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39)
을 위한 세계는 없다-439화(439/817)
EP.439 조연의 계보 (5)
* * *
“에케모, 우둔한 에케모….”
거기까지 말한 카레닌은 갑자기 입을 쩝쩝거렸다.
갑자기 뭔가 싶어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자, 녀석은 방구석 작은 냉장고에서 캔 콜라를 꺼냈다. 그냥 목말랐던 거였나.
괴수가 문명의 상징인 콜라를 홀짝이는 모습이 참으로 묘했으나, 이어진 녀석 말은 더 묘했다.
“내가 만든 게임 속 에케모는, 한심한 악당이었어.”
열등감에 스승을 살해하고, 대책 없이 힘을 추구하다가 주인공에게 토벌당하는 악당.
“…하지만 이 세상에서 실제로 마주한 에케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
말하는 괴수를 보고 공격을 멈출 정도로 선량하고, 외모가 아닌 내면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
“혁명으로 몰락해가는 마탑을 구하기 위해 방랑하는 젊은 마법사… 열정적이었고, 다정했지.”
그가 본 에케모는 마치 잔잔한 강물 같은 남자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수많은 것들을 바다로 이끌어가는 강물 말이다.
“나는 금세 녀석과 친해졌지. 어떻게 보면 필연이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에케모는 두려움 속에서 방황하던 그에게 머물 곳과 우정을 주었다.
비록 ‘연구용 괴수 – 마탑 소유’란 딱지가 붙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했다.
카레닌은 마탑의 미래를 걱정하는 에케모에게 수많은 비밀을 알려주었다.
게임 제작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들과 지식들, 심지어 미래에 대한 비밀들까지.
“우리는 위대한 여정을 떠났어. 마하간, 그 무심한 마탑주를 대신해 동료들을 모으고….”
카레닌은 현 마탑주를 바라봤다. 토마시는 자신이 그 ‘동료’에 포함된다는 걸 인정하듯 헛기침했다.
괴수는 다시 여명을 보며 말했다.
“가장 먼저 지구의 학문을 탐구했지. 막스 보른, 루이 드 브루어, 스티븐 호킹, 스티븐 와인버그… 위대한 과학자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고, 우리의 마법에 지구의 과학을 더한 새로운 학파를 열었-.”
그때, 현 마탑주가 끼어들었다.
“리처드 파인만은 왜 빼?”
“….”
“아니, 우리가 그 양반 만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기억 안 나? 산업 스파이로 오해받아서 미군한테 쫓겼던 거. 우리 잡겠다고 헬기도 뜨고, 막….”
“…끄허흠.”
카레닌은 탄산이 섞인 트름으로 마탑주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릇과 세티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괴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마법은 지구의 이목을 끌었지. 우리는 지구와 싸우는 대신 계약서를 만들어 마법을 이곳저곳에 팔았고… 몰락해가는 마탑을 치유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어. 즉, 마탑을 구한 거야.”
“하지만 그때 마법의 저작권들을 팔아먹지 않았다면 마탑은 더 큰 부자가 됐을 텐데요.”
이번에 끼어든 건 그릇이었다. 카레닌은 콜라 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는 젊은 마법사들의 착각이지.”
“…착각?”
“지킬 힘이 없는 보물은 강도를 부를 뿐이란다. 얘야, 엘프와 드워프가 딱 그런 예제지. 우리가 군대를 보내는 것보다 싼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마탑도 불탔을 거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경쟁을 이용했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고작 마법사 나부랭이 몇 명으로 냉전 중인 슈퍼 파워 사이에서 줄타기할 수 있을 거라고? 왜, 차라리 핵을 만들라고 하지 않고?”
“….”
그릇은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아마 입술을 삐쭉이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카레닌은 애꿎은 포크를 깨작거리는 어린 마법사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에케모, 토마시, 사비나, 그리고 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최선이라 생각하는 결과를 얻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완벽해 보였지….”
어쩌면 이러기 위해서 이세계에 떨어지고, 괴수에게 잡아먹힌 게 아닐까, 행복한 고민에 빠질 정도로 완벽한 시간.
그때를 떠올린 괴수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행복한 기억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었으므로.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시나리오와 주인공에 대해 말해준 시점부터 뭔가가 어긋나기 시작했어.”
“…시나리오? 주인공?”
그릇은 마하간이 지나가듯 한 말들을 떠올리고 되물었다.
하지만 정작 카레닌의 시선은 여명과 세티에게 향해 있었는데, 그는 두 사람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혀를 날름거렸다.
“반응만 봐도 너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알겠군.”
여명은 여전히 마총을 내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우리 반응은 나중에 살피고, 그쪽 이야기나 빨리 끝내시지.”
“왜, 재밌지 않나? 아니면, 옛날이야기에는 별 관심 없는 스타일인가?”
카레닌이 칼날 달린 촉수로 턱을 긁적이는 찰나, 세티가 끼어들었다.
“아뇨, 그냥 긴 이야기를 싫어해요.”
“길다고? 이것도 꽤 줄인 건데….”
쩝쩝, 입맛을 다신 카레닌은 한 번 더 냉장고를 열어 먹을 걸 꺼냈다.
조금 전까지 세티 일행이 먹던 커다란 꿀 케이크.
“그러면 먹으면서 들어. 씹을 게 있으면 조금 덜 지루할 거야.”
“….”
푹, 괴수가 작은 포크를 꽂아 통째로 케이크를 내미는 모습이 여간 골 때리는 게 아니었다.
여명은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마탑주가 케이크를 챙겨 세티가 있는 테이블로 갔다.
“토마시, 제발… 위엄 좀 차리면 안 되겠어?”
“위엄?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졌는데, 위엄은 지랄.”
