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33화(433/817)
***
마탑의 도시, 히라리아로 향하는 열차는 최악이었다.
특등실의 침대는 아늑했고, 기차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훌륭했으며, 직원 서비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습격이 없었다.
네크로맨서, 하다못해 강도 정도는 만날 줄 알았던 여명은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며 책을 탐독했다.
그런데 왜 최악이었느냐?
시도 때도 없는 한국인들의 감시 때문에? 아니면 그릇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열성 팬들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열차 여행을 최악으로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마탑의 처형관이었다.
그는 여명의 정체를 알아낸 그 순간부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마탑이 얼마나 썩었는지 아나? 원로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뒤져야 좀 제대로 굴러갈 정도야.
-게다가 요즘은 또 무슨 이상한 계획을 짜는 건지… 늙은이들끼리 모여서 숙덕거리는 거 보면 무슨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니까? 이게 마탑이야, 악의 조직이야?
현 마탑에 대한 불만부터…
-시대가 변했어. 마법을 배우고 싶으면 마탑보다는 MIT나 레닌그라드 대학에 가야지. 그랑제꼴? 아, 프랑스 놈들은 좀…
-사실, 마탑이 이 꼴이 되도록 유지되는 건 전부 지구인들 덕분이야. 마도구에 프리미엄을 왕창 붙여서 사들이거든. 지금은 십만 달러에 팔리는 감지 마법 있지? 그거 원래는 금화 한 닢짜리였어.
현대 마법사들의 애환.
-냉기는 수식이 쉬운 대신 마나를 다루는 게 어려운 편인데, 대단한 재능이야.
-그나저나, 냉기 마법사들이 자네 정체를 알면 좋아하겠어. 요즘 마도구 학파 쏠림 현상 때문에 원소 학파들이 영 힘을 못 쓰거든. 나 같은 전기 쟁이야, 어디 전력 회사에 취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냉기로 뭘 하겠나? 지구 온난화 방지?
여명의 마법 실력에 대한 평가와…
-히라리아에 도착하면, 고급 식당은 절대로 가지 마. 돈만 많이 받고, 맛은 형편없거든. 조미료 하나 없는 전통 마법사의 식단이라니… 우웩.
-그리고 만약에 자네가 진짜 용사라면… 어… 정말로 다른 종족한테 꼴… 아니, 성적인 매력을 느끼나?
마지막으로 시시콜콜한 잡담들까지.
어찌나 말이 많은지, 역으로 정보를 캐내려던 여명이 질려서 입을 다물 정도였다.
대체 어디부터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정보의 홍수.
단순히 말이 많아서라기에는 의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여명이 ‘그저 마탑 도서관에 볼일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한 뒤에 보여준 반응이 그랬다.
-도서관이라. 비밀이 많은 곳이지. 아, 혹시 그거 아나? 마탑 도서관에는 전대 성녀님이 쓰신 연구기록이 있다는 거?
단순히 우연이라기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
여명은 괜히 그의 말솜씨에 휘말리기 전에 세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세티는 방이 아닌 식당 칸에 있었다.
“나도 도망쳤어.”
식당 칸 의자에 앉은 세티는 피곤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그릇도 처형관처럼 계속 떠들었어?”
“아니, 떠들지는 않고 질문을 하더라.”
“질문?”
“너, 나, 성녀, 쇠미리… 우리 배경에 대해서.”
“갑자기 왜?”
“같은 용사 파티끼리 아는 게 없어서 그렇다는데 뭐…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아서 적당히 대답했더니, 질문이 끝이 없더라고. 밤새 질문했다면 믿겠어?”
“….”
여명이 헛웃음을 내뱉자, 열차가 덜컹거렸다.
식당 칸의 직원들이 익숙한 듯 떨어지는 컵과 접시를 붙잡는 사이, 여명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복수에 대한 것도 말해줬어?”
“그건 아직 말 안 했어… 굳이 걔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그랬다. 용사 파티라고 해도 마하간의 말에 따라 뭉쳤을 뿐, 그릇이 여명과 함께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전설처럼 마왕을 쓰러트릴 일도 없었다. 당장 여명부터가 마왕의 심장을 빼돌린 당사자 아닌가.
뭐, 어쨌거나.
여명은 그제야 그녀를 만나러 온 이유를 꺼냈다.
처형관 발막은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에게 정보를 알려주는가?
세티는 그가 여명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큰 걱정은 없이 말을 이었다.
