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5화(425/817)
***
용사 파티가 탐욕스러운 용에게 부대찌개의 복수를 한 직후.
일행은 ‘누가 여명과 함께 마탑에 가느냐’ 보다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마탑으로 가려면 개성 차원문-승만 시티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
‘이 시국에 한국행이라.’
성녀는 며칠 늦어도 속 편하게 LA-제미니 시티를 경유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행을 피하려고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LA로 가건, 개성으로 가건, 정체를 숨겨야 하는 건 똑같았으므로.
그제야 일행들은 유명세의 부작용을 깨달았다.
여명 본인은 물론이고 일행 중 누구라도 그릇과 함께 아카데미를 떠나는 순간, 자연스레 기사가 따라오리라.
그것도 ‘그릇과 함께 마탑으로 향하는 천여명! 마탑을 뒤흔든 k-히어로!’ 같은 기사 말이다.
아침에 본 기사를 떠올린 성녀가 키득거리며 일행들에게 인터넷 신문을 보여주는 것 말고 딱히 다른 반론은 없었다.
같은 의미에서 명확한 해답 또한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내일까지 각자 방법을 생각해 보자’는 의견을 끝으로 일행은 해산했다.
일행들은 나름대로 고민을 품은 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그러나 홀로 남자 기숙사로 돌아온 여명은 정작 별다른 걱정 없이 침대에 누웠다.
교장에게 부탁하면 적당히 방법을 만들어줄 거란 얄팍한 기대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남부 마경으로 날아간 경험 덕분이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갑자기 차원문 너머로 갔을 때도 잘만 실종을 숨겼는데, 직접 가는 것 하나 못 숨길까.
게다가 지금은 올림피아 직전이었다.
수련을 이유로 이리저리 바쁜 학생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 아닌가. 여명처럼 대외적으로 양아치로 찍힌 학생이 며칠 수업 좀 빼먹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는 그때, 갑자기 마하간이 그를 불렀다.
[용사.]“…?”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던 여명은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늙은 유령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뭐, 내가 놀러 왔겠나? 당연히 할 말이 있어서 왔지.]‘….’
여명은 슬쩍 고개를 들어 작가, 바오닉을 확인했다.
운명의 구슬을 가진 그가 혹시라도 마하간의 목소리를 엿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으나, 다행히 녀석은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꼼꼼히 녀석을 확인한 여명이 물었다.
“갑자기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아까 다른 파티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좀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길기도 하고.]“…짧게, 요약만 부탁드립니다.”
[이놈아, 이제와서 졸린 척해도 소용없다. 조금 전까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고민하고 있던 거 다 봤다.]“….”
크흠, 여명이 헛기침하는 사이 마하간은 허공에서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우선… 홍세티, 그 아이에 대한 것부터 말해보자꾸나.]“세티에 대해서요? 세티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명이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자, 마하간이 손을 저었다.
[문제는 무슨, 그 아이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다.]“아.”
세티의 재능.
그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좌절과 열등감의 근원이었고.
한국 정부의 기준치를 만족하지 못한 그녀를 평생 따라다닌 낙인이었다.
설마 마하간도 그녀의 재능 부족에 질려버린 것일까?
지레짐작한 여명이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는 순간, 마하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녀의 재능은… 초대 용사의 그것과 닮았다.]“…네?”
[반응을 보니 너도 몰랐나 보군. 현시대의 용사여, 그녀는 무술과 마법, 그리고 신성까지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올마스터… 초대 용사가 가진 재능이지 뭐, 어째서인지 마법은 재능만 느껴지고 영 쓰질 못하지만.]“….”
[표정을 보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당장 변경백부터 평생 무술밖에 못 썼다. 너도 무술과 마법만 쓸 수 있고… 사실 초대 용사 이후 모든 대부분의 용사들이 그러했어.]거기까지 말한 마하간은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여명에게 고개를 내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그녀 또한 초대 용사의 피를 이은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혈통일 가능성이 높겠지.]여명은 마하간의 통찰력에 놀라는 동시에, 안도했다. 재능 때문에 세티가 좌절할 만한 일은 없겠구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마하간에게 정답을 알려줬다.
“어르신의 생각이 맞습니다. 세티는… 소위 인공 용사 프로젝트라는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인공 용사?]여명은 은밀한 부분을 제외한 그가 아는 사실 대부분을 마하간에게 설명해줬다.
철혈의 아이들 계획을 비롯해 지구의 욕심이 낳은 인공 혈통의 비극. 그건 기숙사 창밖의 달빛조차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릴 이야기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기나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마하간이 보여준 반응은 예상보다 덤덤했다.
[흥미롭고, 역겹군. 지구인들이 왜 나치를 욕했는지 모를 정도야.]“어… 하실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뭐, 이 이상 무슨 반응을 보이겠나? 내 예상이 맞은 건 즐거운 일이지만, 결국 난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기껏 만든 인공 용사들이 진짜만 못하다는 건 자네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진짜만 못하다라. 여명은 겸손이 아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나중에는 저보다 강한 인공 용사가 나와서 10강의 정상을 차지할지.”
[그래, 자네 머리 위로 핵이 떨어지면 그럴지도 모르… 아니, 전대 용사인 변경백이 핵을 처맞고도 오랫동안 10강 1위를 지켜 온 걸 보면,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군.]“…과장이 심하십니다.”
