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46)
을 위한 세계는 없다-446화(446/817)
EP.446 참을 수 없는 (4)
* * *
***
평생을 고민해온 문제가 불과 몇 시간 만에 해결된다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허탈함? 홀가분함? 그것도 아니면 기쁨?
정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부.
“하.”
금제와 벌레에게서 자유로워진 발막은 웃었다. 허탈하고, 홀가분하며, 기쁨에 가득 찬 미소였다.
사실, 그리 아름다운 미소는 아니었다.
금제를 푼 후유증 때문인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무엇보다 조금 전 토해낸 분홍 토사물 위에 앉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미소는 진솔했다. 적어도 여명이 보기엔 그랬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옥새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묻자, 발막이 고개를 돌렸다.
“마냥 좋지는 않네.”
“….”
그는 마폭고 치료제가 들어있던 빈 병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내 머릿속에 있던 벌레랑 이 약이 노리는 벌레랑 다른 종이었나 봐. 진짜 더럽게 아프군. 위장에 구멍이 뚫린 것 같… 아니, 진짜 뚫렸을지도.”
“그런 건 빨리 말하셨어야죠.”
여명은 곧바로 치료제를 꺼내 건넸다. 발막은 두말없이 물약을 쫘악-들이켰다.
“어우,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근데….”
“근데?”
“왜 하필 딸기 맛이지? 뭐 중요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여명이 ‘아뇨, 그냥 제작자 취향입니다’ 라고 대답한 직후, 옆에 있던 그릇이 한마디 거들었다.
“지금은 고맙다는 말부터 하셔야죠.”
그러나 발막은 오히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지. 살로메, 고맙다는 말은 혓바닥 놀리는 것 말고는 은혜 갚을 능력이 없는 녀석들이나 하는 거란다.”
“….”
“우리 같은 진짜 마법사들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법이지.”
나름 멋진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릇은 못 볼껄 봤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토한 거 위에서 그런 말씀 하셔봤자….”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발막은 그제야 자기 꼴을 확인했다.
금제를 풀며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벌레를 꺼내는 과정에서 토해낸 토사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모습.
빈말로도 좋은 꼴이 아니었으나, 발막은 오히려 두팔을 활짝 벌렸다.
“자유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 안 그런가?”
“예, 뭐….”
여명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막이 포옹하려는 듯 팔을 벌리고 다가오자마자, 정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양심이 있으면 그 꼴로 다른 사람 껴안을 생각하지마십쇼.”
“하지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법인데.”
“더러움도 그렇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여명이 정색하며 총을 꺼내는 사이, 지켜보던 마탑주가 끼어들었다.
“염병하네.”
“….”
“지랄 말고 몸이나 씻어라! 냄새나니까 다 씻기 전까지 이 방에서 나올 생각이랑 하지 말고!”
***
잠시 후, 두메아 가문의 응접실.
가솔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여명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금제를 푸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옥새의 무식한 마나 소비량을 메꿔줄 마법사가 여럿 있었으니까.
먹인 뒤 상황만 보면 되는 치료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굳이 문제를 꼽자면, 황금 옥새를 알아본 마탑주와 카레닌이 귀찮게 구는 것 정도?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
“만주의 용이 그냥 줄 리가 없는데, 설마 드워프 핏줄이었어?”
여명이 애써 두 늙은이의 주접을 외면하길 잠시.
뒤늦게 진지함을 되찾은 마탑주가 현 두메아 가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델리아 가주님. 좋은 기회가 왔군요.”
갑자기 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람.
일행의 시선이 모이자, 마탑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는 먼저 잡는 쪽의 것. 이렇게 된 거, 우리가 먼저 칩시다.”
“…흐음?”
현 두메아 가주, 델리아 리어 두메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모았다. 마탑주가 설명했다.
“원로원은 어차피 적이 될 인간들입니다. 사비나와 뭉쳐서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각개격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발막을 이용하자는 소리군요.”
