반 국민들… 그 사람들도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 그러니 이런 기사가 나오는 거겠지.”
모두 그가 의도한 바였으나, 현실로 마주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배신 당했을 때의 실망도 큰 법일 테니까.
그런 여명의 마음을 눈치챈 성녀는 흐응- 콧김을 내뱉었다.
“왜, 이런 걸 보니 복수심이 약해지는 거 같아?”
“아니, 그건 아니야.”
이름 모를 대중 때문에 복수를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조금 거슬릴 뿐.
그의 완고한 대답을 들은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세티의 복수도 복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나는 뭐가 되겠어.”
“너? 너는 왜.”
“나도 이미 날 믿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잖아.”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여명은 이어지는 성녀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지금도 성녀가 유니콘을 타고 다녀야 한다고 믿어.”
“….”
“복수가 끝나면 나도 데리고 도망치는 거, 잊지 마?”
장난스러운 말투, 가벼운 분위기. 여명은 그제야 성녀가 일부러 신문을 보여줬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라도 신문을 보고 그의 마음이 심란해질까, 미리 위로해줄 생각으로 온 것이리라.
겉은 저래도 속은 섬세한 여자라니까.
‘…아니면 그냥 땀 냄새를 맡으러 온 걸지도 모르고.’
여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녀에게 두 팔을 벌렸다.
“응? 뭐야?”
성녀는 처음에는 무슨 행동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여명이 말없이 손끝을 흔들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안겼다.
그녀의 몸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품을 파고드는 숨결은 따스했으며, 그의 등을 더듬는 손가락은 섬세했다.
다행히 냄새는 안 맡네. 땀 냄새가 아니라 그런가?
여명이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성녀와 손을 맞잡은 그 순간, 휴게실 문이 열렸다.
“어… 대낮부터 애틋하시군요.”
안으로 들어선 두 늙은이는 성기사 호아나 툴레와 마법학부장 가단이었다.
그의 품에 안긴 성녀를 본 가단이 ‘이런 맙소사’라며 기겁하는 사이, 호아나는 짧게 헛기침했다.
“크흠, 성녀님?”
성녀는 여명의 품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돌아가요, 호아나.”
“음, 하지만 성녀님 천여명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해야…”
“지금 여유 없으니까, 나중에 해요.”
“나중에? 언제요? 기왕 만난 김에 하는 게… 근데 왜 제가 잘못한 분위기인 겁니까? 성녀님,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이사기녹께 죄를 짓고 있잖아요.”
생명과 다산의 신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여명은 쓴웃음을 참아야 했다.
호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저는 적색의 레독스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성녀님, 죄송하지만 여명과 대화 좀 하겠습니다.”
“씨….”
투덜거리며 고개를 든 성녀는 뒤늦게 가단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정작 가단은 성녀의 몇 배는 더 놀란 표정이었지만 뭐… 아무튼.
호아나가 여명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흠, 천여명. 우리 둘이 같이 온 걸 보고 이미 눈치챘겠지만, 네 신명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왔단다.”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여명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성녀의 등을 두들기며 물었다.
“그래, 재밌는 발견을 하긴 했지. 근데… 확실한 건 아니야.”
“확실하지 않다?”
그러자 뒤에서 애써 성녀님을 외면하던 가단이 대답했다.
“저번에 추락하지 않은 신들도 적혀있었다는 거, 기억하느냐? 그런데 그 신들이 사실은 단 하나의 신을 가리키고 있더구나. 이집트의 태양신. 라, 케프리, 아툼.”
“….”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이집트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이집트의 대표 신들이었으니까.
떠오르는 태양, 여명의 신 케프리.
태양 그 자체의 신이자 정오의 태양을 상징하는 라.
그리고 저물어가는 태양의 신이자 창조의 신 아툼.
각자의 다른 이름과 상징을 지니고 있음에도, 세 신은 사실 하나의 존재였다.
모두 같은 태양신의 다른 면이자 삼위일체로서, 이집트 신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세 신이 너의 신명을 밝히는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뭐죠?”
“네 이름. 여명.”
“…?”
“한국어로 여명은 새벽에 뜨는 태양을 뜻하지? 그 이름과 때마침 책에 적힌 태양의 신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연구자로서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가단은 탁- 탁자에 손을 올리고 여명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여명! 나와 함께 이집트의 태양신 신전으로 가자꾸나! 절차는 걱정하지 말 거라. 내가 모든 권한을 사용해서 너를 보조 연구원으로 등록할 테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일 비행기를 띄울 수 있을 게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희미한 욕망의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연구자의 순수한 욕심.
아름다운 욕심이었으나, 여명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뭐? 어째서? 이집트 독재 정권 때문이냐? 괜찮다. 걔들은 돈만 주면 다 연구할 수 있게 해주… 아, 그렇군. 올림피아 때문인가?”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올림피아도 올림피아였지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가장 컸다.
천여명이란 이름은… 가명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아는 성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 자, 거절입니다. 이제 두 분 다 나가세요. 이집트는 무슨, 누굴 생과부로 만들려고.”
