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3화(43/817)
〈 43화 〉 성녀는 희생양의 꿈을 꾸는가 (3)
* * *
***
베이스캠프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여명을 맞이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짙은 연기 너머, 베이스캠프의 작은 테이블들을 모아 만든 기다란 탁상에는 예닐곱 명의 용병들이 앉아있었다.
한명 한명, 일반적인 용병들과는 수준이 다른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마나를 품고 있었고,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조차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부단장 김만수와 시험을 주관했던 흉터 가득한 남자, 만석철.
“아, 드디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입이 왔군.”
하지만 이 공간에서 입을 열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탁상의 가장 뒤편, 상석에 앉은 남자.
그는 예상대로 용병다운 외모를 뽐내는 남자였다. 거칠고, 야성적이란 뜻이었다.
우락부락한 몸, 마구잡이로 자란 턱수염과 거뭇거뭇한 털 코트까지. 청소부 시절에 마주쳤어도 단번에 용병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명은 더 이상 청소부가 아니었고,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했다.
그는 상대의 몸에서 느껴지는 냉철한 마나를 읽었다. 그의 마나는 마치 수술에 들어가는 외과 의사의 그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
톈린이 어째서 ‘독한’ 사람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 첫인상이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내 소개도 안 했군. 신입은 날 처음 볼 텐데 말이지.”
그는 마음에도 없는 호탕함을 연기하며 말했다. 다른 용병들은 그를 따라 실실 웃었으나, 여전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바로 선죽 용병단의 단장, 권몽주다. 신입, 날 부를 때는 그저 권 단장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편히 자리에 앉아라.”
단장이 가리킨 곳은 단장을 마주 보는 자리였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이자, 입구가 가장 가까운 말석.
여명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그의 등을 봐주고 있던 톈린 또한 탁자의 빈자리 중 하나를 차지했다.
“자, 그럼 당사자도 왔으니,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단장이 큼큼, 헛기침하자 담배를 물고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담배를 끄고 주의를 집중했다.
“첫 번째 의제는, 지난밤 전투에서 얻은 용의 갈비뼈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분배? 시작부터 이렇게 나오는 건가. 여명은 헛웃음을 삼키고 단장이 떠드는 걸 바라봤다.
“성녀께서 절반의 지분을 주장하셨으니, 우리 용병단에 떨어지는 건 절반이다.”
우리 용병단이라, 단장의 의도는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견물생심이라더니.’
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단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망할 거 없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양이니까. 검으로 만들면 세 자루는 족히 나오고, 흉갑은 두 개나 만들 수 있다더군.”
검과 갑옷으로 비유하자마자, 몇몇 용병들의 눈이 반짝였다. 단장은 그들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하지만 무기를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우리가 무슨 드워프도 아니고… 용병단의 전력 확충이 최우선이다. 알겠나?”
“….”
“마침 국제 영약 시세도 내려갔으니, 이참에 초인이나 몇 명 더 뽑아내자고.”
그 말을 끝으로, 탁자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장이 더 말을 잇지 않고 여명을 바라본 탓이었다.
단장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쏠린 말석에는, 여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신입, 뭔가 발언할 말이라도 있나?”
“갈비뼈에 제 지분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단장은 맹랑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웃는 낯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지분이라니?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신입, 수습 기간 동안 용병이 얻은 모든 획득물은 용병단의 재산이다.”
“….”
“서운하겠지만, 용병법이 원래 그렇다. 하지만 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마 우리 용병단이 특급 신입을 모자라게 대할까? 제일 좋은 영약은 자네 거야. 내가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당당한 미소와 은근히 휘어진 눈썹.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표정이었다.
여명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돌려 다른 용병들을 살폈다.
대다수의 용병들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태도였고, 김만수와 톈린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입맛이 씁쓸했다. 여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살인이었다.
이곳에 있는 용병들을 전부 죽이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3팀까지 쓸어버린 뒤 입을 싹 씻는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명은 황당무계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어버렸다.
살인이라니, 최악의 수가 아닌가.
그는 유명세를 쌓으러 온 거지, 살인자가 되기 위해 만주로 온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군사 기지 내부에서 대량 살인이 일어난다면, 군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갈비뼈에 대한 욕심 이전에, 체면의 문제였다. 자연스레 수사가 펼쳐질 거고, 여명은 용의 선상 맨 위에 올라가리라.
‘살인은 말도 안 되고, 다른 방법이라면…’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협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장이 내뱉은 말이 걸렸다.
수습 기간 동안 얻은 모든 획득물은 용병단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단언하지 않았나.
그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단장과 날을 세우고 협상을 빙자한 기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 내내.
‘…시간이 아깝다.’
그에게 여유가 있으면 모르되, 만주에 있을 시간은 겨우 육 개월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입학 이전까지, 오롯이 유명세를 얻기 위해 쏟아도 부족할 시간.
그런 귀한 시간을 갈비뼈를 두고 용병단과 씨름하는 데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남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갈비뼈를 줘버리는 것.
선죽 용병단과 쓸데없는 시간 낭비도 안 하고, 갈비뼈를 노리는 다른 멍청이들까지 전부 털어버릴 수 있는 선택.
갈비뼈가 아깝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이대로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여명은 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권 단장님. 전 탈단하겠습니다.”
덤덤한 선언에 탁자에 앉은 용병들의 안색이 변했다.
흥미롭게 여명을 바라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인상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신입,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탈단해도 갈비뼈의 소유권은 여전히 우리 용병단이….”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갈비뼈는 선죽 용병단이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
“그저, 저에게 더 이상 갈비뼈가 없다는 걸 만주 기지에 발표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여명이 조용히 대답했다. 단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만수가 참담한 표정을 짓고, 톈린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이,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단서는 나중에 제출하겠습니다.”