“예, 저나 카레닌, 그리고 두메아 가문 사람들이 움직이면 적들도 당장 눈치챌 테지만… 발막과 그릇, 그리고 여명과 세티 양을 포함한 넷이 간다면?”
“….”
“발막이 배신했다는 걸 모르는 이상, 가주께서 손녀를 살리기 위해 원로원에 손녀를 보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즉, 완벽한 기습이 되는 거죠.”
모두가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전 두메아 가주가 반대를 표했다.
-난 반댈세.
“…제 계획에 무슨 문제라도?”
데스나이트는 특유의 죽은 눈동자로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살인을 미루지 말게.
“….”
-원로원과 탑주는 서로를 견제하는 위치지. 원로들이 타락했다면 그건 자네의 과오고, 그걸 처리하는 건 자네의 의무일세. 내 말이 틀렸는가?
마탑주는 반박하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하다거나, 싸움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두메아 가주의 말마따나, 그의 작전은 여명 일행에게 원로원 암살을 맡기는 일이었으니까.
짧은 정적.
어른과 어른, 산 자와 죽은 자, 마법사와 기사의 시야가 얽히며 정적이 길어지는 찰나. 그릇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살로메?
“저는… 마탑주님의 계획에 찬성해요. 아마 여명이랑 세티도 찬성할 거구요. 그렇지?”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고, 세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두메아 가주는 묘한 눈으로 증손녀를 바라봤다.
-…아카데미 지하에서 하던 연습과 실전은 전혀 다른 거란다. 네가 다치는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살아있는 사람을 직접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알고 있니?
“예, 알아요.”
꿀꺽, 침을 삼킨 그릇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째서일까, 두메아 가문의 특징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의 할머니와 똑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증조할아버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에요.”
-….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과 무관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요. 왜냐면, 저는….”
그 순간,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들어선 발막이 그녀의 뒷말을 가로챘다.
“…전전대 마탑주 마하간님의 정식 계승자니까요.”
입가에 걸린 실없는 미소만 제외하면, 처음 응접실에 들어올 때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끔해진 모습.
응접실의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발막은 그릇을 향해 윙크했다.
“그걸 말하려고 했던 거지?”
“….”
그릇, 살로메는 당황 속에서 정색했다.
중요한 말을 빼앗긴 것도 빼앗긴 거지만, 무엇보다…
“…제가 마하간님에게 배웠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원로원이 감시할 수 없었을 텐데?”
발막은 실없는 미소를 지우며 대답했다.
“감시만 피한다고 끝이 아니지. 원로원은… 생각보다 훨씬 웃긴 인간들이거든.”
-웃기다고? 꼭 자네 유언처럼?
“…유언이요? 제가요? 전 유언 같은 거 남긴 적 없습니다만.”
데스나이트가 태클을 걸었으나, 여유가 생긴 발막은 가볍게 태클을 흘려버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전 마탑주님의 계획에 찬성합니다. 현시점에서 가장 전술적인 계획인 건 물론이고, 성공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가능성이 높다고? 우리는 상대의 전력도 모르는데?
“그거라면 걱정마시죠. 원로원의 늙은이들은 저 혼자서도 싹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원로원이 자체적으로 거느린 마법사와 방어 시스템인데….”
거기까지 말한 발막은 여명을 바라봤다.
“이쪽에는 저 친구가 있잖습니까.”
신뢰가 가득한 말투. 마탑주 또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릇은 뭔가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여명은…
“발막… 혹시, 응접실 바깥에서 끼어들 타이밍 재고 있던 건 아니죠?”
“….”
진실이 담긴 속삭임으로 발막의 입을 막아버렸다.
***
발막의 무안함과 상관없이,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본 골조는 마탑주의 말대로 그릇을 데리고 원로원으로 침입하는 것.
여기에 그릇이 가문을 위해 ‘스스로’ 원로원으로 간다는 스토리까지 추가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딱 하나, 현 두메아 가주의 눈물겨운 작별 인사가 시간을 좀 잡아먹긴 했지만.
