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3화(423/817)
***
호아나와 가단이 떠난 휴게실.
마하간은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보며 궁시렁거렸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렇지, 성기사가 맛이 갔군. 성물의 방을 털어? 농담으로라도 할 말이 아니거늘.]성녀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여명이 물었다.
“그렇게나 이상한 제안입니까?”
[이상하다는 말이 부족한 수준이지. 다른 곳도 아니고 오대 신전이다. 그 신성한 공간을 어찌…]쯧쯧, 그는 혀를 찬 뒤 덧붙였다.
[내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그 정도인가?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만나본 성기사들은 모두 철저한 신앙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호아나와 바라나, 그리고 성물지기까지.
심지어 그 중 바라나는 마하간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인물일 텐데, 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지?
그가 의문을 삼키는 순간, 성녀가 입을 열었다.
“호아나의 신앙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녀가 저런 말을 꺼낸 건 그냥… 마하간이 살아 있던 시절과 분위기가 달라서 그래요.”
[분위기라. 이게 분위기로 설명되는 일인가? 지금이나 그때나 성기사단은 교단의 검일 텐데.]“예, 그들은 여전히 교단의 검이죠. 사제들이 여전히 교단의 머리를 자처하는 것처럼.”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애꿎은 여명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죠. 변경백령 전쟁에서 비롯된 문제.”
변경백령 전쟁이 언급되자마자, 마하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묘한 침묵.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여명은 그 침묵 속에 담긴 행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성녀와 성기사단은 변경백령 전쟁에 참전했다.
이제 막 지구에 교세를 퍼트리던 사제단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무단 참전이었으니까.
성녀의 권위를 존중한 사제단은 처음에는 방관했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태도를 바꿨다.
진짜로 선교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 지구 정부들과 정치적 거래를 했을 수도 있고…
이유가 무엇이건, 사제들은 전대 성녀님과 성기사들에게 강제 귀환 명령을 내렸다.
신의 이름을 빌린 명령을 거절하지 못한 성기사단은 결국, 전우들을 내버려 두고 전쟁터에서 후퇴해야 했다.
그 후퇴가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변경백은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법.
패전 이후 사제단은 보란 듯 전대 성녀를 성도에 감금했다.
겉으로야 보안 문제를 운운했지만, 누가 봐도 전쟁에 뛰어든 전대 성녀님을 향한 처벌이었다.
교단의 머리가 스스로 성녀를 벌한 것이다.
투쟁의 적색 신을 섬기는 성기사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뻔했다.
-검 주제에 머리를 거스르지 말라.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여명은 바라나와 호아나가 현재 성녀에게 그렇게나 극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도에 거짓 보고를 하는 것도 모자라, 네크로맨서의 책을 해독하는 것을 돕고, 심지어 성지를 털자고 제안할 수 있는 이유.
그들은 현재의 성녀를 통해 과거의 성녀님에게 속죄하고 있는 것이다.
성기사들을 대신해 벌을 받고, 그 대가로 사랑을 잃은 성녀님을 향한 속죄.
그리고 속죄란, 그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인 건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간 여명은 성녀를 바라봤다. 새삼스럽지만, 그녀의 행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걸려있는지 깨달았으므로.
그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직후, 마하간이 입을 열어 침묵을 밀어냈다.
[내가 실언했군.]“알면 됐어요.”
[….]마하간은 뚱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년 말하는 것 좀 보게’라는 감정이 담긴 눈빛.
물론, 성녀는 무시로 일관했다. 괜히 무안해진 여명은 헛기침과 함께 주제를 돌렸다.
“흠, 어르신? 이제 방법을 말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아, 그래 맞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마하간은 손가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전대 성녀의 연구기록이라면 굳이 성도까지 갈 필요 없다. 나한테 사본이 있거든.]“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건가? 여명은 눈을 빛냈다.
“그러면 사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하간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 마탑에 있다.]“….”
