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7)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7화(427/817)
***
태양이 바다와 맞닿는 시간.
그릇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잠자리 탓인지, 묘하게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 눈을 비비자, 텁텁한 원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기숙사 방보다도 작은 곳.
덕배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쓰던 방이라는데, 특이한 점도 감흥을 느낄 점도 없었다.
그냥 이런 방에서도 잘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정도?
그녀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세안을 끝낸 뒤 잠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방에 앉았다.
먼저 방에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은 까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명과 나머지 일행 셋이 다 한방에서 자지 않았나.
그 좁은 방에 남녀가 함께 자면서 뭘 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입이 열리지 않는 그릇은 만에 하나라도 지저분한 꼴을 보면 어쩌나 싶어 가만히 부름을 기다렸다.
물론, 가만히 앉아있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괜히 심심해진 그녀는 방을 뒤적거렸다. 장롱을 열어보기도 하고, 만화책들과 잡지로 가득한 책장을 살펴보기도 하고…
“응?”
그러다 문뜩, [멍청이도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 책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이건….”
낡은 필름 사진은 특이했다.
가족사진이라기엔 순 남자만 있고 다른 사진이라기엔 너무나 가족 같아 보이는 그런 사진.
이건 또 뭐람. 사진을 다시 책에 꽂으려던 그릇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사진에서 가장 작은 꼬맹이가 너무 익숙한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
지금과 너무 달라서 미처 몰랐는데, 이건 천여명이 틀림없었다!
그의 옛날 사진이라니.
옛날에는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사진을 들었다.
용병 출신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릴 적에는 그보다 더한 밑바닥 노동자들과 함께 자란 듯했다.
하긴, 그러니까 귀하게 자란 다른 학생들과 달리 요리도 잘하고 의지도 독한 거겠지.
밑바닥 출신 용사라… 그림 좋네. 억지로 만들어진 인공 혈통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릇은 사진을 챙겼다.
성녀나 쇠미리, 하다못해 여명 본인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 좋아할 거란 생각이었…
그때, 성녀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국밥 먹으러 가자! 국밥!!
깜짝 놀란 그릇은 그제야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좁디 좁은 숙소 계단에는 나갈 준비를 끝낸 일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직후, 그녀를 발견한 성녀가 손을 흔들었다.
“살로메도 벌써 준비 끝냈네? 그럼 기다릴 거 없이 바로 가자.”
어젯밤에 한 말이 진심이었나? 이제는 익숙해진 성녀의 푼수 짓을 보며 계단을 내려가자 빌라 입구에 차를 대놓은 장만과 여명이 보였다.
일행을 본 여명이 물었다.
“모두, 잘 잤어?”
쇠미리와 세티가 너도 잘 잤느니 생각보다 괜찮았느니 같은 대답을 주고 받는 가운데, 그릇은 눈을 가늘게 떴다.
멀쩡하다 못해 푹 잔 것 같은 일행들과 달리, 여명은 묘하게 피곤해 보인 까닭이었다.
새벽에 깬 건 아닐 테고… 역시, 방음 마법을 펼치고 잔 건 정답이었나.
뭐, 아무튼. 환상을 뒤집어쓴 일행은 그대로 장만의 승합차를 타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출근하는 차로 바글거리는 인천의 도로를 가로 지르며 얼마나 갔을까? 이윽고 일행은 국밥집에 도착했다.
어젯밤과 달리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국밥집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동시에 묵직한 고기 냄새가 났다.
예전에 그릇이었다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냄새였으나, 그동안 여명에게 이것저것 얻어먹으며 조련된 그녀는 별문제 없이 국밥집 냄새에 적응했다.
입에 침이 고이는 건 덤이었고.
“어이고, 노인네 뭔 사람들을 이리 데리고 왔데요? 가족들이여?”
그사이 국밥집 아줌마가 장만 어르신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족으로 보이나? 그럼 가족이라고 하지 뭐.”
“뭐라는 거여? 가족이면 가족이고 아니면 아니지. 천 반장 그 양반 실종된 뒤로 영 이상해지셨어. 아무튼, 모듬 국밥 여섯 개 내올 테니 그리 아쇼.”
