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434화(434/817)
가장 열심히 대본을 외운 연기자만이 가장 완벽한 애드립을 칠 수 있다.
『???』
***
[평안한 날 보내고 계신지요.당신이 절 만난 적 있는지, 아니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믿어주세요.
이건 제가 당신을 위해 쓴 편지라는 걸.]
고풍스러운 글자와 함께 시작한 편지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꿈속에서 만났던 전대 성녀님의 냄새.
여명은 자신이 왜 이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모두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던가?
그는 의문을 씹어 삼키며 묵묵히 편지를 읽어내렸다.
그리고 세 번째 문단을 읽을 때쯤,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올림피아의 결과에 주눅 들지 마세요. 주인공을 위해 조작된 판에서 졌다고 아쉬워하기엔, 당신을 위한 무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답니다.]이건 그를 위한 편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를 위한 편지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며 만난 제국 기사단에게 무엇을 배우셨나요? 명예? 연민? 아니면 복수심?]성녀의 편지 속 ‘당신’은 그런 존재였다. 여명과 닮았으되, 그가 아닌 누군가.
주인공과 대적하고, 운명을 비트는 누군가…
그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여명은 멈추지 않고 계속 편지를 읽었다.
[아카데미 지하 하수도에 가보세요. 주인공이 먼저 가지 않았다면, 재밌는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랍니다.] [만약 프레아 칸과 만나게 된다면, 넌지시 성검에 대해 물어보세요. 어쩌면 당신이 차세대 성검이 될지도 모르니.] [혹시 LA에 가보셨나요? 그 아름다운 도시의 지하 깊은 곳에는 네크로맨서들에게 고통받는 데스나이트들이 있답니다. 그들에게 안식, 혹은 구원을 주시면 어떨까요?] [현대의 성녀는 어떤가요? 겉으로는 당돌하지만 속으로 상처가 많은 아이랍니다. 부디 그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그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성녀의 글씨를 곱씹었다. 퀴니 코완과는 다른 의미에서 고아하고 아름다운 글씨.
[편지 제목을 그렇게 써놓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기는 것도 웃기지만, 만약 당신이 용사가 되고 싶지 않다면… 하실 필요 없어요.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지만, 당신은 달랐으면 해요.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성녀 올림.
추신, 당신이 찾는 질문의 답은 히라리아 서쪽에 있습니다.]
이윽고 마지막 문단과 급하게 휘갈겨 쓴 추신까지 전부 읽은 후, 여명은 천천히 편지를 내려놨다.
바로 옆에서 편지를 훔쳐보던 그릇은 무슨 내용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하는 내용은 찾았어?”
“아니.”
그 이상을 찾았지. 여명은 뒷말을 삼키고 세티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편지를 힐끗거리던 그녀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얻은 기연 중 절반 이상이… 전대 성녀님의 안배였던 걸까?”
의문문으로 끝나는 말.
그러나 이 편지가 과거에 쓰인 게 확실한 이상, 그녀의 말은 담담한 사실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성녀가 아무리 미래를 본다고 한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왜 굳이 이런 편지를 남긴 거지?”
“….”
“마탑 도서관에서 전대 성녀님의 기록을 찾아야만 찾을 수 있는 편지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너한테 보낸 편지잖아.”
거기까지 말한 세티는 말없이 편지의 마지막 문단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대체 전대 성녀님과 무슨 관계야?’
여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가능성 정도는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바와 같이, 그가 변경백의 아들일 가능성.
그렇다면 자연스레 전대 성녀가 그의 어머니가 되리라.
비록 어머니를 가져본 적 없는 여명이었지만, 보편적으로 어머니란 존재는 자식에게 보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은 주는 법이다.
만약 이 편지가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라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안 맞아.”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건지, 세티가 입 밖으로 의문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펜을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차례대로 글자를 적었다.
[마왕 퇴치-대외활동-변경백 전쟁-성도 감금-사망.]그건 최대한 짧게 요약한 전대 성녀님의 일생이었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릇이 눈을 굴리는 가운데, 세티가 말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전대 성녀님은 임신할 시간이 없었어.”
“….”