[과장은 무슨… 겸손이 과하면 모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있으면 그만큼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뭐, 이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네. 나는 자네랑 세티가 근친이면 어쩌나 걱정해서 꺼낸 이야기거든.]“근… 뭐요?”
[용사 혈통끼리 결혼하면 그게 근친이지. 근데 인공 혈통이면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굳이 인공 용사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근친 때문이라니. 여명은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어이없어 해야 할지 고민했다.
뭐, 어쨌거나 마하간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여명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네가 마탑에 가면… 내 제자에게 말 하나 전해주겠나?]“제자요?”
[그래, 날 암살한 병신 같은 제자 놈 말이야.]“…???”
암살한 제자에게 말을 전해 달라니, 뭔 소리람? 여명이 눈을 깜빡이자, 마하간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마탑주도 제대로 못 하고 지금 뭐 하는 지 모르겠지만, 아마 죽지는 않았을 게야. 걔는 죽기엔 너무 멍청하거든.]그 순간, 그의 눈동자 위로 달빛이 겹쳤다.
반투명한 마법사의 눈은 천상의 그것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허무하게 반짝였다.
[녀석을 만나면 이렇게 전해주게. 널 이해한단다. 고생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릇을 따라 몰래 마탑에 다녀올 건데, 좀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카데미 총관리자인 교장에게 할만한 부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명은 뻔뻔스럽게도 교장에게 직접 그것을 요구했다. 여차하면 퀴니의 마총과 유산을 운운할 생각이었는데…
-그래, 잘 다녀와.
의외로 교장은 손쉽게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조금 무안해진 여명이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갈 거니? 몰래 나가게 하느니, 차라리 나를 거쳐서 나가는 게 낫지.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여명은 감사를 담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피곤에 절은 교장은 그의 인사를 손짓만으로 휘휘 넘겨버린 뒤, 그릇의 외출증을 비롯한 기타 서류들을 챙겨줬다.
괜히 일을 늘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필요한 서류를 챙긴 여명은 일행들이 모여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교장이 뭐래? 도와준데?”
낡은 휴게실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성녀가 물었다.
여명은 교장이 준 각종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티가 서류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는 사이, 쇠미리가 음료를 따라주며 말했다.
“누가 여명하고 같이 갈지 정했어요.”
“어, 벌써?”
“왜요, 콕 집어서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여명은 슬쩍 세티의 눈치를 살폈다. 순식간에 서류를 체크한 그녀는 특유의 푸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티가 말했다.
“마탑은 나랑 너, 그리고 그릇 이렇게 셋이서 갈 거야. 성녀는 너무 눈에 띄고, 쇠미리는 남아서 환상 마법을 써주는 게 나으니까.”
“그래?”
세티랑 가게 되는구나. 오랜만에 단둘이 될 생각에 여명이 미소 짓자, 그녀가 덧붙였다.
“아, 그래도 한국까지는 다 같이 갈 거야. 물론, 피눈물의 환상으로 변장한 뒤에.”
“…응? 다 같이?”
“응. 여기 있는 인원 전부. 물론, 인천까지만 같이 갈 거야. 이 기회에 장만 어르신도 뵙고… 성묘도 해야지.”
성묘. 그건 청소부들의 묘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여명은 입술에 힘을 줬다.
놀라움과 고마움, 그리고 슬픔.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자, 이번에는 성녀가 끼어들었다.
“작업반장님이 검은 모르닥님의 신도셨다며? 정식 장례는 복수가 끝난 뒤에 하더라도, 내가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게.”
“….”
“저번에 기사단 데스나이트 때 봤잖아? 장례 기도는 나한테 맡겨둬.”
가벼움 아래 배려심이 담긴 말. 여명은 옆구리를 쿡쿡 지르는 성녀의 손가락을 느끼며 웃었다.
“…고마워.”
“고마우면 몸으로 갚아.”
“….”
감동이 썰물처럼 사라진 여명이 성녀의 볼을 꾹 누르길 잠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쇠미리가 갑자기 상자를 꺼내 여명에게 내밀었다.
농구공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상자는 마도인 듯 마법이 걸려있었는데, 뭐가 든 건지 묘하게 묵직했다.
“뭐야 이건?”
“여명이 한국에 돌아갈 때 주려고 아껴뒀던 선물이요.”
쇠미리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선물? 갑자기 뭔가 싶어 슬쩍 상자를 열어본 여명은 내용물을 반쯤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뚜껑을 닫았다.
“너, 이거 어디서…?”
눈이 커진 여명을 향해 쇠미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명과 세티가 차원문 너머로 날아갔을 때, 뒷정리를 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
“몸뚱이는 한국 정부가 가져갔지만, 머리는 제가 챙겼죠.”
몸뚱이는 한국 정부가- 그 말을 듣고 상자 안에 든 물건이 뭔지 예상한 성녀와 달리, 그릇과 세티는 관심을 보였다.
“뭔데?”
“어… 밥 먹기 전에 보기엔 안 좋은 거?”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여명과 달리, 쇠미리는 그냥 직구로 꽂아버렸다.
“플레이어의 잘린 머리요. 제가 방부 마법이 걸린 상자에 담아 뒀어요.”
“….”
“성묘 선물로 이만한 게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