그렇게 말한 국밥집 아줌마는 그대로 주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을 본 여명은 변하지 않으셨다며 웃고, 성녀가 눈을 빛내며, 일행들이 각자 수저와 젓가락을 챙기며 식사 준비하길 잠시.
국밥집 구석에 걸린 TV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최근 천여명 학생을 향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선명한 교복 차림의 천여명.
[그의 올림피아 신청서에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히메나 교장이 직접 그의 신청서에….]신나서 여명의 일상을 보도하는 아침 TV쇼 앵커와 오오- 어색한 찬사를 반복하는 효과음이 이어지자, 일행이 동시에 여명을 바라봤다.
부끄러운 듯 시선을 외면한 그는 애꿎은 깍두기를 아그작 씹었다.
그 모습에서 어떤 희극적 재미를 느낀 그릇이 피식 웃는 사이, 국밥 카트를 끌고 온 아줌마가 TV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저 천여명이란 학생… 아무리 봐도 쇠똥구리랑 판박 아니여요? 눈까리 색부터가 아주 똑같단 말이지.”
“….”
쇠똥구리. 그 이름을 들은 여명이 작게 움찔했다.
그러건 말건, 국밥집 아줌마는 뜨거운 뚝배기를 턱턱 상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 혹시나해서 말하는데, 이 이야기 어디 가서 하지 마쇼.”
장만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받았다.
“…그 이야기는 자네가 하고 있는데.”
“아이, 나야 어르신 앞이니까 하는 거 아뇨. 내가 괜히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니 글쎄, 몇 달 전에 쇠똥구리를 찾으러 온 놈들이 있었어요.”
“…찾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천여명과 닮았다고 말했나?”
“묻는 놈이 영 이상하기도 하고, 나야 천 반장님이 우리 가게 매출 올려준 의리가 있응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죠.”
“….”
“그르니께, 어르신도 조심하라, 이 말이요. 혹시라도 진짜 쇠똥구리면… 괜히 알려질 거 있으요? 천 반장 바람대로 훨훨 날아가면 좋지.”
국밥집 아줌마는 나름대로 작게 말했으나, 여명 일행 모두 마나를 모아 청각을 강화할 수 있었다.
여명이 울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뚝배기에 고개를 파묻는 가운데, 국밥집 아줌마는 한 번 더 장만 어르신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떠났다.
상에 둘러앉은 모두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오직 그릇만은 다른 걸 생각했다.
쇠똥구리, 천여명, 한국, 가짜, 복수, 운명…
생각을 이어가던 그릇은 곧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쇠똥구리가 천여명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용사에게 꽤나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사진이 그것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이며, 이 사진을 대가로 여명에게 뭔가를 뜯어낼 수 있을 거란 얄팍한 계산까지.
‘…미쳤나?’
그녀는 이런 생각부터 떠올리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를 믿고 이끌어준 파티원에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이건 그녀를 만들어낸 마탑의 스승들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아니, 믿음을 배신한다는 점에서 더 역겨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릇은 곧장 사진을 꺼내 여명에게 건네려 했…
그때, 성녀가 그녀의 뚝배기에 김칫국물을 부었다.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
“….”
“후추도 뿌려줄까?”
그녀의 뚝배기를 휘휘 젓는 성녀의 숟가락.
그것을 본 그릇은 조금 전까지 머리를 채우고 있던 고민을 싹 잊은 채 쌍욕을 날렸다.
“야 이 미친년아.”
***
기분 좋게 식사를 끝낸 일행은 바로 개성으로 가지 않았다.
여명이 마지막으로 들릴 곳이 한 곳 더 있는 까닭이었다.
청소부들의 무덤.
장소는 멀지 않았다. 한국 정부에서 운영하던 시체 창고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 중턱,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그 산에 아홉 개의 무덤이 있었다.
차를 타고 산에 도착한 일행은 장만이 준비한 술을 챙겨 바로 무덤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는 여명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직 그의 복수가 끝나지 않은 까닭이요. 가족을 잃은 슬픔에는 치료제가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가 무덤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아홉 개의 무덤 앞에는 최근, 어쩌면 바로 어제 놓은 것 같은 생생한 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으니까.
놀란 여명이 장만에게 물었다.
