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4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43화(443/817)
EP.443 참을 수 없는
* * *
우리는 혁명을 팔았을지언정, 구원은 팔지 않았다.
[당신들이 우리와 뭐가 다르냐는 사제의 질문에,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의 대답.]***
“이야,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빨아가는군.”
홀가분하게 손을 터는 여명을 보며 마탑주가 감탄했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조금 전까지 여명이 서 있던 마탑 보물 창고의 벽면 하나가 텅 비어 있었다.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변화하는 조절 마법이 걸린 흉갑을 비롯해 장갑과 신발, 그리고 투구까지.
대체 열 벌이 넘는 갑옷이 어디에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알뜰하게 갑옷을 쓸어갔다.
그나마 갑옷이 쓸모가 있다나?
그렇다고 다른 걸 챙기지 않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릇은 계속 눈여겨보던 용의 뼈 지팡이를 챙겼고, 세티는…
“전 이것만 챙길게요.”
사비나가 미끼로 쓴 어깨 망토를 챙겼다. 뭐 대단한 거 없는 낡은 망토일 뿐이었으나, 세티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양 망토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소박한 그녀를 본 마탑주가 그러지 말고 다른 마도구를 하나 더 챙기라 권유하고, 카레닌이 그렇게 막 퍼주지 말라고 꿍얼거릴 때쯤.
마탑주의 지팡이가 번쩍이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탑주님?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뭐지? 일행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마탑주는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두들긴 후 대답했다.
“가능하네.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탑 입구에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기자? 기자가 왜? 오늘 무슨 날인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BBC 특파원에게 물어보니 그릇과 관련된 중대 발표가 있다고….]“….”
[1층 담당 말로는 그릇이 온 건 맞다고 합니다만… 혹, 만나셨습니까?]“그래, 지금 나와 이야기 중일세.”
[그러면 기자회견을 잡을까요?]마탑주는 이게 다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릇을 바라보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세티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니, 기자회견은 됐네.”
[그러면 기자들을 내쫓을까요? 어차피 몇 푼 쥐여주면….]“아니,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냥 내버려 두게.”
그 말을 끝으로 마탑주는 탁탁-지팡이를 두들겨 통신을 끊었다. 그는 여명을 보며 말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를 위한 보험이었나?”
여명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탑주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 대단하구만. 나 때는 기자를 이용하긴커녕 두들겨 패기에 바빴는데….”
“….”
마탑주가 헛소리하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가운데, 카레닌이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뭐, 나쁘지 않네. 이참에 같이 내려가서 기자들에게 경고나 해주자고.”
“….”
경고? 여명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어진 카레닌의 말이 정답을 알려줬으므로.
“기왕 이렇게 된 거, 선전포고나 하자고.”
***
마법사들의 성지라는 상징을 제외하고 보면, 히라리아는 특별할 것 없는 시골 도시였다.
온갖 마법이 가득하고 거리마다 마법사들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인터넷은 느려 터졌고, 음식은 맛없었으며, 콧대 높은 마법사들은 기자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뉴스가 될만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뜻.
그럼에도 지구의 방송국들은 굳이 히라리아에 특파원을 유지했는데, 냉전 시대부터 이어진 유구한 전통 때문이었다.
국가가 아닌 히라리아에 대사관을 설치할 수는 없으니, 특파원을 배치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하찮은 전통.
애초에 정상적인 이유로 시작된 전통이 아닌바, 선망의 대상인 평범한 특파원과 달리 이 도시로 보내진 기자들은 좌천당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좌천당한 게 맞았고.
뭐, 덕분에 이 도시의 기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좌천된 김에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쪽과 어떻게든 특종 하나 잡아서 탈출하려는 독종들.
그리고 오늘 히라리아에 퍼진 소문은 두 부류의 기자들을 모두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릇이 마탑에 도착한 김에, 마탑주가 중요한 발표를 한다더라.’
카더라에 불과했지만, 마법사들끼리 주고받는 소문을 무시할 기자는 없었다.
특종을 노리는 이탈리아의 젊은 기자부터, 그냥 위에서 내려오는 잔소리를 피하려는 일본의 기자까지.
