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28)
을 위한 세계는 없다-428화(428/817)
***
정마필.
군에서 불명예 제대를 당한 뒤 군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애국단이란 이름의 용병단에서 활동하던 한국 초인.
천여명이 카할 마그두의 갈비뼈를 군에게 넘기지 않자, 한국군이 그를 망신 주기 위해 보낸 초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여명이 그의 양팔을 잘라버렸으나… 그는 멀쩡한 팔로 살로메에게 경례하고 있었다.
팔이야 일부러 치료가 쉽도록 깔끔하게 잘랐다지만, 군에 복귀한 건가?
여명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살로메가 대답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언제 덜덜 떨었냐는 듯,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변장한 여명과 세티를 번갈아본 뒤 덧붙였다.
“호위는 이미 충분합니다.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동네방네 제 정체를 떠들고 다니지 않는 조용한 친구들이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보란 듯 대기실을 둘러봤다. 주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휴대폰 카메라로 이쪽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정마필은 그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거기! 대기실에서 촬영은 불법인 거 모르나!? 잡혀가기 싫으면 당장 지워!”
대검을 찬 군인이 노려보는데 계속 촬영할 간 큰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일반인이 부랴부랴 휴대폰을 접자 그릇이 한숨을 쉬었다.
정마필이 말했다.
“저, 그러지 마시고… 승만 시티까지만 호위하겠습니다. 아니, 호위라고 딱딱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그… 안내원! 그래, 그, 관광 안내원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단순히 호위로 온 군인의 태도라기엔 어딘가 비굴한 말투였다. 그릇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으려 했다.
하지만 세티가 손가락으로 은밀히 그녀의 등에 무어라 메시지를 남긴 직후, 그릇은 태도를 바꿨다.
“하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네요. 승만 시티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릇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마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이 정마필,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결코 실망하시는 일 없이 안전하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후, 정마필이 앞장서서 개성 차원문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린 걸 보상하려는 듯, 그는 관계자만이 갈 수 있는 특별한 통로로 향했다. 멀쩡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시선이 등에 꽂혔다.
중간중간 검문소가 있었으나 정마필이 어떤 패를 꺼내 들자 모두 경례만 할 뿐 어떠한 검문도 하지 않았다.
꽤나 특별한 패인 모양인데, 한국인도 아닌 그릇을 이렇게까지 특별 취급을 하는 이유가 뭘까?
정마필 말고 다른 윗 대가리들이 안 보이는 이유는 또 뭐고?
의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세티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응, 전에 만나본 적 있는 한국 초인이야.’
여명은 최대한 요약해서 정마필이 누군지 설명했다. 곧이어 세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안내가 아니라 그릇이 주변에 관심 못 쏟게 하려는 건가 본데?’
‘왜?’
‘굳이 불명예 제대했다가 다시 군에 들어온 사람을 보낸 것도 그렇고,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군 상부가 안 보이는 것도 그렇고… 딱 봐도 짬 처리잖아?’
‘….’
미안, 나 미필이라 그런 거 잘 몰라. 여명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세티가 계속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촉이 오는데… 어떻게 할래?’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앞서가는 정마필의 뒤통수를 확인했다.
걸음걸음마다 딱딱 각이 서 있는 게, 뭔가를 꾸미는 사람이라기보단 며칠 만에 일을 받아 기쁜 사람처럼 보였다.
본인도 짬 처리당하는 걸 모르는 건가.
만주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연기라고 보기엔 어려운 모습이었다.
저 태도와 세티의 말을 종합해보면…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
여명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대답했다.
‘우선 마탑에 가는 게 우선이니까, 일단은 상황을 보자. 뭔가를 꾸미는 게 확실하면 그때 가서 알아보자고.’
세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앞서가는 그릇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일행은 개성 차원문 앞에 도착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타원형 구멍.
차원문의 모습 자체는 시카고나 LA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검문소에 깔린 군인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 정도일까.
아무튼, 차원문 마지막 검문소에 도착한 정마필이 말했다.
“다 왔습니다! 마지막 수속만 끝내면 바로 차원문을 넘을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검문은 금세 끝났다. 차원문을 넘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지고, 일행은 곧바로 차원문으로 향했다.
묘한 눈으로 그릇과 정마필을 훑는 검문소의 군인들을 마지막으로, 여명은 차원문으로 돌입했다.