“어멈과 아비가 지금의 널 봤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했을 거란다. 우리 보물… 이 할미가 모자라서 네가 이런 시련을 겪게 되어 미안하구나….”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네가 두메아의 미래라는 걸 잊지 말고, 또….”
“이 할미는 널 믿지만, 가끔은 믿음만으로 부족한 일이 있는 법이란다. 혹시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곧바로 도망….”
30분째 손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마탑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으나, 여명과 세티는 아무 불만 없이 두 사람의 작별을 기다렸다.
둘 다 가족애에 약하기도 했고,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으므로.
여명이 있는 판에 다치기야 하겠냐만은, 싸움이란 모르는 법이었다. 눈 먼 총탄이나 마법이 운 나쁘게 급소에 맞으면 누가 목숨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할머니의 이별 인사는 여명에게 데스나이트가 넷이나 더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렇게 그릇과 일행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두메아 요새의 숨겨진 뒷문으로 나가려는 찰나.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두 명의 두메아 가주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작게 움직이는 입술은 두 사람이 그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우리 손녀를 잘 부탁하네.
여명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로브를 뒤집어쓰는 그를 마지막으로 일행은 두메아 요새를 떠났다.
바깥은 이미 달빛이 차오른 밤이었고, 넷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따라 히라리아의 야경이 가까워지길 한참.
멀리서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주상복합이 눈에 들어올 때쯤, 발막이 입을 열었다.
“정문으로 들어가겠나? 아니면 뒷문 주차장 입구?”
“뭐가 다른 거죠?”
살로메가 되묻자, 발막은 마나가 담긴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보안과 구조가 다르지. 정문에는 지구식 기관총과 보안용 마도구들이 깔린 대신 원로들이 있는 방이 가깝고, 주차장은 비교적 보안이 가벼운 대신… 지하를 돌아서 가야 하지.”
결국 도긴개긴 아닌가? 여명은 발막이 그려낸 건물 구조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직접 들어가 본 건 발막뿐이시니, 발막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걸 추천하지.”
“이유는?”
“원로들이 꿍쳐놓은 재산이 지하 금고에 있거든.”
“….”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보상은 보상이지. 그 뭐시냐, 넓은 아공간도 있는데. 이참에 날 도와준 물약값도 챙겨야지.”
세티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발막이 짧게 덧붙였다.
“참고로 난 한 푼도 안 줘도 돼. 방금 말했듯, 날 구해주면서 썼던 물약값도 있고… 난 원로들의 머리통만 있으면 되거든.”
“….”
원로들을 입에 담는 순간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깊은 살기가 느껴졌다.
때때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감정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지는 법.
여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그대로 ‘원로원’이란 이름의 주상복합 빌딩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히라리아의 야경을 가로지르며 도착한 주차장은 화려했다.
기껏해야 마법 마차 정도나 있을 줄 알았는데, 온갖 최고급 자동차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는 게 아닌가.
“벤틀리에, 람보르기니에… 여기는 탈 곳도 없을 텐데 이런 건 왜 사 모았데요?”
차를 알아본 세티가 중얼거리자, 발막이 대답했다.
“졸부가 사치품 사는데 쓸모를 따지겠나? 그냥 돈 자랑하는 거지.”
여명이 백 달러에 표정이 달라지던 마차 운전수를 떠올리는 사이, 발막이 두꺼운 건물 입구의 호출기를 누르며 말했다.
“청색 처형관이 보고합니다. 원로원에서 맡기신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반복합니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의 보고가 끝나고 채 1분이 지나기 전에,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짧은 정적.
여명이 슬그머니 인벤토리를 준비하는 사이, 문 너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발막. 뒤에 선 사람들은 뭐지?]“그릇의 호위입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그들이 누군지는 상관없어. 왜, 데리고 왔느냐가 문제지.]어딘가 무례한 목소리에 대답한 건 세티였다.
“정산받으러 왔습니다.”
[정산? 무슨 정산?]“돈이요. 돈. 호위고 나발이고 돈은 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돈은 두메아 가문에게 받….]그때, 발막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끊었다.