“널 이용할 생각이겠지. 문제는 뭐에 이용할 것이냐인데… 별문제 없지 않을까?”
“…우리 둘이 다니면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경우가 더 적지 않나?”
여명이 그렇게 한마디 하자, 세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이미 도와줄 사람을 불렀으니까.”
도와줄 사람? 누구?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안내 방송이 식당 칸을 울렸으므로.
[고객 여러분, 만송 열차와 함께 즐겁고 편안한 여행 되셨습니까?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목적지인 히라리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소지품을 두고 내리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순간, 소중한 기억! 저희 만송이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히라리아.
초대 용사 전설만큼이나 오랫동안 마법사들을 배출해온 마탑의 도시.
이곳에는 탑이 없다.
지구의 영향을 받은 높은 빌딩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시카고나 시드니처럼 발달한 도시와 비교하면 어딘가 부족했다.
그렇다면 왜 히라리아가 마탑의 도시인가?
질문의 답은 마탑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깊은 탑.’
그것은 어떤 비유나, 소개가 아닌 담백한 진실이었다. 마탑은 하늘이 아닌, 지하를 향해 뻗어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으니까.
지구에서 가장 깊은 모스크바 지하철보다도 더 깊은 지하 건물.
상식적인 지구인들은 그게 왜 ‘탑’이냐고 물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웃으며 오래된 전설을 알려줬다.
옛날, 옛날에- 라는 단어로 시작한 전설은 무려 초대 용사가 살아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시절, 마탑은 정말로 하늘 향해 솟구친 건축물이었다.
구름을 뚫을 정도로 드높았기에 ‘높은 탑’, 혹은 ‘하늘 탑’이라 불릴 정도로 높았다나?
하지만 어느 날, 초대 용사와 마탑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마탑의 욕심이 너무 심해서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역으로 용사의 욕심이 너무 컸다는 등 엇갈린 기록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그러나 진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싸움의 결과만큼은 현대까지 기억되고 있었다.
‘앞으로 영원히, 너희는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용사는 마법사를 넘어, 마탑 그 자체를 저주했다. 그리고 ‘높은 탑’이라 불리던 탑을 통째로 뽑아 땅에 거꾸로 처박았다.
탑은 부서지지 않고 마법사들에게 걸린 저주를 따라 지하로 파고들었고, 높은 탑은 그대로 ‘깊은 탑’이 되었다.
졸지에 세상이 거꾸로 변한 마법사들은 반성의 의미… 혹은, 반항의 의미에서 탑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하여 히라리아는 탑이 없는 마탑의 도시가 된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설명을 끝낸 그릇이 일행을 바라보자마자, 발막이 덧붙였다.
“좋은 이야기에 초를 쳐서 미안하지만, 사실 우리 마법사들은 저 전설 안 믿어.”
“….”
“700년 전에 한 마탑주가 계산해봤는데, 이만한 탑이 망가트리지 않으면서 땅에 처박으려면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보다 용사 개인이 강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거든. 허무맹랑하지?”
그릇은 슬그머니 여명의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용사라면… 그만큼 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 꼭 진짜 용사를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예? 아뇨, 그게….”
또, 또 유도 질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여명은 그릇이 말실수하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처형관님. 저희는 역을 나서자마자 마탑부터 들를 생각입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발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힘들겠군. 아직 처리할 일도 있고… 나랑 같이 다니면 그쪽이 여러모로 피곤해질 거야.”
“….”
그렇게 말한 발막은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에케모를 조심하게. 그는 나보다 보는 눈이 좋으니.”
에케모?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으나, 발막은 그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여명의 주머니에 넣은 뒤 작별을 고했다.
“늦었지만, 마탑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하네. 천여명.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나지.”
“…다음에는 약속 잡고 만나시죠.”
“그래? 하지만 자네는 남자랑 약속 잡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
촌철살인을 날린 그는 대답도 듣기 전에 그대로 열차에서 내린 인파들 사이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눈에 담길 잠시.
여명은 ‘언제 정체를 들킨 거냐’고 묻는 그릇을 이끌고 역을 나섰다.
지구식으로 지어진 최신식 역 바깥, 히라리아의 풍경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니까,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풍경 그대로였다.
간단한 마법진이 새겨진 돌판으로 포장된 도로와 아샤의 기술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말없이 마법으로 움직이는 마차까지.