그렇게 말한 마탑주는 그릇 옆에 앉아 케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
세티마저 케이크에 포크를 가져가는 가운데, 여명은 이 바보 같은 상황에 물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꽁트 그만 찍고, 설명이나 계속해요.”
“아, 미안… 원래 저런 놈이 아닌데, 너한테 진 게 어지간히도 쪽팔렸나 봐.”
“….”
“아무튼, 에케모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지. 물론, 바로 티가 나지는 않았어. 그의 열정은 그대로였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에케모는 여전히 마탑을 위해 노력했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했다.
“달라진 건 방향성이었다.”
동료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에케모는 잔잔한 강물이 아닌 잔인한 폭포가 되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철저하게 숨기기 시작했어. 그 모든 게 겸손이라 믿은 나는 내 권능을 사용해 그의 기록을 조작했고….”
그렇게 음지에 숨어든 그는 금지된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반대하는 동료들을 무시하고, 원로원을 매수했으며, 끝끝내-
“…자신의 스승을 죽였다.”
“….”
“겉으로야 마법사 혐오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졌지만… 세상에, 용사 파티 출신 마법사를 누가 죽일 수 있겠나? 뒤통수를 노리는 제자가 아니고서야.”
여명이야 익히 아는 이야기였으나, 그릇은 달랐다. 그녀는 마하간을 죽인 게 그의 제자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 리액션은 저래야지.”
정작 여명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카레닌은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어쨌든, 스승을 치워버린 그는 자신을 따르는 동료를 차기 마탑주로 세웠다.”
“위대한 황금, 사비나?”
“그녀를 알고 있나? 하기야, 그녀가 우리 중 가장 유명하긴 하지. 현역 시절에는 일본 스미토모 그룹이나 둔간 중공업 매출만큼 마도구를 팔아먹었으니….”
거기까지 말한 카레닌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그의 목에는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마치 물건의 절취선처럼 뜨문뜨문 이어지는 혐오스러운 흉터.
“우리는… 아니, 나는 그제야 알았어. 에케모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
“대체 왜… 왜 그랬는지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알려 주지 않았어. 그 대신, 날 연구실에 처박았지.”
직후, 카레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흐느적거리던 촉수도, 장난스레 움직이던 손도 꽁꽁 굳은 채로.
그건 세티가 ‘양치기’를 언급할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여명은 그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침묵에 동조했다.
잠시 후, 카레닌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테베의 이오카스테 왕비가… 오이디푸스를 보며 느낀 감정이 이랬을까?”
“….”
“나는 내가 만들었던 게임 속 악당처럼 변해가는 친구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막을 수 없는 필연을 보며 체념했고, 이내… 모든 걸 포기했지.”
“골방에서 케이크나 구웠다고?”
“…그래, 그랬지.”
결국, 그는 모든 게 운명이라고 믿어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나리오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골방에 갇힌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스승을 죽이고, 원로들과 결탁해 바지 사장 마탑주를 세우는 에케모의 모습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으니까.
한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시나리오가 바뀌었더군.”
“…주인공이 나타나질 않았지.”
여명이 대답하자, 카레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야. 시나리오를 진행할 주인공이 나타나질 않았고, 프롤로그는 망가졌고, 또… 에케모는 멍청한 악당 이상이 되었더군.”
“이상이라고?”
“그래, 기껏해야 힘이나 키울 줄 알았던 그는….”
카레닌은 바로 말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마치, 이걸 말해도 될까? 망설이는 것처럼.
기다려줄 생각이 없던 여명은 총구를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꾸욱-퀴니 코완의 마총이 그의 이마를 누르고, 화약 냄새가 괴수의 피부를 짓누르는 순간.
케이크를 한껏 베어먹은 마탑주가 분위기를 망쳤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고 있어? 그냥 괴수 군대 만들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한국 정부 편도 아니고, 딱 봐도 다들 알건 다 아는 눈치구만.”
그제야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린 카레닌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씨… 진짜 분위기 좀 잡으면 안 되냐? 이게 다 협상의 기술인 거 몰라?!”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인데, 분위기가 뭐가 필요해? 그냥 케이크나 몇 개 더 구우면서 보상으로 뭘 줄 수 있냐, 그런 건설적인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야! 너 그 케이크 그만 처먹어!”
더 이상 참지 못한 카레닌은 여명이 겨눈 총구도 무시한 채, 마탑주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
마탑의 서쪽, 히라리아의 쓰레기 매립지 아래 깊은 곳.
검붉은 전등 아래 기다란 호스가 연결된 철제관들이 가득한 공간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기다란 로브를 입은 여인은 유령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걸음마다 검붉은 전등이 꺼지고, 철제관들이 꿈틀거리며 안에 담긴 무언가가 으르렁거리길 한참.
방의 끝자락, 가장 거대한 관 앞에 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에케모.”
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듣고 있는 건 확실했다.
“마탑에서 연락이 왔어. 카레닌과 토마시가 그릇을 만나고 있어…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둘이 우리를 방해할 일은 없을 거야.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말끝을 흐린 여인은 천천히, 로브 자락 속에서 두꺼운 연구 일지를 꺼내 내려놓았다.
다섯 신의 상징과 전전대 마탑주 마하간의 인장이 새겨진 연구일지.
“예언대로, 누군가 이 문서를 찾으러 왔어. 이름은 파순… 아마 가명인 거 같아. 어떻게 할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마찬가지로, 내가 처리할게. 누구도 너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야….”
조심스레 관을 쓰다듬은 여인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황금색 로브 사이로 기다란 철제 지팡이를 뽑아 든 그녀의 손짓을 따라, 철제관을 묶어 놓고 있던 잠금 장치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관 속의 무언가가 우르르 깨어나는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선언했다.
“…이 세상 모두를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