“…어르신이 가져다 놓으신 겁니까?”
장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기껏해야 무연고지 묘를 철거 못 하게 산지기들에게 돈 좀 쥐어 준 게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큰 은혜였으나, 의문은 더 커졌다. 누가 무슨 의도로 꽃을 놓고 간 걸까.
‘설마, 누님이…?’
여명은 곧장 의혹을 날렸다. 그녀는 유품을 찾기 위해 무덤을 팠으면 팠지, 꽃을 두고 갈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여명은 조심스레 꽃을 피해 무덤 앞에 섰다.
묘비도, 위패도 없이 그저 봉분만 쌓인 무덤.
그가 직접 맨손으로 파고 덮은 무덤과 마주하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여명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기엔 아직 그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묵묵히, 술병을 꺼내 무덤 위에 부었다.
쏟아지는 술이 그의 눈물을 대신해주길 바라면서,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술병이 텅 빈 직후, 쇠미리가 그에게 다가와 플레이어의 머리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여명은 말없이 상자를 열어 죽은 녀석의 머리를 꺼냈다.
당황, 분노, 고통.
죽을 얼굴에는 녀석이 최후에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명은 잠시 녀석의 눈을 바라보다가, 주와이외즈를 일으켰다.
화르륵- 불길이 머리를 집어삼키며 연기를 뿜어냈다. 여명은 타오르는 머리를 놓지 않았다. 녀석의 모든 게 재가될 때까지, 계속.
이윽고 모든 잿가루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진 직후.
여명이 쇠미리를 향해 물었다.
“녀석의 몸은 한국이 가져갔다고 했지?”
“응, 아카데미 측에서 확인한 정보야.”
“…머리 없는 시체에 짐승 머리라도 달려고 가져갔나? 아니, 부디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
한 번 더 녀석을 죽일 수 있도록.
여명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쇠미리가 지팡이를 꺼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경건한 자세로 무덤 주변의 식물들을 조종했다.
볼품없는 봉분 위로 풀이 자라나고, 무분별하게 자라났던 잡초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길 잠시.
이번에는 성녀가 앞으로 나섰다.
평소와 달리 검은 안대와 베일을 쓴 그녀는 조심스레 눈물 젖은 무덤 위에 손을 올렸다.
“자비로운 모르닥이시여, 오늘 여기, 당신의 낫이 안식을 찾지 못한 자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기도가 시작되자 일행 모두가 조용히 묵례했다.
그렇게 성녀가 직접 빌어주는 장례 기도가 인천의 야산을 울리는 가운데, 세티는 조용히 여명의 손을 붙잡았다.
여느 때와 같이, 따스한 손이었다.
***
개성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렇다고 한국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개성은 한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이국적인 도시에 가까웠다.
남북 전쟁 이후 개성을 반으로 갈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차원문을 기준으로 북부, 소련이 점령했던 지역에는 스탈린식 아파트-흔히 스탈린카라 불리는- 고급 주택들이 뽐내듯 자리 잡고 있었고.
그에 반해 미군이 점령했던 남부에는 미국식 계획도시가 철두철미하게 늘어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흡사 작은 뉴욕처럼 보여서, 예전에는 리틀 뉴욕이라는 우스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나.
아무튼, 이런 개성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은 사람이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노동자와 관광하러 온 관광객들, 그리고… 군인.
한국군 특유의 개구리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은 개성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만주 기지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반적인 도시와 비교하면 몇 배는 많은 군인이 돌아다녔다.
겉으로야 차원문 방위를 위한 군이라지만 사실은…
“군부에게 아직 권력이 남아있다는 증거지.”
거기까지 말한 장만은 슬쩍 차원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합차 창문 너머에는 시카고나 LA 차원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차원문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던 성녀가 물었다.
“한국의 군부 독재는 끝난 거 아니에요?”
“물론, 민주화는 성공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군대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 않느냐. 만주나 개성 같은 곳에서만큼은 군대가 여전히 정부에게 강짜를 부릴 정도의 힘은 남아 있단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알려진 바는 그랬다. 여명 또한 한동안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하지만 숨겨진 진실은 조금 더 단순했다.
