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44)
을 위한 세계는 없다-444화(444/817)
EP.444 참을 수 없는 (2)
* * *
마차의 달그락 소리가 커질수록, 주변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낡은 고택들의 깨진 창문,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도로, 녹슨 울타리를 중심으로 멋대로 자란 잡초와 꽃들.
더럽진 않았지만, 버려진 게 확실한 저택들이 가득했다.
그래, 이곳은 슬럼가였다. 한때 고귀한 가문들이 몰려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버린 그런 슬럼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도시화 현상이라고 할까.
과거에는 한적하고 물 맑은 이곳이 히라리아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겠지만, 도시에 역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온 뒤에는 그저 구석진 자리가 돼버린 것이다.
한때 이 주변의 저택에서 살던 고귀한 분들은 지금쯤 도심의 드높은 빌딩에서 살고 있겠지.
아무튼, 두메아가 가문의 저택은 그런 슬럼가의 정중앙에 있었다.
여명이 발견하는 게 조금 늦었는데, 처음에는 저택이란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벽돌 담장이나 세워진 저택들 사이에 드높은 콘크리트 벽이라니?
게다가 저건 단순히 저택 주변을 둘러싼 콘크리트 벽이 아니었다.
벽면에는 총구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창문들이 송송 뚫려 있었고, 직사각형 콘크리트 벽 꼭대기에는 대공포대로 보이는 원형 벙커가 올라가 있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저건 저택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다. 그것도 진짜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요새.
과연, 카레닌과 마탑주가 자신할만한 곳이었다.
여명이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마탑주 급 강자나 공군의 도움 없이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뚫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어쨌거나, 그 사이 콘크리트 요새… 아니, 두메아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거대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꺼거걱-소리를 내며 열린 두꺼운 철문을 넘어가자마자, 애꾸눈의 남자가 소리쳤다.
“모두 내려와! 가주님께서 오셨다!”
여명이 남자의 얼굴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끼는 사이, 요새를 지키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와 마차 앞에 사열했다.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모두 군기가 바짝 든 모습.
곧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일행들이 내렸다.
가장 먼저 내린 건 현 두메아 가주였다. 그다음으로 세티와 그릇, 카레닌이 차례대로 땅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내린 건 마탑주였는데, 그의 뺨에는 큼직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설마 가주님에게 맞은 건가?
여명은 성난 모습으로 걸어가는 두메아 가주의 뒷모습을 보다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싸게 해줄 테니, 도시를 떠날 때 다시 불러주시구려.”
“상황 보고요.”
마차를 끌던 마법사와 작별한 여명은 그대로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요새 내부 건물로 들어서자, 넓고 아름다운 중앙 홀이 일행을 반겼다. 살벌한 콘크리트 외벽과는 전혀 다른 풍경.
요새 안에 숨겨진 저택이라고 해야 하나?
중앙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여명은 고풍스러운 벽지와 벽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화려한 장식 사이에서 어떤 노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요새 속에서도 어떻게든 저택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
그건 실리와 추억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노력이었다.
여명은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레 성큼성큼 나아가는 두메아 가주와 식솔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직후, 앞서가던 그릇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저택이죠?”
“아니? 이상하다니. 내가 보기에는 멋있는데.”
“멋있다고요? 이 저택이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그릇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여명은 다시 일행을 따라가며 대답했다.
“어, 멋지지. 널 지키기 위해 저택을 요새로 만들면서도, 가문의 유산을 지키려고 노력한 모습이잖아.”
“….”
그릇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명의 해석을 듣고 놀란 듯 그저 조용히, 멀어지는 할머니의 등을 바라봤을 뿐.
***
1분 뒤, 응접실에 도착한 직후.
“토마시, 이 개 좆같은 새끼!!!”
두메아 가주가 응접실의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무슨 마나를 담은 것도 아닌데, 탁자가 출렁거리며 위에 놓인 찻잔들이 춤을 췄다.
가장 늦게 들어온 여명이 그 꼴을 보고 흠칫 놀라는 사이, 마탑주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누님, 또 때릴 생각 마시오. 나 지금 어금니 흔들리고 있소.”
“닥쳐!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새끼야! 감히 내 손녀가 이 도시에 있을 때 그따위 선전포고를 해?!”
쾅! 두메아 가주는 한 번 더 탁자를 내려쳤다. 마탑주는 슬쩍 여명과 세티를 보며 말했다.
“…기회가 왔으니 잡았을 뿐이오.”
두메아 가주는 마탑주를 따라 여명과 세티를 바라봤다.
“기회? 무슨 기회?”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길 기회.”
“….”
두메아 가주는 물론이고, 주변 식솔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마시, 카레닌. 둘 다 벌써 잊은 거냐? 내가 너희와 손을 잡은 건 어디까지나 우리 손녀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어!”
그릇에게 들으라는 듯 선명한 목소리. 카레닌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승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아니, 지금은 아니지.”
“예?”
“천여명, 마차에서 들었다. 네가 이번 대 용사라지?”
두메아 가주가 여명을 보며 말하자, 식솔들이 웅성거렸다. 용사란 단어보다는 천여명이란 이름 자체에 반응한 듯했다.