마탑? 기껏해야 아카데미 비밀의 방 같은 걸 떠올리고 있던 여명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마하간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오해는 말거라. 무슨 금고나 이런 곳이 아니라 마탑 공개 도서관에 있으니까. 내가 기부했으니 확실해.]“…기부하셨다고요? 성녀님의 연구기록을요?”
[논문도 아니고 개인 연구기록은 별로 도움이 안 돼서… 씁, 계속 그런 눈으로 볼 거냐? 성물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미친 짓거리보다 수백 배는 쉬운 일이란 말이다!]그의 눈빛을 버티지 못한 유령이 버럭 언성을 높이기 무섭게, 성녀가 킥킥 웃었다.
“그건 그렇죠.”
[그래, 그렇다니까?]“근데, 책도 아니고 연구기록을 마탑 도서관에서 찾으려면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건 어떻게 해요?”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내가 떠먹여 주리?]마하간이 투덜거렸으나, 어르신의 꼬장에 익숙한 여명은 웃으며 넘겼다. 무엇보다 진짜 도움이 되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생각보다 훨씬 쉬워지겠네요.”
[흠, 어르신 소리 한 번 듣기 어렵구만… 아무튼, 마탑은 언제, 어떻게 갈 생각이냐?]뭔가 더 조언해주려는 듯 고개를 내미는 마하간. 여명은 품에 안긴 성녀를 무릎 위에 앉히며 대답했다.
“예? 제가요? 왜요?”
[…?]“마탑은 마탑 출신이 가야죠.”
***
몇 시간 후, 용의 둥지로 이어지는 하수도.
둥지로 향하는 그릇, 살로메 두메아의 걸음은 평소와 달리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바로 조금 전, 성녀에게서 온 문자 덕분이었다.
현시대의 용사가 그녀에게 직접 맡길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나?
‘아주 중요한 일이라니.’
드디어 그녀가 파티에서 인정받는 걸까? 하긴, 이제 그럴 때도 됐다.
그동안 챙겨 먹은 영약이 얼마고, 인내한 고통이 얼만데.
게다가 전대 마탑주에게 빙의 당하는 무시무시한 수련을 거친 그녀의 실력 상승은 일취월장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지금의 그녀가 한 달 전 자신과 싸우면 10초 내로 쓰러트릴 수 있을 수준.
이만하면 용사와의 격차도 충분히 줄어들었을 테고, 파티원으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녀는 이제 어엿한 용사 파티가 되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는 행복한 상상과 둥지로 들어섰다.
들어섰는데…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용사와 격차가 줄어들어?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용사는 그녀가 강해진 것만큼이나 더 강해져 있었다.
마치 마탑의 스승이 떠오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마나가 느껴질 정도.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용사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그녀의 기대를 한 번 더 박살 냈다.
“…마탑에서 종이 뭉치를 가져오라고요?”
“종이 뭉치가 아니라 연구기록….”
“그게 그거죠! 정식도 논문도 아닌, 도서관에 처박힌 종이 뭉치! 내가 무슨 봉도 아니고, 그딴 간단한 심부름은 다른 사람 시켜요!”
그릇은 억울한 마음에 빽 소리 질렀다. 다행히 ‘내 마음도 몰라주고’ 같은 멍청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성녀와 엘프, 그리고 세티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본 덕분이었다.
특히 커다란 햄을 썰고 있는 세티의 식칼이 그녀의 이성을 강하게 붙잡아 줬다.
…뭐, 아무튼.
여명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일 아니야. 내게는 정말, 정말로 중요한 일이야.”
“….”
“정말 안 될까?”
커다란 냄비 앞에서 부대찌개인가 뭔가 하는 요리를 준비하며 하는 말치고는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 묘하게 자존감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한 번만 더 부탁하게 내버려 둬 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그릇이 튕기려는 찰나, 지켜보던 용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우리 주방장께서 요리하는데 자꾸 지랄할래?]“….”