여러모로 마법의 도시 다운 풍경이었으나,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여명이 명하니 풍경을 보고 있자, 역 앞에 주차되어 있던 마법 마차가 일행들 앞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마차 문이 혼자 스르륵 열리더니, 마차 안에 앉은 노인네가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서 온 관광객이십니까? 한국? 미국?”
“….”
뭐야 이거? 여명이 그를 바라보자, 마법사가 보란 듯 양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히라리아의 명물 마법 마차. 쌉니다. 싸요. 하루 종일 대여해도 400달러. 관광 코스 안내비는 별도로 200달러.”
관광지라서 그런가, 물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마법사 같은 고급 인력을 저 가격으로 부려 먹을 수 있으면 싼 거 아닌가?
여명이 의미 없는 고민을 떠올리는 사이, 그릇이 앞으로 나섰다.
“마탑까지, 1달러.”
“오우, 시작부터 가격을 후려치다니, 이 얼마나 상도덕을 모르는….”
허허 웃던 마법사는 그릇과 마주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릇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상도덕을 모르는 건 그쪽이죠. 관광객 후려치기는 마탑에서 금지하고 있을 텐데요.”
“….”
“당신, 어느 학파 출신이죠? 제가 누군지 알아본 거 같은데, 그쪽 학파에 고발해볼까요?”
그러자 늙은 마법사는 슬그머니 마차 문을 닫았다.
닫으려 했다.
하지만 세티가 마차 문을 꽉 붙잡았다. 그가 잠시 끙끙거리며 문을 당겼으나, 초인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애석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릇. 돌아온 걸 환영하오. 마탑까지 태워주면 되겠소?”
“네. 이분들도 포함해서.”
“3달러요.”
“1달러.”
“…두메아 가주께서 손녀 교육 한번 독하게 하셨군.”
마법사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문을 열었다.
개도 제집에서는 먹힌다는 걸까. 여명과 세티는 당당하게 브이를 날리는 그릇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여명은 박수로 호응해준 뒤, 마차에 몸을 실으며 말했다.
“바로 마탑 도서관으로 가자.”
***
시간을 조금 돌려, 제미니 시티라 불리는 도시의 외곽.
주변에서 잘 보이지 않는 작고 깔끔한 공동묘지에서, 한 남자가 비석을 닦고 있었다.
『위대한 기사이자 제국 기사단의 전 부단장, 이곳에 잠들다.』 라고 적힌 비석.
어지간히도 꼼꼼히 닦았는지, 비석은 반질반질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도 부족하다 느낀 듯했다. 그는 비석을 다 닦자마자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풀을 뜯었을까?
머리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슬그머니 기울어질 무렵, 남자의 등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부단장, 또 여기 계셨습니까?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부단장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양복을 입은 드워프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몸이 상하기는, 그냥 취미야, 취미.”
그가 휘휘 손을 저으며 대답하자, 드워프가 가볍게 반박했다.
“전 부단장님은 그런 취미 별로 안 좋아하실 겁니다. 차라리 선 자리나 알아보시죠? 첫 째를 낳으면 그분 이름을 붙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비석의 주인이 남긴 유언이자 부탁. 부단장이라 불린 남자는 뽑아 놓은 잡초를 봉투에 담으며 대답했다.
“…너까지 그러기냐? 조직원들이 다 나한테 그 소리 하는 거 알지?”
“뭐… 약속은 약속 아닙니까? 억울하시면 편지에 유언을 넣어둔 그 녀석에게 따지시죠.”
“….”
반박의 여지가 없는 걸까. 부단장은 투덜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됐고, 무슨 일이야? 단장이 또 직접 나서신다고 성질내셨나?”
“예, 그것도 있습니다만…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도 저희 조직만 아는 연락처로.”
“편지?”
드워프는 곧바로 편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고풍스럽게 봉인된 편지 봉투에는 ‘피를 나눠준 사람’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피? 설마…?”
곧바로 편지를 뜯은 남자는 천천히 글을 읽었다. 한자라도 놓칠까 꼼꼼하게.
이윽고 편지를 모두 읽은 뒤, 그는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드워프가 물었다.
“어디서 온 편지입니까?”
“…은인.”
“아… 생각보다 빠르게 은혜를 갚을 수 있겠군요. 단장님을 부를까요?”
“아니, 단장을 부르는 건 내가 하지. 너는 특급 기차 하나 수배해줘.”
“예, 바로 연락하겠… 한데, 목적지는 어디라고 전할까요?”
부단장이라 불린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레 편지를 접어 넣은 뒤 말했다.
