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3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31화(43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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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마탑의 처형관이 다가오는 걸 본 여명은 곧바로 몸에 힘을 줬다.
주변에 보는 눈 하나 없는 상황.
그건 거리낌 없이 진짜 실력을 드러내도 문제없는 상황을 뜻했다.
여명은 인벤토리를 준비하며 다가오는 처형관과 마주했다.
그대로 목을 날려버릴까? 아니면 적당히 팔다리만 잘라버리고 세티의 꼭두각시로 만들까.
어느 쪽이건 자신 있었다.
처형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모르겠지만, 거리와 장소, 심지어 머릿수조차 이쪽이 유리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판단을 끝낸 그가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으려는 순간, 처형관이 먼저 양손을 들었다.
그런데, 손을 든 모습이 전투 자세 같지 않았다. 저건 마치…
“살로메,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구나. 오랜만에 한 번 안아볼까?”
“…?”
이건 또 뭐람. 여명은 양손을 벌린 처형관과 그릇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작 그릇은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베일로 가리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모습이 그녀의 감정을 증명하고 있었다.
“살로메?”
처형관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자, 여명이 그의 앞을 막았다.
“이 이상 접근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처형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충성심 강한 호위로군. 아까 얼핏 들으니 용병이라고 하던데… 나와 살로메는 서로 아는 사이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네.”
“…아는 사이치고는 우리 의뢰인께서 많이 불편하신 눈치십니다만?”
“내가 좀 엄하게 가르친 탓이지.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마탑의 청색 처형관, 발막이라고 하네.”
자기소개를 끝낸 발막이 그대로 여명을 지나치려 했으나, 여명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막은 그제야 정색하며 말했다.
“자네,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나?”
“그쪽은 경우 없다는 말을 자주 들으실 것 같군요.”
발막의 굳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손에 마나가 모였다.
노골적인 위협.
여명은 겁먹는 대신 똑같이 손에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노골적인 웃음을 지었다.
핑-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이럴까? 마나가 팽창하는 소리와 함께, 발막의 검지가 끝에서 주문이 엮였다.
“내 손속이 과하다 탓하지 말게.”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
“하.”
시작은 간단한 전기 마법이었다.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은 주문이 완성되며 파직-! 전격이 여명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일격에 기절시키려는 수작. 여명은 곧바로 허공에 얼음판을 만들어 전격을 막아냈다.
“오?”
발막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하체. 막혔다. 다시 상체, 막는다.
계속해서 머리, 팔, 다리, 몸통, 허벅지, 그리고 다시 머리.
연달아 쏘아낸 전격이 막히자 발막은 흥미로운 듯 마나를 더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다섯 손가락 전부에서 전격이 쏟아졌다.
빠지직! 구불거리는 전격, 번쩍이는 빛, 그리고 그것을 난반사하는 얼음판.
여명이 다섯 줄기의 전격마저 모두 막아내자, 발막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직후, 전격을 막아낸 얼음판이 그를 노리고 날아오자 그는 놀라움에 소리쳤다.
“이야, 제대로 익혔군!”
그사이 둘의 공방은 점점 더 격해졌다.
발막은 아예 양손을 모두 들어 열 손가락에서 전격을 쏘아냈다.
여명은 그에 상응하는 숫자의 얼음판을 만들어 막고, 부서트리고, 던졌다.
폭죽놀이처럼 화려한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켜보던 세티가 발막에게 권총을 겨눴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릇이 그녀를 붙잡았다.
세티가 물었다.
“왜 막아?”
“잠깐, 잠깐. 지금은 끼어들면 안 돼.”
“그러니까, 왜?”
그릇은 두 사람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둘 다 기본 전격 마법과 얼음 마법으로만 겨루고 있잖아. 이건… 비유하자면 바둑을 두고 있는 거랑 비슷해. 바둑 두는 사람한테 총을 쏘진 않잖아?”
“바둑? 뭔…? 마법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 같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요점만 말하자면 두 사람이 점잖게 겨루고 있다고 보면 돼.”