“그릇이 가문 몰래 탈출하느라 제때 지급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돈을 주지 않으면 그릇이 떠날 수 없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너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그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해서야… 알겠네. 호위 비용은 원로원에서 지급하지.]곧이어 철컥-소리와 함께 두꺼운 문이 열리고 키가 작은 노인이 일행을 마주했다.
노인의 얼굴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그득그득했는데, 발막을 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아랫것을 보는 듯한 눈빛.
신기한 일이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로 보자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건 저 노인네가 되어야 할 텐데.
여명이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하자,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
“마스터 발막. 이번 일은 원로님들께 직접 알리겠다. 일 처리가 이리도 허술해서야.”
“….”
“후… 됐고, 용병이라고 했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발막과 그릇을 원로님들에게 안내한 뒤….”
이번에는 여명이 나섰다.
“아, 시발. 어디서 수작질이야?”
“…뭐?”
“처형관을 믿고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더 기다리라고? 좆까는 소리 하지 말고 돈부터 내놔.”
“….”
노인은 마치 ‘너 따위가 감히’ 라는 듯 여명을 바라봤으나, 여명은 팔짱을 끼고 역으로 노인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한 번 더 말 해줘? 돈부터 내놓으라고.”
“그래, 좋아… 그럼 계좌를….”
“우린 현금만 받아.”
“….”
노인은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뭔가를 다짐한 듯 여명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우선 금고부터 가지. 조용히 따라와라.”
여명은 왜 반말이냐고 따지려다가, 노인네에게 거기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노인의 뒤를 따라 들어선 주상복합 내부는 화려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는데, 고작 지하실 벽면조차 대리석으로 된 벽화가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
뭐 아무튼.
일행이 복도를 가로지르며 도착한 곳은 금고가 아니었다.
뭔가를 보관하는 공간은 맞았지만, 돈이 아니라 다른 걸 보관하는 장소라고 해야 할까?
두꺼운 철문과 방 내부에 빼곡히 쌓인 나무 상자들은 물론이고, 일행을 이곳으로 이끈 노인이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마스터 발막. 둘 다 죽여.”
“….”
“뭐하고 있어? 죽여. 시체는 여기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러나 발막은 팔짱을 낀 채 노인을 빤히 바라볼 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소리쳤다.
“발막! 뭐 하는 거냐! 죽이라니까? 어릴 때처럼 징벌방에 들어가고 싶으-!”
안타깝게도, 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발막의 손에서 튀어나온 전격이 그의 머리에 구멍을 내줬으므로.
파직!
순식간에 노인네를 살해한 발막은 무언가 후련한 듯 한숨을 쉬었다.
“잠입은 성공적으로 끝났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 여명, 왜 그러나?”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발막이 여명에게 물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방에 쌓인 상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상자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발막은 물론이고, 살로메조차 의아한 듯 여명을 바라봤다. 여명은 아무 말 없이 연달아 상자를 확인하고는, 끄응-신음을 내뱉었다.
“이르민술….”
“이르민술?”
“상자에 새겨진 이 심볼의 이름입니다.”
과연, 여명이 가리킨 상자에는 큼지막한 심볼이 새겨져 있었다.
어딘가 석궁 같기도 하고, 끝에 날개가 달린 마법 봉 같기도 한 심볼.
이게 뭐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냐고 묻기도 전에-여명이 먼저 상자 뚜껑을 쓸었다.
“이 심볼이 문제가 아니라, 이걸 상징으로 사용한 조직이 문제입니다.”
“조직? 무슨 조직인데?”
“아넨에르베. 신비주의 탐색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그의 말을 따라 사아악-두꺼운 먼지가 밀려나고, 그 자리로 선명한 문자가 드러났다.
지구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상징이자, 절대 악의 심볼.
휘어진 만(卍), 하켄크로이츠.
일행 모두가 그 심볼을 눈에 담은 가운데, 여명이 말했다.
“나치의 친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