“히라리아.”
***
마탑 1층, 그러니까 마탑 중 유일하게 지상에 드러난 부분은 거대한 바둑돌을 닮아 있었다.
천장이 막힌 넓은 원형 건물.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회백색 벽을 자랑하는 건물은 주변의 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점은 따로 있었는데, 드넓은 벽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차의 창문 밖을 구경하던 세티가 의아해할 정도.
“마법사들은 일조권에 별 관심이 없나?”
하지만 잠시 후 도착한 출입구에 비하면 창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 건축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겠네.”
마탑의 출입구는 문자 그대로 박살 난 돌덩이였다.
몸통만 한 거석부터 작은 조약돌들까지.
무너진 벽 앞에 무절제하게 쌓인 돌들은 마법사가 다가올 때마다 자동으로 움직이며 닫히고 열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돌로 만든 자동문이야 뭐야?
마차에서 내린 세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돌덩이를 바라보자, 마차를 몰던 마법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뭐…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이상하긴 하지.”
“…마법사가 봐도 이상해 보일 거 같은데요?”
“원래 마법사는 다 이상한 족속들일세.”
“…하.”
세티가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여명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조지 워싱턴이 그려진 1달러 지폐가 아닌, 율리시스 그랜트가 그려진 50달러짜리 지폐 두 장.
첫 약속보다 많은 돈을 본 마법사가 눈을 빛냈다. 여명은 그의 손에 지폐 뭉치를 쥐여주며 작게 속삭였다.
“이거 받으시고, 간단한 소문 하나 내주시겠습니까?”
“오… 사람 쓰는 법을 아는, 지혜에 통달한 분이셨구려. 어떤 소문이면 되겠소?”
“그릇이 마탑 말고 다른 곳에 갔다는 소문이면 충분합니다.”
“아하, 기자들을 피할 생각이시구려?”
여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돈을 챙긴 마법사는 끌끌 웃으며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이윽고 그들을 태워준 마차가 떠난 직후, 그릇이 물었다.
“저런 사람을 뭘 믿고 그런 부탁을 했어? 오히려 기자들한테 내 이름 팔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러라고 준 거야.”
“…응?”
여명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저 늙은이, 방금 저 돈 받고 기자들한테 그릇이 어딨는지 말하면 돈이 된다는 걸 떠올렸을 거 아냐. 이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지.”
“….”
“그리고 그렇게 기자들이 몰리면… 마탑 어르신들도 고민하지 않겠어?”
“고민? 무슨 고민?”
“한국과의 관계에 똥칠을 한 그릇을 혼낼까 말까 하는 고민.”
그릇은 그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생각했냐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괜한 심술을 담아 짧게 투덜거렸다.
“…그냥 네가 도서관에 쉽게 가기 위해 그러는 건 아니고?”
날이 선 말투였음에도, 여명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것도 있네. 근데 난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몰라? 도서관은 마탑 4층에 있어.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티가 끼어들었다.
“지구에는 마탑 내부를 찍은 영상물도, 정보도 거의 없어. 당연히 다큐멘터리도 없고. 마탑은 철저한 비밀주의잖아?”
“….”
그, 그런가? 뒤늦게 자신의 상식이 타인의 상식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릇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슬쩍 여명의 눈치를 봤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4층이라… 생각보다 낮은 곳에 있네? 아, 그리고 더 알려줄 게 있으면 알려줘. 여기서는 네가 가장 전문가니까.”
“….”
저게 정녕 뒷골목 출신 청소부의 인성이란 말인가. 그릇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앞장섰다.
그리고 일행이 마법사의 문 앞에 서자, 벽을 막은 돌들이 우르르 움직이며 일행을 환영했다.
다큐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여명이 눈을 빛내고 일행이 그대로 문에 들어선 순간.
그릇은 미처 말하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안에 들어선 뒤에는 바로 걸으면 안-”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충고였다.
***
-안에 들어선 뒤에는 바로 걸으면 안 돼요.
그 말이 끝나는 시점에서 여명과 세티는 이미 발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탑의 내부를 밟은 직후, 하늘과 땅이 바뀌었다.
발은 위로, 머리는 아래로.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두 사람은 그대로 천장을 향해 ‘추락’했다.
두 사람이 천장에 엉덩방아를 찧을 걸 예상한 그릇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모르는 걸 알려달라고 한 지 몇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성녀가 처맞는 것처럼 그녀도 머리를 맞게 될까? 그릇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길 잠시.