“살로메의 혈족으로서 부탁하마. 내 손녀를 데리고 당장 이 도시를 떠나거라.”
“….”
“할머니!”
그릇이 놀라건 말건, 현 두메아 가주는 계속 말했다.
“마탑주가 무슨 대가를 내놨건, 내가 그 이상을 주마. 그러니 당장….”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여명이 그녀의 말을 끊자, 가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표정 변화만큼은 아버지랑 닮은 꼴이네. 여명은 얼굴을 덮은 환상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마탑주님이 주신 것 이상을 주시겠다고요? 불가능한 제안이십니다. 제가 왜 마탑주님과 손을 잡았는지, 무슨 이유로 이 도시에 왔는지도 모르시잖습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그릇이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릇이 베일을 벗었다.
검은 베일 아래로 검푸른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고, 할머니를 전혀 닮지 않은 붉은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
두메아 가주가 그런 손녀와 마주 보며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일행을 처음 맞이했던 애꾸눈의 가솔이 앞으로 나섰다.
“살로메, 아무리 용사라지만, 네 오라비의 팔을 자른 자다. 녀석의 말이 가주님의 말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냐?”
“…네, 길로 삼촌. 지금 저에게는 할머님의 말보다 여명의 말이 더 중요해요.”
길로? 어딘가 묘하게 익숙하다 싶더니, 아도-길로 선배의 가족이었나.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애꾸눈의 길로가 식솔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두메아의 저택에선 누구도 가주의 말을 어길 수 없다!”
그 순간, 식솔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냈다.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르겠지만, 수십 년 전에나 쓰였을 법한 낡은 권총과 소총들이 동시에 마탑주와 여명을 겨눴다.
“오,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카레닌이 슬그머니 뒷걸음쳤으나, 마탑주와 여명은 시큰둥했다. 마탑주는 총알을 막아낼 실력이 있어서, 그리고 여명은…
“두메아 저택에선 누구도 가주의 말을 어길 수 없다라…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뭐?”
“가주가 둘이면,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여명이 손을 쥐었다 폈다.
***
“….”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데스나이트를 본 반응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충격, 경악, 그리고 당황.
무시무시한 정적이 응접실을 집어삼킨 가운데,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마탑주였다.
“데스나이트? 이거 진짜 용사 맞아?”
그다음은 살로메였다.
“아니, 지금 꺼내면 어떡해요!!!”
할머니 옆에 있으니 목청도 할머니를 따라가는 걸까, 여명은 어깨를 으쓱한 뒤 애초에 처음부터 당황하지 않은 세티의 곁으로 물러났다.
‘적절할 때 꺼냈지?’
‘응.’
그렇게 세티와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직후, 데스나이트가 입을 열었다.
-델리아? 오, 곱게도 늙었구나.
“….”
-근데, 응접실에 왜 이렇게 빛이 안 들어오는 게냐? 창문은 왜 막아둔 거야?
상상 이상으로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젊은 식솔들 중 몇몇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총구를 겨눌 정도로 능청스러운 목소리.
“모두… 총구 내려.”
현 두메아 가주, 델리아 두메아는 식솔들에게 손짓한 뒤, 천천히 데스나이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뭔가를 확인하듯 그의 손을, 가슴을, 얼굴을 차례대로 만졌다.
데스나이트의 차가운 피부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했으나, 살짝 휘어진 눈은 달랐다.
늙어버린 딸은 눈웃음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녀가 말했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운이 없었지. 뭐,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느냐.
“고통… 고통스럽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냥저냥 살만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딸은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
가장 눈치 없는 사람조차 데스나이트의 정체를 알아채는 가운데, 죽은 아버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는 어땠느냐? 삶이 고달프지는 않았고?
“그냥저냥… 살만했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어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대로 잘 살다 가셨고요. 천국에서 먼저 간 아버지를 쥐어 박겠다고 하셨는데….”
딸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메아 가주는 허허 웃으며 딸을 끌어안았다.
전쟁터로 떠나던 그날 밤처럼, 따스한 포옹이었다.
-혼자서 고생 많았구나.
“….”
이 자리에 대답은 필요 없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온 딸은 그저 조용히,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작은 훌쩍임, 떨리는 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는 먹먹한 눈빛.
여명이 데스나이트를 챙겨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마탑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주가 둘이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뚝-정적이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응접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마탑주는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왜들 그리 봐? 내가 못 할 말 했어?”
“….”
이 눈치 없는 놈. 카레닌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가운데,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글쎄, 가법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보통은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 말을 더 따르는 법이지.
“아, 그렇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뒤늦게 분위기를 읽은 마탑주가 헛기침하며 물러났지만, 이미 깨진 분위기를 돌려놓기에는 무리였다.
그리고 어색함 속에서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현 두메아 가주는… 성큼성큼 마탑주에게 다가가 손을 들었다.
“누님, 폭력은-”
짜악-! 여명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마탑주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겸사겸사, 데스나이트의 감탄도.
-이야, 우리 딸, 그 나이까지 육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