“성도에 감금되셨을 때는 임신하셨다는 게 그나마 말이 되는데, 그때는 이미 폐경기가 오셨을 테고, 또….”
“…변경백께서도 고자가 되신 뒤지.”
“그래, 맞아. 그렇다고 젊은 시절에 임신하셨다면 마하간이 모를 리 없고, 무엇보다 여명, 네 나이가 안 맞아. 지금 네가 50대… 아니, 60대는 넘어야 말이 될걸.”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여명은 문뜩 불사의 왕의 심상 속에서 만난 타이탄의 말을 떠올렸다.
[넌 대체 뭐냐? 어떻게 영혼의 나이가 사천 살이 넘을 수 있지?]사천 살. 그건 지구의 유일한 신성 사용자인 예수님보다도 이 천년 먼저 태어나야 가능한 나이였다. 성녀님의 자식? 택도 없었다.
하지만 타이탄의 말이 거짓이라면? 어쩌면 세티의 말마따나 그가 60대일 수도 있었다. 그가 미그니움과 함께 땅 속에 봉인된 시간이 수십 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곧바로 반박이 떠올랐다. 성녀님이 진짜 그의 어머니라면 왜 그는 미그니움과 함께 봉인 됐는가?
…답 없는 가능성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신명을 찾으면, 이 의문 또한 해소되리라는 것.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의 몸속에 깃든, 혹은 본인 자체인 신이 이 땅에 떨어지며 그의 어머니를 직접 봤을 테니까.
설마, ‘답은 성녀에게 있다’는 퀴니 코완의 마지막 전언은 이걸 뜻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여명은 고민을 멈췄다.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편지 봉투에 넣은 그는 아직도 몸통을 펄럭이고 있는 마법 책에게 물었다.
“전대 성녀님의 연구기록을 대여한 사람.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책은 텁- 몸통을 접으며 대답했다.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에게 마법사의 개인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
“그럼 뭐, 마탑 소속이 물어보면 되겠네.”
그가 그릇을 바라보자, 그녀는 그대로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자 마법 책은 어디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책갈피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사비나. 위대한 황금께서 대여하셨습니다.
“…뭐? 에케모가 아니라?”
대여한 사람의 이름을 들은 그릇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여명 또한 비슷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비나… 그건 계단을 올라오며 본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릇은 황당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니까, 전대 마탑주께서 그 연구기록을 빌려 가셨다고요?”
-그래서 여태껏 수거하지 못했다.
“….”
일이 이렇게 되네. 그릇이 입술을 깨무는 가운데, 여명은 천장- 정확히는 바닥을 보며 말했다.
“현 마탑주를 만난 뒤에는 전대 마탑주야? 참 재밌는 경험이네.”
“…만나면 재밌다는 소리 안 나올걸요.”
한숨 섞인 말투로 말한 그릇은 그대로 도서관 저편에 있는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행 또한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법 책이 여명을 불러 세웠다.
-잠깐, 전대 성녀님의 편지를 대여하려면 이름을 알려줘야 한다.
“내 이름?”
-그 편지는 엄연히 마탑 도서관의 물건이다. 대여 기간은 최대 14일이다.
14일이라. 여명은 편지지를 인벤토리에 넣은 뒤 잠시 고민했다.
여명? 당연히 안 되고. 쇠똥구리? 아니, 이것도 안 되고…
어차피 평생 돌려주지 않을 거, 미운 놈 이름이나 써먹어야지.
“파순. 내 이름은 파순이야.”
-파순, 기록했다. 시간 꼭 지켜라. 연체하면 큰일 난다.
***
솔직히 말해, 마탑의 계단은 난장판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1층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계단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도서관에서 6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거의 절벽에 가까웠고, 6층에서 9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문자 그대로 나무 사다리였다.
여명이 ‘왜 엘리베이터 안 만들고 이런 멍청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거냐’ 고 묻자, 그릇은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했다.
첫 번째 이유는 에어컨 혁명 이후 마법사들은 마탑에 비 마법사가 들어오는 것을 극히 경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사가 아니면 올라가기 어려운 계단을 계속 사용한다나?
그리고 두 번째 이유이자 진짜 이유는 마탑의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괴팍한 마법사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현 마탑주는 최고로 괴팍한 노인이라 할 수 있었다. 마탑의 최하층, 탑주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은 미끄럼틀이었으므로.