어째서 일까, 추락음 대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그릇이 슬그머니 눈을 뜨자, 여유롭게 천장에 착지한 여명이 보였다. 그것도 세티를 받아낸 자세로.
주변 마법사들이 오오- 감탄하는 가운데, 여명이 세티를 천장에 내려주며 말했다.
“중력이 반대로… 탑이 통째로 거꾸로 처박혔다길래 어쩌나 했는데, 이런 식이었나?”
그 짧은 사이에 뒤바뀐 중력에 적응하다니. 그릇은 감탄을 삼킨 뒤 대답했다.
“예, 탑 안에서는 중력이 전부 거꾸로 적용돼요.”
천장… 아니, 거꾸로 처박힌 마탑 바닥에 선 여명은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릇이 그에게 사과하려는 찰나, 1층 구석에 앉아 있던 흰색 로브의 마법사가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릇,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저분들은…?”
남들과 마찬가지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마법사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여명을 곁눈질했다.
아마 엉덩방아 찧는 꼴을 못 본 게 아쉬운 듯했다.
마법사들의 인성이란. 그릇은 한숨을 삼키며 마법사에게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데윈. 이분들은 아카데미에서 붙여준 호위예요.”
“호위라. 탑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당연히 탑주님을 뵈러… 아니, 우선 도서관부터 들릴 수 있을까요?”
그릇은 예약이니 뭐니 잔소리를 예상했으나, 데윈이라 불린 마법사는 의외로 간단히 허가를 내줬다.
“예, 물론이죠. 오자마자 도서관이라니, 역시 그릇이군요.”
“….”
그렇게 말한 데윈은 품에서 작은 보석 세 개를 꺼내 일행에게 각각 쥐여줬다.
뭔데 이게? 여명이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그릇을 바라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이건 허가증… 같은 거예요. 이게 없으면 마탑 내부 방어 마법들이 공격하거든요.”
“….”
뒤이어 데윈이 덧붙였다.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시체 치우는 건 영 귀찮아서.”
“그럴 일 없으니 재수 없는 말하지 마시고 안내나 해주세요. 그리고 본인이 시체 치우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릇이 타박하자, 데윈은 슬쩍 웃었다.
“그래도 시체를 보긴 하지요. 최근에 괴수 연구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많은 시체를 봤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 하실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데윈은 1층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무수한 계단 중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그릇을 비롯한 일행이 뒤따르는 가운데, 세티가 여명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 분명히 괴수 연구라고 했지?”
마탑과 한국의 연결고리가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여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음모에 발을 내밀었다는 의심과 함께 일행은 땅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었다.
벽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계단에 거꾸로 매달려 지하로 내려가자니 감각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나마 벽에 걸린 고급스러운 초상화 덕분에 멀미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여명이 입을 열었다.
“이 초상화… 어떤 분들을 그린 거야?”
“마탑의 역대 대마법사들. 대부분은 마탑주와 그의 제자들이야.”
그릇이 대답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여명에게 아는 척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껍다는 듯 계단을 오르는 내내 초상화에 적힌 마법사들의 이름을 읊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행은 익숙한 초상화를 발견했다.
어딘가 꼬장꼬장한 노인네의 초상화.
“…마하간.”
여명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초상화를 눈에 담자, 데윈이 덧붙였다.
“위대한 마법사셨죠. 이제 막 지구와 아샤가 연결되던 시절의 혼란을 극복할 만큼 위대하지는 못하셨지만.”
전전대 마탑주를 향한 평가치고는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여명은 살짝 불쾌감을 느꼈지만, 애써 감정을 숨기며 물었다.
“혹시, 이분의 제자는 안 계십니까?”
“…제자요?”
“예,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인데, 혹시 제자분이 있다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럴싸하게 꾸며낸 거짓말. 하지만 돌아온 데윈의 반응은 여명의 예상을 조금 벗어나 있었다.
비웃음.
그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
“마하간께서 유일하게 남긴 제자는 급이 좀… 많이 떨어지는 마법사라서요. 스승의 이름이 아니었으면 마탑에 있지도 못할 정도죠.”
여명은 그릇을 보며 그게 사실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데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릇이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에케모는 이 마탑에서도 밑바닥 중 밑바닥이니….”
“…에케모?”
그건 발막이 헤어지기 직전에 경고했던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자, 데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그 제자의 이름입니다. 아시는 이름입니까?”
“아뇨, 어딘가에서 들어본 거 같아서….”