***
차원의 틈새를 훔쳐본 자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태양의 항해를 말했고, 또 누군가는 추락한 신들의 진명을 속삭였다.
그리고 그 무수한 속삭임들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이윽고 모든 말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태양이 뜬다.]도돌이표 아래 파묻힌 자들, 이제는 세상을 지켜보는 것밖에 못 하는 자들이 합창했다.
[태양이 뜬다.]***
“왜 그래?”
차원문 너머, 승만 시티에 도착한 세티가 꺼낸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차원문에서 나온 직후, 여명의 인상이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니, 그냥… 차원문 넘어오는 사이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소리?”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세티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여명이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내 착각이겠지.”
“….”
과연 착각일까? 세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차원문을 바라보는 사이, 정마필이 소리쳤다.
“자, 자, 검문소 앞에 차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가시죠!”
“바로 가기엔 줄이 좀 길어 보이는걸요.”
그릇이 사람이 몰린 검문소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정마필이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한국군은 손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검문소에 서류를 내밀었다. 대놓고 새치기하는 꼴에 사나운 눈길이 쏠렸으나, 그뿐이었다.
군 검문소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을 비난할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하물며 그게 초인군 마크를 단 군인이라면야.
뭐 어쨌거나, 덕분에 일행은 손쉽게 줄을 지나쳐 검문소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차원문 아래 거대한 분지에 지어진 도시가 일행을 마주했다.
‘해리슨 특별 평화 자치구’라는 정식 명칭보다, ‘승만 시티’라는 가짜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곳.
그 도시는 미국과 소련의 색으로 양분된 개성과 달리 한국적인 도시였다.
서울이나 인천에서도 보기 힘든 기와집 주택들부터, 조선식 건축 양식을 본뜻 거대한 시청까지.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조선식 궁전이었다.
우남궁.
이승만 본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저 궁전은 본인을 ‘프린스 리’ 라고 소개하던 이승만의 욕심이 그득그득 묻어있는 것 같았다.
…뭐, 어쨌거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위에서 말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다른 도시들과 다를 게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까닭이었다.
일행은 정마필이 말한 군용차량이 도착하자마자 구경을 멈추고 차에 탑승했다.
운전수도 없이 정마필 본인이 운전하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짬 처리가 확실한 모양.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운전대를 잡은 정마필은 최대한 가벼운 분위기를 연기하며 말했다.
“자, 어디로 모실까요? 혹시 관광을 원하신다면 우남궁부터 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릇을 향한 질문이었으나 대답은 세티에게서 나왔다.
“관광할 시간 없습니다. 바로 역으로 가주세요.”
“아, 옙.”
무안할 만도 하건만, 정마필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 실력은 영 꽝인지,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와중에도 차량이 덜컹덜컹 소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라디오 소리도 없이 얼마나 달렸을까? 여명은 침묵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마필 씨, 보아하니 후방 출신은 아니고, 만주에서 활동하신 거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만주에서 군 경력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습니다. 만주 사태 초기에도 만주에 있었죠.”
“그래요? 그럼 혹시… 천여명을 직접 만나본 적도 있습니까?”
여명은 정마필의 반응을 살폈다. 짜증 낼까? 아니면 화를 낼까? 정답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예, 물론 만나봤습니다. 괜찮은 청년이었죠.”
“….”
그에게 팔을 잘린 사람의 반응치고는 퍽 친근했다. 여명이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자 정마필이 먼저 말했다.
“저와 천여명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물어보시는 거 같은데… 맞습니까?”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마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천여명이 밉지는 않습니까?”
“밉다? 미움이라… 그런 게 생길 턱이 있나요.”
뭐라는 거야.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마필이 덧붙였다.
“뭐, 평범하게 보면 미워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의 실력도 모르고 도전했다가 언론 앞에서 깨지고, 팔까지 잘렸으니.”
“…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다?”
“예, 그쪽도 초인이면 알겠지만, 초인 간의 진검승부라는 게, 워낙 살벌하지 않습니까? 팔을 자른 건 모욕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였습니다.”
“…?”
자비? 뭔 개소리야? 뒷좌석에 앉은 그릇이 귀를 쫑긋거리는 가운데, 그는 계속 말했다.
“그때, 천여명은 제 머리를 잘라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제 무술을 응용해 팔만 잘랐죠.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정마필은 희미하게 흉터가 남은 팔뚝을 드러내 보였다.
“부끄럽지만, 제가 먼저 모욕했는데도… 그 어린 친구는 역으로 제게 가르침을 준 겁니다.”