***
성녀의 축객령에도 호아나와 가단은 휴게실을 나서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가단과 달리, 호아나가 다른 수단을 내놓은 까닭이었다.
“음, 천여명? 꼭 이집트로 가야만 태양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방법도 있긴 해.”
“다른 방법이시라면?”
“우리보다 앞서 신화에 관해 연구한 사람의 연구기록을 찾아보는 거지.”
“논문이 아니라 연구기록이요? 하지만… 그런 연구는 이 상황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석적인 반박이었다.
차원문이 열리고 다섯 신의 실존이 증명된 이후, 단순히 신화를 해석하는 것과 마나를 통해 신의 여부를 따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이슬람의 사제들이 신성과 신의 실존 논쟁으로 세 차례의 내전을 벌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아무튼, 호아나는 그런 반박을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현대적인 마나와 신성을 기준으로 이집트 신화에 관해 연구한 기록이 있어.”
“처음부터 그것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그때, 성녀가 끼어들었다.
여명도 똑같은 의문을 품은 채 호아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미소였다.
“성녀님, 그 기록이… 조금 구하기 어려운 곳에 있습니다.”
“어디요? 뭐, 시베리아 연구소에 숨겨져 있나?”
“차라리 그런 거라면 제가 직접 가서 챙겨왔을 겁니다. 하지만 이집트 신 연구기록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금고에 있습니다. 성녀님도 잘 아시는 곳입니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보니 불길함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성녀가 물었다.
“저도 아는 곳이요?”
“예, 오대 신전 깊은 곳, 성물의 방에 있습니다.”
“…?”
성물의 방? 여명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다섯 신 교단의 가장 귀중한 유물만을 모아놓은 방.
다섯 신이 최초로 이 땅에 내린 성물과 총대주교의 황금 수의가 있다고 알려진 곳인데…
일개 연구기록이 왜 그런 곳에?
의아해진 여명은 슬쩍 성녀를 확인했다. 그녀도 딱히 이유를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썼길래 일개 연구기록이 그런 곳에 있어요? 총대주교? 아니면 마달 추기경?”
호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조심스레 말했다.
“…전대 성녀님께서 남기신 기록입니다.”
“….”
“그분의 유품 중 하나였죠. 제가 직접 성물지기에게 전해줬습니다.”
성녀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입술을 쓸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여명이 물었다.
“가지고 나오기 어려운 겁니까?”
“어려운 정도가 아니야. 그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딱 네 명밖에 없으니까. 총대주교, 성물지기인 우리 아빠, 성검 그리고… 나.”
“….”
여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타고난 성품은 그녀가 귀하신 분이라는 걸 종종 잊게 했다.
슥슥, 성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다시 호아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가지고 나올 방법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꺼내신 거겠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물지기에게 부탁이라도 할까요?”
“아니, 성물지기는 징계 중이라서 도와주는 건 무리야.”
“….”
징계받는 중이셨구나… 여명이 장인어른을 떠올리는 사이, 호아나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말한 방법은 성물지기를 끌어들이는 것 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다. 이집트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지. 당장 내일 출발하면 올림피아 예선 시작 전에 끝낼 수 있을 거야.”
“…딱히 안전한 방법은 아니군요?”
여명이 아픈 곳을 찌른 걸까, 호아나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뭐… 성녀님은 몰라도 너한테는 그다지 안전한 방법은 아니지.”
“뭡니까?”
“차원문을 타고 성도로 날아가서… 성물의 방을 터는 거지.”
“…?”
여명과 성녀의 머리 위로 동시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가운데, 호아나가 덧붙였다.
“사실, 내가 도와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그 멍청한 성물지기도 성공한 일이니까.”
성녀가 물었다.
“…그러다 걸리면요?”
“어… 지하 감옥에 갇히겠지요. 그래도 제가 직접 변호하면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올림피아에 늦는 일도 없을 거구요.”
“호아나가 죄를 뒤집어쓰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제가 시킨 게 맞으니, 딱히 죄를 뒤집어쓰는 건 아니죠. 그리고 천여명 군도 채찍질 정도는 당할 겁니다.”
채찍질 당하는 성물지기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여명은 손을 들고 물었다.
“저, 호아나, 계획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제가 성녀와 연인 사이라는 걸 들키면….”
“유니콘의 뿔 테스트를 통과하면 팔다리가 잘릴 거고, 실패하면 백 퍼센트 죽겠지.”
“….”
즉답이었다. 여명이 말문을 열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그것도 수많은 신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서.”
“….”
농담인가 싶어 호아나의 얼굴을 확인했으나, 그녀는 진심이었다.
흡사, ‘성녀를 품으면서 그런 각오도 없었느냐’는 듯한 눈빛. 여명은 품에서 느껴지는 성녀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 이 방법뿐이라면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여명이 호아나에게 대답하려는 데, 익숙한 노인의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뭐 저런 정신 나간 계획이 다 있어?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마하간?’
성녀와 여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마탑주의 유령은 두 사람과 번갈아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성녀의 연구기록이라고 했지? 내게 더 좋은 계획이 있으니, 지금은 거절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