“에이, 그냥 착각일 겁니다. 마탑 쓰레기 청소나 하는 사람인데요.”
마하간의 제자이자 발막이 직접 경고한 마법사가 쓰레기 청소부라고? 여명은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걸 확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윈은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지껄였다.
“뭔가 배울 게 있다면 차라리 그릇에게 배우는 편이 나을 겁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벼운 정적 속에서 발소리만 울리고 일행이 아래로 내려가길 잠시.
일행 앞에 큼지막한 철문이 보였다. 문 주변에는 초상화 대신 여러 종족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용사가 씨를 남긴 종족들이었다.
데윈이 계단 구석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자, 저 문 너머가 마탑 도서관입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고… 그릇, 탑주님께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리죠. 괜찮겠습니까?”
“예, 부탁드려요. 마스터 데윈.”
그렇게 데윈이 계단 아래로 내려간 직후, 일행은 철문을 향해 다가갔다. 마탑의 입구의 돌덩이들과 마찬가지로 철문은 혼자 열렸다.
자동문 진짜 좋아하네.
여명은 실없는 감상과 함께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 너머의 공간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도서관은 3층으로 이루어진 복층 구조였는데, 척 보이는 크기만 해도 웬만한 지하철역 승강장 두세 개를 이어 붙인 것보다도 넓었다.
“여기서 언제 연구기록을 찾아?”
크기에 질린 여명이 중얼거리자, 그릇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저기 봐.”
그녀의 손가락 끝, 도서관 천장에는 발광 마법으로 보이는 빛나는 구체와… 무수한 책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뭐야 저게?”
세티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날아다니던 책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뜸 몸통을 팔락거리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무슨 까치 떼가 날아오는 듯한 모습.
화들짝 놀란 세티가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려다가 그릇에게 제지당하는 사이, 내려앉은 무수한 책들… 혹은 그중 맨 앞에 있는 책이 말했다.
-반갑다. 젊은 마법사들이여. 찾는 책이 있나?
마법의 책? 여명이 한 번 더 놀라는 사이, 그릇이 대답했다.
“책은 아니옵고, 전전대 마탑주, 마하간님이 남긴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마하간의 기록? 잠시만 기다리게…
여명은 책이 말한다는 사실보다 책의 목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좋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슨 성우가 녹음한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그릇이 말했다.
“대단하지? 책이 너무 많아서, 사서 대신 이런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어. 무려 500년 전에 만들어진 마법이지. 대단하지?”
“어, 그래, 대단하네….”
그냥 전산화하면 안 되나? 여명이 어영부영 대답하는 사이, 뭔가를 끝낸 책이 다시 말했다.
-찾았습니다. 마하간이 남긴 기록 1,119건. 이 중 공식적으로 발표된 연구만 발췌하겠나?
그릇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중에 전대 성녀님이 남긴 기록만 찾아주세요.”
-전대 성녀? 전대 성녀….
책에 눈이 있다면 눈살을 찌푸리고 있지 않을까. 잠시 몸체를 퍽락거린 책은 이내 답을 내놨다.
-찾았군. 전전대 마탑주 마하간이 전대 성녀에게 받아 도서관에 기증한 기록 12개.
“그것들을 전부 대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니, 불가능하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가능하다뇨? 왜죠? 제 대여 권한은….”
-대여 권한은 상관없다. 기록이 도서관에 없을 뿐이니까. 12개 기록 모두 대여 중이다.
“대여 중…? 언제 반납되죠?”
-모른다. 기록은 모두 11년째 연체 중이다.
이런.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여명은 이마를 짚었다. 그릇과 세티 또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직감하는 가운데, 책이 덧붙였다.
-마하간과 상관없는 전대 성녀의 기록이 하나 더 있다. 그건 어떤가?
“전대 성녀님의 기록? 그게 뭡… 아니, 받아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여명이 대답했다. 책은 마치 코르부스의 부리처럼 텁- 몸을 덮었으며 말했다.
-너무 큰 기대는 마라. 전대 성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마탑에 보낸 편지일뿐이니까.
“괜찮습니다. 보여주세요.”
여명이 대답하기 무섭게, 저편에서 종이가 날아왔다. 책도, 연구 기록도 아닌… 편지 한 장.
낡은 편지가 사뿐이 손에 내려앉은 순간, 여명은 눈에 힘을 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지 봉투 위에 적힌 글귀가 너무나 의미심장했으므로.
『언젠가 용사가 될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