“….”
아니 그걸 그렇게 해석한다고? 여명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오해한 정마필이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강자의 자비가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천여명은 저보다 강자였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그를 향한 악평을 듣고 싶으신 거라면… 죄송하지만,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자의 자비가 선이라니. 약자이자 사회 밑바닥 노동자였던 그로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릇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녀는 ‘설마 전윤성의 팔을 자른 이유가…?’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여명은 그녀를 보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베일로 얼굴을 가려서 망정이지, 맨얼굴이었다면 분명 망상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여명이 빠른 시일 내로 그녀의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끼이이익 – !
정마필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군용차량의 묵직한 차체가 출렁거리고 일행의 안전벨트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교통사고? 난폭운전? 아니, 아니었다. 브레이크를 밟은 차량은 쿵! 소리와 함께 뭔가를 치었다.
차량이라기엔 너무나 물렁하고,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묵직한 무언가.
그것이 길바닥으로 날아가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덜컹! 차량이 급정거했다. 정마필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릇부터 확인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 전 괜찮아요. 우선은 치인 사람부터….”
그때, 여명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람 아니야.”
사람은 군용차량에 치이고도 멀쩡하게 일어날 수 없다.
그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하, 하지만 저게 어떻게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람처럼 보였다. 고통에 찌든 얼굴도, 부분부분 찢어진 군복도 분명 사람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찢어진 살덩이 사이로 촉수를 흘리지도 않고, 등에서 뼈가 돋아나지도 않는다.
“…괴수?”
정마필이 차량 앞에 선 녀석의 정체를 알아채기 무섭게, 녀석이 포효했다.
“캬아아악!!”
녀석은 그대로 군용차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의 손에서는 어느새 괴수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솟아나 있었다.
“어, 어?!”
정마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여명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인간형 괴수는 눈을 번뜩이며 여명에게 발톱을 휘둘렀다.
피는 튀지 않았다. 쩌저적- 소리가 울리며 녀석의 팔이 통째로 얼어버렸으므로.
급속 냉각.
검 대신 마법을 펼친 여명은 그대로 염동력을 사용해 괴수를 차에서 밀어냈다.
쿵! 도로 저편으로 날아간 녀석이 벽에 처박히며 소음이 났다.
도로 위의 다른 차량들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가운데, 정마필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저, 저건 대체 뭡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한국군 군복을 입고 있잖….”
그때, 여명은 불현듯 홍용완 의원의 호위들을 떠올렸다.
군부에서 보낸, 괴수 세포를 이식한 인간들.
개성에서 무언가 숨기려는 군부의 행동, 눈앞에 나타난 군복을 입은 괴수… 이게 우연일까?
의문을 품은 여명은 얇디얇은 얼음 바늘을 만들어 정마필의 귓구멍에 겨눴다.
혹시라도 그가 뒤통수를 칠 낌새가 보이면 그대로 뇌에 뚫어버릴 생각이었으나, 정작 정마필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저거 아직 안 죽었습니다!”
그는 귀에 겨눠진 얼음 바늘은 신경도 쓰지 못한 채, 부랴부랴 차량에서 대검을 꺼내왔다.
진짜 짬처리 당한 건가…
여명이 안타까움을 느끼는 찰나, 날아간 괴수가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달려드는 대신…
하늘을 향해 불길한 포효를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
사람의 비명과 괴수의 울부짖음이 뒤섞인 포효. 여명은 뒤늦게 염동력으로 녀석의 목을 노리고 주먹을 쥐었다.
뚜둑-! 녀석의 목뼈가 부러지며 대가리와 촉수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정마필이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해치운 건가?”
“….”
여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괴수의 몸통을 통째로 쥐어짰다. 우드득-! 아무리 괴수라도 되살아날 수 없는 일격.
하지만 마법의 주문은 그를 비켜나가지 않았다.
-캬아아아!
도로 저편, 가까운 건물의 옥상, 심지어 발아래 하수도에서까지 괴수의 포효가 들려왔으므로.
‘한국의 함정? 아니면 그냥 재수 없이 걸린 건가?’
정답은 알 수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은 확실했다.
여명은 뒤늦게 차에서 내리려는 그릇과 세티를 향해 말했다.
“둘 다 내리지 말고 다시 안전벨트 매. 정마필, 당신은 다시 운전대 잡고, 일단 여기서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