“…점잖다고? 저게?”
세티는 황당하다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얼음판과 전격이 난무하는 꼴은 아무리 봐도 점잖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릇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이게 참… 설명하기 어렵네.”
“….”
그때, 때마침 전격 한줄기가 여명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파지직! 타올랐다.
특유의 단백질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세티는 한숨 쉬듯 말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내가 끼어들면 비매너라는 거야?”
“어… 백 퍼센트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이야.”
엉성한 설득이었지만, 세티는 순순히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물론, 가만히 손 놓고 구경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는 수류탄을 꺼내 핀을 쥐었다.
여명이 위험해지면 언제라도 핀을 뽑아 던지겠다는 의지가 담긴 몸짓.
“….”
그릇이 세티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문 사이, 두 사람의 전투는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시작부터 마법사보다는 복싱 선수에 가까운 거리에서 싸우던 둘은, 이제 거의 한 뼘 남짓한 수준까지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공격을 보고 피한다기보다, 예측하고 피해야 하는 거리.
바둑의 고수들이 수십 수를 앞서 보듯이, 매 순간마다 수십 번의 예측과 교환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고수라도 모든 미래를 알 수는 없는 법.
파직! 미처 막아내지 못한 전격이 여명의 어깨를 꿰뚫는다.
푸확! 예상하지 못한 얼음판이 발막의 옆구리를 파고든다.
저 많은 전격, 더 많은 얼음, 더 가까워지는 숨결.
이윽고 여명의 피부가 반쯤 타버리고, 발막의 몸 곳곳에 얼음이 박힐 때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손을 뻗어 서로의 손바닥을 맞잡았다.
무슨 신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이야말로 끝을 보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라는 교감으로 벌어진 일.
다음 순간,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강력한 마법을 내뿜었다.
!
소리는 없었다.
번쩍이는 전기를 따라 떠오르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어마어마한 전력을 증명하고, 뒤이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옷과 머리카락이 살벌한 냉기를 증명할 뿐.
“암페르의 빛과 급속 냉각….”
두 사람이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건지 알아본 그릇이 감탄하길 잠시.
여명과 발막은 붙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아니,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는 건 틀린 소리였다. 다리가 꽁꽁 얼어버린 발막은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크흐, 쿨럭.”
물론, 여명도 멀쩡하지 않았다. 물러난 그의 입에서 증기 섞인 피가 쏟아졌다. 속부터 익어버린 건지, 입에서 묘하게 고기 탄 내가 났다.
하지만… 여명은 쓰러지지 않았다.
억지로 재생력을 끌어올리는 그는 고통을 참으며 허리를 펴고, 발막을 바라봤다.
마주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
그 속에는 살기도, 하다못해 적의조차 없었다. 조금 전 대결에서 누가 우위인지 명확해졌으니까.
전기 통구이가 된 몸을 재생한 여명과 맞잡은 손이 동상으로 새파랗게 변해있는 발막.
그러나 처형관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싸움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타입인 걸까?
뭐가 됐건, 그는 놀라움과 흥미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너무 늦은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자네는 누가 붙여준 호위지?”
“…아카데미 교장께서 비용을 지불했소.”
“아, 그 양반. 쫌생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은 호위를 붙여줬군.”
그렇게 말한 발막은 얼어붙은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꽝꽝 언 왼팔이 방해되자…
서걱-! 오른손에 전기 칼날을 만들어 왼손을 통째로 잘라냈다.
저런 상처는 치유 기적이 아니면 재생하기 어려울 텐데?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건 말건, 그는 땅에 떨어진 왼팔을 주우며 말을 이었다.
“어느 학파에서 수학했나? 냉기를 다루는 수준을 보아하니 마하간 학파인가?”
“독학으로 익혔소.”
“학파를 말하기 어렵다? 하긴, 이해하네. 마탑이 도둑맞은 마법서가 어디 한두 개여야지.”
생각보다 털털하게 말을 주고받은 그는 그릇을 향해 물었다.