그것도 엉덩이가 시원해질 정도로 가파른 미끄럼틀.
그릇은 익숙한 듯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으나, 여명은 세티를 끌어안은 채 신발 바닥을 얼려가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빙빙 구부러진 미끄럼틀의 끝에 도달하자, 마법사다운 공간이 일행을 반겼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마도구들과 어지럽게 널린 종이, 그리고 바닥에 쏟아진 물약과 영약들까지.
꼭대기 층답게 방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마법사의 방이라는 이미지에는 딱 부합했다.
하지만 방의 주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법사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살로메, 왔구나. 어때,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었니?”
반갑게 웃으며 그릇을 반기는 그는 마법사보다는 지구의 부자처럼 보였다.
고급스러운 양복과 실크 넥타이, 그리고 수만 달러짜리 시계라니.
일본의 비시스미나, 둔간 중공업의 재벌들이나 할법한 복장 아닌가?
차라리 아카데미 마법학부장 가단이 더 마법사답다고 하면 너무 솔직한 평가일까.
세티를 내려놓은 여명이 애써 감상을 숨기는 가운데, 그릇은 익숙한 듯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 탑주님. 신경 써주신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직후, 마탑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흠, 이제 사람 같은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친구 덕분인가?”
마탑주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명과 세티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한 여명은 조금 당황했다.
저건 노골적일 정도로 선명한 질투의 눈빛이었으므로.
“천여명과 홍세티. 여기서는 가면 쓸 필요 없네. 내 사랑하는 제자가 자네들이 올 거라고 고자질했으니.”
“….”
여명은 그 고자질을 본인이 시켰다고 말하는 대신, 순순히 피눈물의 환상을 벗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드러내자 마탑주의 눈빛이 한층 더 질투로 물들었다.
“…환상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변신 무술이라. 훌륭하군.”
칭찬치고는 어딘가 날이 선 말투였다. 환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런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여명이 애써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 인성까지.”
“…?”
이 사람은 또 왜 이러지? 여명과 세티가 의문을 품는 사이, 마탑주가 대뜸 물었다.
“자네들이 보기에 우리 그릇은 어떻지?”
“…훌륭한 친구입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릇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마탑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공허한 칭찬이군. 살로메야 눈치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우리 살로메가 실패했다는 걸.”
“…?”
“철혈의 아이들 계획.”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명은 곧바로 정색했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표현. 마탑주는 코웃음을 쳤다.
“알고 있으면 대화가 빠르겠군. 어떤가? 실패작과 함께 다니는 성공작의 기분은?”
“…실패작?”
이번에는 세티가 되물었다. 그릇이 실패작이라니, 그럼 그녀와 자매들은 뭐지?
마탑주는 탁탁, 일그러진 표정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 실패작. 우리 멍청한 마법사들은 마법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능 강화에만 몰두했다. 무술과 신성을 모두 쓰기 위해선 별을 떨어트려야 된다는 걸 몰랐거든. 아니, 정확히는 지구인들이 알려 주지 않았지.”
“….”
“응? 그러니 말해보게. 몸속에 신을 품고, 올마스터로 사는 기분은 어떻지?”
세티는 그제야 그릇과 자신의 차이를 깨달았다.
기능 강화에 성공했으되, 가능성을 얻지 못한 그릇과 가능성에 몰두했으되 재능은 얻지 못한 그녀.
둘은 마치 거울처럼 반대되는 실패작들이었다.
그래서, 그렇기에.
세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마탑주의 조롱과 마주할 수 있는 건 여명뿐이었다.
여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실패작이 아닙니다. 실패한 건 마탑이죠.”
“…오호?”
“왜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당돌하다 못해 도발적인 언사. 여명을 보는 마탑주의 눈 위로, 질투 대신 다른 감정이 깃들었다.
기대와 의문.
“마탑의 실패라… 재밌는 의견이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마탑이야말로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 왜, 미국도 버텨낸 우리가 한국 따위에 겁먹을 것 같나?”
“아뇨, 한국 말고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명의 금색 눈이 가라앉은 순간, 마탑주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