오랜만에 마탑 앞에 모인 기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릇을 기다렸다.
-소문이 정말인가?
-이렇게 모인 걸 보면 진짜인 거 같기도 하고.
-가짜면 어때, 그냥 한 줄 쓰고 마는 거지.
이곳에 모인 기자 대부분은 열정과 거리가 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의미 있는 기사를 쓴 적이 언젠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으니까.
그나마 최신 뉴스라고 해 봤자, 인천 도살자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히라리아에 불을 지르고 마석을 훔친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조차 마탑이 묵묵부답으로 입을 다문 덕분에 알려진 건 거의 없었지만.
아무튼, 기자들이 궁시렁거리며 기다리길 잠시.
마탑의 돌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인영이 밖으로 나왔다.
베일과 로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가린 한 쌍과 누군지 모를 남녀 한 쌍, 그리고… 마탑주.
가장 앞에 서 있던 젊은 기자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입구로 달려갔다.
“마탑주님! 전 가제타의 베아트리체 기자입니다! 오늘 중대 발표가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자신을 베아트리체라고 소개한 여기자는 혹시라도 대답을 빼앗길까, 두다다 말을 쏟아내며 마탑주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다른 마법사들이 그녀를 제지했겠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마탑주님?”
마탑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자들을 내려다본 뒤,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걸 중대 발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소.”
지구인들이 대마법사하면 떠올리는, 근엄한 목소리. 그는 베아트리체가 내민 녹음기겸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중대 경고라고 해야겠지.”
“경고? 경고라니요?”
“앞으로 12시간… 아니, 24시간 내로 비 마법사들은 이 도시를 떠나거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베아트리체는 대박의 기운을 느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 정도의 대박.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혹시 오늘 도착한 그릇과 관련된 일입니까?”
때마침, 뒤에 서 있던 기자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그릇을 찍었다. 마탑주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소. 이건 마법사 간의 일이거든.”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뒤늦게 몰려온 다른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낸 까닭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십시오!
-한국과의 외교 문제가 이번 일과 관련 있는 겁니까?
-원로원이 그릇을 일본의 스미토모 야타로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설마 그거 때문입니까?
기자들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참새들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아무 말이나 짹짹거렸다. 지켜보는 그릇이 조금 주눅들 정도.
마탑주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기자들의 소란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가 선언했다.
“듣고 있는 거 안다. 이쪽은 준비 끝났다. 시간을 말했으니, 자존심이 있다면 시간 내로 찾아오길 바란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마법사들조차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추가로 질문이 쏟아지고, 마탑주가 소란을 끝내려는 듯 지팡이를 들어 올린 찰나.
끼익-! 기자들 저 뒤편에서 익숙한 마법 마차가 멈추더니, 풍만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땅에 내려섰다.
아니, 풍만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차가 기우뚱-기울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덩치.
여명보다 적어도 두 배는 큰 덩치를 자랑하는 여인의 단아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노부인이었다.
‘…마귀할멈?’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실례되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녹색 드레스에 높은 녹색 고깔모자를 쓴 저 모습은 누가 봐도 동화 속 마귀할멈이었으니까.
“음?”
마탑주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발견한 걸까, 그는 지팡이를 멈췄다.
그사이 그녀는 기자들의 뒤편에 서서 뭐라고 뭐라고 소리쳤는데, 아마 비키라는 말을 하는 듯했다.
물론, 기자들은 듣는 척도 안 했다. 그걸 본 마귀할멈은 후우웁-숨을 들이켜더니…
“다! 꺼!! 져!!!”
폭풍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주변 공기에 마나를 섞은 무시무시한 성량.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여명이 귀를 막을 정도였다.
바로 앞에 있던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혼비백산한 기자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갈라지는 가운데, 그녀는 또각또각-육중한 덩치를 이끌고 마탑주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마탑주보다 먼저, 그릇이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
“아이고, 우리 손녀!”
뭐? 손녀? 여명이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딱딱하게 굳는 사이, 두 조손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얼핏 감동적인 모습이었으나, 여명은 전혀 다른 감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두메아 가주님이 왜 그릇을 못 알아봤는지 알겠네.