“살로메? 이제 포옹은 안 할 테니, 대화 좀 하자꾸나.”
“….”
그 말을 들은 세티가 수류탄 핀에서 손을 떼는 사이, 그릇이 앞으로 나왔다.
발막이 웃으며 말했다.
“흠… 날 여기서 만난 게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가 보구나. 그렇지?”
“…예. 처형관이 마탑을 나설 때는 피를 봐야 할 때뿐이니까요.”
“꼭 그렇지도 않아. 최근에 인천 도살자인가 뭔가하는 놈을 쫓다가 빈손으로 돌아갔거든.”
“….”
“뭐, 어쨌거나. 나는 네가 마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온 거란다.”
그럴싸한 말이었다.
만약 강 중령에게 마탑과 한국이 엮인 비밀을 듣지 못했다면… 하다못해 그가 강 중령을 멋대로 죽이지 않았다면 믿어버렸을 정도로 그럴싸한 말.
그릇은 차갑게 대꾸했다.
“…제가 탈주한 괴수 군인들과 접촉하는 걸 막으려고 하신 건 아니고요?”
“물론, 그런 의도가 없다고는 안 하마. 하지만 그건 녀석들이 너에게 해코지할까 봐 그런 거란다. 이런 괜찮은… 호위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았을 거다.”
“….”
그릇은 슬쩍 여명을 바라봤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마법 대결에서 용기라도 얻은 걸까? 그녀는 강 중령에게 받은 USB를 꽉 쥐며 말했다.
“혹시라도 이 USB를 빼앗을 생각이라면….”
“아니, 그럴 생각 없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어도 너한테 줬을 거란다.”
“…네?”
“그 USB를 가지고 있으면 원로들이 병신 짓할 때 도움이 될 테니까. 명색이 마탑의 미래인데, 너도 정치적으로 쓸만한 정보 하나 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대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여명과 그릇은 서로를 바라봤다.
처형관은 아직 몸에 남은 얼음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오늘 그걸 발표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누구 씨가 헬기를 조진 덕분에 한국군이 뿔이 잔뜩 났거든.”
누구 씨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발막은 슬쩍 여명을 바라봤다. 그가 헬기 조종사를 저격한 걸 눈치챈 걸까?
아니,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분명히 눈치챘으리라.
여명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강 중령을 죽인 이유는 뭐요?”
“그릇을 공격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면 믿어줄 건가?”
“아니. 입에 침이나 바르라고 대답하겠지.”
“이거,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친구로군. 좋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차피 죽일 거 빨리 죽이는 게 낫다고 봤네. 중요한 USB도 받았고, 다른 이야기는 굳이 들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야.”
“….”
“지구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애국자는 더러운 혀를 가지고 있는 법이니. 괜히 더러운 말로 우리 그릇의 귀를 더럽힐 필요는 없잖는가.”
정작 피를 뒤집어 써서 물리적으로 더럽혀진 그릇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명은 그의 말 중 ‘어차피 죽일 거’ 란 부분에 집중했다.
설마? 하고 고개를 기울이기 무섭게, 그가 정답을 말했다.
“그러면 내일 신문 1면에는 이런 기사가 올라가겠군. 마탑의 그릇, 승만 시티를 위협하던 방공호의 괴물을 무찌르다.”
역시나였다. 그 사이에 여명의 계획을 간파하다니. 마법사다운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나?
여명은 확인하는 겸, 한 가지 질문을 더 꺼냈다.
“…일개 학생인 그릇이 이만한 괴물을 죽였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발막은 잘린 팔을 흔들며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마탑 처형관이 팔이 잘릴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
“이 팔을 보면 아무리 의심 많은 사람이라도, 기껏해야 처형관이 괴수를 쓰러트린 공을 그릇이 도둑질 했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겠지. 설마 괴수가 직접 그릇을 찾아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야. 안 그런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팔을 자른 거라고?
‘적은 아니지만… 그냥 여기서 죽이는 게 나을지도.’
여명이 고민하는 사이, 방공호 저편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군화 소리. 한국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