저 무시무시한 군부는 사실 애국자들이라 불리는 권력 집단과 ‘각하’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지배자에게 이용당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
아직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황 증거만으로도 진실을 예측하기엔 충분했다.
군부 독재도, 민주화도 결국 뒤에서 이 나라를 조종하는 자들의 입맛에 맞게 선택된 결과다…
여명이 그 음울한 진실을 곱씹길 잠시.
장만이 차원문 검문소가 보이는 위치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자, 나는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검문이 있어서 힘들겠구나.”
쇠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르신. 여기까지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감사는 무슨…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냐? 검문소를 뚫을 방법은 있고?”
그러자 세티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 세 장을 꺼냈다.
조작된 용병 서류 두 장과 그릇 본인임을 증명하는 서류.
“그릇과 그녀를 호위하는 용병 둘이라… 나쁘지 않구나. 그러면 나머지 둘은 어쩌고?”
“개성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죠.”
“아.”
장만은 그제야 쇠미리와 성녀가 좋게 말해서 덤, 나쁘게 말해서 꼽사리를 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훈계라도 했겠으나, 청소부들의 무덤에 그녀들이 해준 일을 떠올리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내게 아가씨들을 공항까지 모실 영광을 주겠나?”
그 부드러운 질문에 두 사람이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여명과 세티는 작전을 준비했다.
서류를 준비하고, 차원문을 넘은 뒤 일정을 조율하고, 마지막으로 일행들의 환상을 조정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그릇은 얼굴을 덮은 환상을 풀었다.
여명은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쓰던 두꺼운 베일과 로브를 건네며 말했다.
“살로메, 이제부터는 네가 가장 중요해. 알지?”
“네, 넵! 맡겨주세요!”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고.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은 낮으니까.”
합리적인 위로에도 그릇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다가, 쇠미리가 차에서 내리는 여명의 볼에 입을 맞추는 걸 보고 숨을 삼켰다.
“건강히 돌아와요. 용사님.”
“….”
그러자 이에 질세라 성녀도 반대편 볼에 입을 맞췄다. 장만이 끌끌 혀를 차든 말든, 입맞춤을 끝낸 그녀는 여명의 등을 쫙! 때렸다.
“무사히 안 돌아오면 쏴버릴 거야.”
“무서워서라도 빨리 돌아와야겠네.”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는 직후, 장만은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두 소녀를 태우고 사라졌다.
이별의 슬픔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거란 믿음이 있었으므로.
아무튼, 그렇게 셋만 남은 여명과 세티, 그리고 그릇은 곧바로 개성 차원문으로 향했다.
-검문이 있겠습니다. 서류 부탁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문소 도착한 일행은 군인에게 서류와 요금을 제출하고 대기표를 뽑아 차원문 대기소에 도착했다.
차원문 대기소는 공항 대기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편한 의자와 적당한 온도, 그리고 뚱한 표정의 대기자들까지.
베일 아래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그릇과 달리, 여명과 세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개성 차원문을 넘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긴장은 차원문 너머의 도착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대기 번호 430번에서 520번까지 입장하시겠습니다. 단, 대기 번호 433, 434, 435번은 그대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대기 번호 435번, 여명은 434번 대기표를 쥔 세티를 바라봤다.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433번 대기표를 쥔 그릇이 입술을 씹었다.
“거, 걸린 걸까요?”
“아니,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못 봤어.”
“그러면…?”
“아직 모르지. 하지만 괜히 과민 반응하지 말고 일단 기다려보자. 별일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릇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참 뒤, 대기소 바깥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군화 소리.
군인이 왜? 여명의 머리로 물음표가 떠오른 직후.
방금 다린 것처럼 각이 살아있는 군복을 입고 등에는 군용 대검을 맨 군인 한 명이 대기소 안으로 들어섰다.
삼선일치라고 하던가?
상의 허리띠, 바지의 선을 일자로 딱 맞춘 남자는 대기소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릇을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탑의 그릇님, 맞으십니까?”
예상에 없던 일에 그릇이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여명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릇을 앞에 선 저 군인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정마필! 개성 방위군 사령부에서 그릇님의 호위를 명 받았습니다!”
척! 차렷 자세와 함께 경례하는 정마필. 그는 만주에서 여명에게 팔이 잘렸던 바로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