***
두메아 가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마법 마차 운전석에 앉은 여명이 말했다.
“…돈 벌 줄 아시네요.”
그의 말이 향한 곳은 마법 마차를 끌고 있는 마법사였다.
역에서 일행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다가 역으로 그릇에게 혼나고 일행을 마탑으로 안내해준 그 마법사.
“칭찬 감사하오.”
그릇이 도착한 걸 비밀로 해달라는 대가로 수백 달러를 받아 간 그는, 여명의 기대처럼 비밀을 지키긴커녕 소문을 퍼트려 기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메아 가문의 현 가주에게 손녀가 왔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뒤, 그녀를 태우고 마탑으로 왔다. 오고 가는 운송비까지 챙긴 것이다.
그야말로 일타삼피. 꿩 먹고 알 먹고, 겸사겸사 닭까지 먹은 상황.
“…그 머리로 왜 관광 마차를 끌고 계신 겁니까?”
여명이 덜컹거리는 마차 반동을 참으며 묻자, 마법사가 씨익 웃었다.
“돈 버는 재능은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것과 별 상관없소.”
“…그러면 위대한 상인이 되시면 되잖아요?”
“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소? 나는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오.”
“….”
“아, 혹시나 오해할까 미리 말하는데, 만족과 포기는 다른 것이오. 나는 여전히 위대한 마법사를 꿈꾸고 있소. 오늘 번 달러는 그 원대한 꿈을 위한 밑바탕이지.”
말투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여명은 그제야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문뜩 마경에서 만났던 벌레 마법사가 떠올랐다.
주변의 오크 부족과 인간들을 착취하고 노예로 팔아 돈과 힘을 모으던 녀석.
그 녀석과 눈앞의 마법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돈과 마법.
하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나 달랐다. 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 걸까?
수단? 재산? 본성? 아니면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그 자체?
정답은 알 수 없었으나, 질문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여명은 천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음미했다.
그렇게 그의 생각이 깊어지는 찰나, 마법사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깨달음에 100달라.”
“…예?”
“방금 내 말을 듣고 뭔가 깨닫지 않았소? 100달러 주시오.”
“….”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순순히 100달러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려진 지폐를 본 마법사는 또한 씨익 웃었다. 그는 고이 접은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일하는 자는 행복한 자요, 한가한 자는 불행한 자로다!”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위인의 명언을 외우고 다니는 마법사라니.
여명이 한숨을 쉬며 운전석 등받이에 기대는 순간, 드르륵-운전석에 연결된 창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주름이 자글자글한 마귀할멈… 아니, 현 두메아 가주가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네가 그… 그놈이니?”
“…그놈이요?”
천여명이라고 말하지 않은 건 옆에 앉은 마법사 때문인가?
여명이 그렇노라고 대답하려는데, 그녀가 한발 앞서 정색했다.
“우리 아도의 팔을 자른 놈.”
“….”
“…맞구나.”
아, 그 이야기였나. 할 말이 없어진 여명은 그냥 코를 긁적였다. 탁! 다시 마차 창문이 닫히며 정적이 찾아왔다.
덜컹, 덜컹. 무심한 마차 소리만이 울리는 가운데, 마차를 모는 마법사가 한마디 했다.
“두메아 가문의 사람에게 뭐 실수라도 했소? 그러면 빨리 사과하는 게 좋을 거요.”
“….”
“워낙 어렵게 가문을 유지하시다 보니… 굳이 혈족이 아니라도 가문 사람들을 끔찍하게 아끼시거든. 오늘 그쪽 덕분에 번 돈이 있어 해주는 조언이니, 흘려듣지 마시오.”
“가문 사람…? 음, 그러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두메아 가문에 아는 사람이 있나…? 아, 맞아. 그릇의 호위였지. 그러면 큰 문제 없겠구려. 손녀라면 죽고 못 사시거든.”
여명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싸늘한 저녁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그의 시선은 도로 저편에서 가까워지는 거대한 저택에 고정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