여명은 가볍게 등을 돌렸다. 이미 머릿속에서 갈비뼈는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가 다른 용병단 목록과 현상금 수배서를 떠올리던 그 순간.
“잠깐.”
단장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곤, 베이스캠프를 쑥 훑었다.
“모두 나가라.”
“단장님?”
“부단장, 너도 마찬가지다. 나가.”
김만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단장은 단호한 눈으로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김만수와 톈린을 비롯한 용병들은 단장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우르르 베이스캠프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캠프를 나서려던 여명이 단장과 단둘이 캠프에 남게 됐다.
***
“…뭡니까?”
여명이 묻자, 단장에게서 느껴지던 기세가 달라졌다.
그는 조금 전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호탕한 용병의 탈을 벗어 던지고, 차가운 표정으로 여명을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장이 대뜸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조금 전의 무례는 사과하마.”
“….”
“용병이라는 게, 돈 주는 사람 말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원하지 않아도 이런 치졸한 시험에 어울려줘야 할 때도 있지.”
이게 무슨 소리야? 눈살을 찌푸리던 여명의 감각으로, 누군가가 느껴졌다.
저벅.
상대는 베이스캠프와 숙소 사이, 뒷문을 열고 들어섰다. 발소리가 여느 사람들과 달리 묵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치졸한 시험이라니, 말이 심하군. 권몽주 단장.”
통통하고 짧달막한 키, 부리리부리한 눈동자와 주먹코, 그리고 배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수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드워프였다.
“…누구십니까?”
“뭐? 날 몰라?”
여명이 정체를 묻자마자, 드워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자신을 모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허, 정말로 모르나 보군. 그럼 둔간중공업은 알고 있나?”
둔간중공업 그룹, 시카고 차원문 옆에 자리한 세계적인 기업집단.
한국과는 철강 사업과 조선 사업을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인 탓에, 여명도 종종 뉴스에서 들어본 회사였다.
“아, 다행히 둔간중공업은 아나 보군. 나는 그곳에서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룰마 둔이라는 사람일세.”
“…둔 가문? 재벌?”
이번에는 여명이 놀랄 차례였다.
“우리끼리는 씨족이라고 부른다만… 한국인들은 유독 그 표현을 좋아하더군. 뭐,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드워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뒤, 탁자로 다가와 조금 전까지 권 단장이 앉아있던 상석에 앉았다.
“자기소개는 이쯤이면 됐고, 이제 일 이야기나 좀 나눠보지.”
그는 탁자 위에 서류 뭉치를 턱하고 올려놨다.
“권몽주 단장? 내가 설명해도 되겠나?”
단장은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마치 단장의 상급자라도 되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본 여명은 새삼스레 톈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투자자가 왔다고 했었지.’
용병단의 투자자가 드워프 재벌이었던 건가? 여명이 확신하는 사이, 드워프가 서류 뭉치 맨 위에서 서류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천여명군. 다시 한번 치졸한 시험을 본 것을 사과하겠네. 하지만 우린 그쪽을 시험할 필요가 있었다네.”
그가 뽑아 든 서류를 보자마자, 여명은 그것이 무슨 서류인지 눈치챘다.
세티가 조작한 입사지원서.
“실력을 감추고, 조작된 입사지원서로 용병단에 들어온 사람을 쉽게 신뢰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드워프는 서류를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여명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체 의도가 뭡니까? 전 탈단한다고 했을 텐데요.”
“탈단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네. 우리가 자네에게 원하는 건 이 용병단에 있어 달라는 게 아니니까.”
“…그럼?”
“거두절미하게 말하자면, 우린 자네에게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다네.”
의뢰? 대체 무슨 소리지? 여명은 드워프와 단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 이해하네.”
드워프는 수염을 슬슬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거기부터 말하면 되겠군. 나와 선죽 용병단은, 아주 오래전부터 만주 땅에 숨어있는 어떤 보물을 찾고 있었다네.”
“….”
“꽤 오랜 탐색 끝에, 보물의 위치를 거의 찾아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네. 하필 보물이 있는 곳을 용이 지키고 있었거든.”
만주에 그런 장소가 있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일이라면 헬기를 끌고 가서 용을 처치하면 그만 아닙니까?”
“헬기? 우리가 용을 잡는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길 바라나? 자네도 경험해봤으니 알지 않나. 만주의 군인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용의 갈비뼈의 소유권을 주장했다던 군을 떠올렸다. 그래, 탐욕스럽긴 하지.
“소수 인원으로 용을 잡을 수 있는 초인이 필요하네. 기왕이면 용의 뼈를 잘라버릴 수 있는 실력자라면 더 좋겠지.”
드워프는 탐욕과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여명의 얼굴을 훑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같은 사람이, 이런 순간에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그러십니까.”
“이런 경우에 정답은 둘 중 하나지. 운명의 가호이거나, 자네가 아주 무시무시한 사기꾼이거나.”
“….”
“하지만 조금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탈단을 입에 담은 걸 보고 확신했다네. 자네는 나를 노리고 온 사기꾼이 아니라는 걸. 사기꾼이라면 갈비뼈를 순순히 포기할 수 있을 리 없거든.”
딱히 순순히 포기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명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즉, 우리의 만남은 운명의 가호인 거지.”
확신 어린 말투를 들은 여명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건 말건, 드워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자, 천여명군. 내 제안은 간단하네. 우리와 함께 용을 잡겠나? 아니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겠나?”
드워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마다 반짝이는 반지가 가득한, 재벌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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