[라면도 못 끓이는 년이.]이 파충류가 미쳤나. 그릇은 황당한 얼굴로 용을 바라봤다.
물론, 반박은 못 했다. 라면을 끓이는 데 실패해서 커다란 냄비 하나를 통째로 버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릇은 라날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화답한 뒤 여명을 향해 말했다.
“마탑 도서관에서 종이뭉… 아니, 연구기록을 챙겨오는 건 어렵지 않아요. 마탑에 가면 챙겨올게요.”
“고마워, 그러면 마탑에는 언제 가?”
“글쎄요, 빨라도 방학 이후?”
“…그보다 빨리는 힘들까?”
“어, 그게… 올림피아 전에 마탑에서 오라는 말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그릇. 여명은 육수에 양념장을 풀며 물었다.
“그런데?”
“…거절했어요. 당신, 혹은 홍세티를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그릇은 입을 다물었다.
마탑의 노예 신세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이런 명령이 떨어진 이유를 밝히는 게 부끄러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여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네?”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며? 그러면 같이 가면 되지.”
너무나 쿨한 태도에 그릇이 역으로 당황했다.
“좋은 의도로 부르는 건 아닐 텐데…?”
“뭐, 나도 좋은 의도로 가는 거 아니잖아.”
“….”
그건 그렇네. 그릇이 무어라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이, 용이 끼어들었다.
[안 돼! 마탑에 가겠다고? 한참이나 걸리는 거리잖아!]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안 걸려, 비행기 타고 가장 가까운 개성 차원문으로 넘어가서, 기차를 타면… 이 삼일 정도면 충분할걸?”
[왕복으로 일주일? 안 돼! 일주일 동안 나보고 홍세티가 끓이는 라면만 먹으라니!]“….”
[저 아귀년만 남겨놓고 갈 거면 차라리 나를 죽….]그때, 세티가 햄을 썰던 칼을 멈췄다. 라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여명 뒤에 숨었다. 커다란 덩치로 도망치는 모습이 여러모로 우스꽝스러웠다.
웃음을 참은 여명은 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떠난다고 하면 세티도 같이 갈 거니까. 그리고… 네가 변신술을 익혔으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아쉽네.”
[뭐…?]“변신술을 익혔으면 여길 나가서 우리랑 같이 가서 식도락 여행도 하고, 뭐 그랬을 거라고.”
[….]“근데 아직도 변신 못 하잖아? 진심으로 안타깝다.”
여명이 미소와 함께 쐐기를 박자, 라날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튼, 그렇게 용의 입을 막아버린 직후 세티가 말했다.
“…정말로 갈 거야? 다녀오면 올림피아 예선전이 아슬아슬할 텐데.”
“다음 주까지 다녀오는 건 문제 없을 거야. 아마도.”
“….”
“연구기록 하나 빌려 오는 데, 뭐가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기겠어?”
“…생길걸.”
지나가듯 덧붙이는 성녀의 한마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여명은 볼을 긁으며 다른 진실을 꺼냈다.
“사실, 몸 상태가 아슬아슬해. 최대한 빨리 신명을 찾아야 할 것 같아.”
“….”
여명의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릇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움찔 손을 멈췄다.
특히 세티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와 몸을 확인했다.
“뭔가 이상이 생긴 거야? 아픈 곳은?”
“아니, 딱히 아픈 곳은 없는데… 경고를 받았어. 이 이상 뭔가를 더 익히거나 내버려 두면 위험해질 거래.”
“….”
그녀는 누구에게 어떤 경고를 받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가자, 마탑. 대신…”
“대신?”
“떠나기 전에… 아니, 오늘 밥 먹고 하나만 확인하자.”
“확인? 뭘?”
눈썹을 들어 올리는 여명을 향해, 세티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우리 네 명이랑 너 한 명. 사 대 일로 결투.”
“….”
“우리가 아직도 네 발목을 잡을 수준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