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5화(45/817)
〈 45화 〉 성녀는 희생양의 꿈을 꾸는가 (5)
* * *
***
헙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다룰마 둔이 헛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여명 또한, 비슷하게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어…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나 보네?”
성녀.
여느 때와 달리 투명 망토를 쓰지 않은 그녀는 진짜 ‘성녀’처럼 보였다.
두꺼운 안대로도 가릴 수 없는 고귀한 외모는 물론이고, 온몸을 빈틈없이 가리는 새하얀 사제복과 금빛 자수가 들어간 흰색 어깨 망토까지.
허리춤에 꽂혀있는 리볼버와 등 뒤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자동소총만 없었다면… 절로 신앙심이 느껴질 만한 모습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구인의 관점에서 그랬단 말이다.
그저 감탄이나 하고 있는 베이스캠프 바깥의 용병들과 달리, 드워프는 자동소총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오, 성녀시여…”
다룰마 둔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성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경건하게 양손을 모아 쥐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차원문 너머, 다섯 신을 찬양하는 예법.
교과서에 실려도 될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으나, 성녀는 드워프에겐 눈짓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베이스캠프 안으로 들어와 대뜸 여명의 손을 붙잡더니, 권 단장을 향해 말했다.
“그쪽이 선죽 용병단 단장인가요?”
“…예, 성녀님. 제가 단장인 권몽주입니다.”
“비용은 얼마라도 상관없으니, 얘 좀 고용할게요.”
일방적인 통보, 그리고 짧은 침묵.
권 단장과 다룰마 둔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여명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설명은 나중에 할 게, 일단 나가자. 지금은 시간이 없어.”
“….”
“아 진짜, 여기에 있으면 네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성녀는 여명의 손을 몇 번 잡아끌었으나, 여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힘겨루기가 잠시 이어지고,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성녀였다.
그녀는 푹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가 이제 곧 널 죽이러 올 거야.”
“뭐?”
갑자기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엄마? 죽이러 온다고?
“…무슨 암호나 비유 같은 거냐?”
“아니, 말 그대로 우리 엄마가 널 노리고 있어.”
그쪽 엄마가 뭐 하는 사람인데? 성녀의 어머니라, 성기사단 단장이라도 되나?
여명은 치밀어 오르는 황당함과 질문을 꾹꾹 눌러 담은 뒤, 단 한 줄로 만들었다.
“…대체, 왜?”
성녀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쭈뼛쭈뼛 생각을 정리한 뒤, 뒤꿈치를 들어 여명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 내가… 말실수를 좀 했어. 그래서 엄마가 우리 사이를 좀, 오해 하셨거든.”
말실수.
여명은 그 단어를 듣자마자, 조금 전 드워프가 통화한 상대가 성녀의 어머니임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드워프가 내뱉은 ‘그렇고 그런 짓’ 이란 말속에 담긴 오해는 설마…
‘맙소사.’
기껏해야 입술 박치기 정도나 생각하고 있던 여명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하며 성녀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말실수를 해야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 거냐.”
“그냥, 뭐… 어쩌다 보니? 내가 널 돈으로 고용하고 싶다는 말에 그렇게 화내실 줄은 몰랐지.”
“….”
“사실 성물을 건네준 거랑, 같은 회복실에서 잤다는 말도 하긴 했는데…”
“나랑 같은 회복실에 있었다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니, 그게 뭐 그렇게 큰 잘못이야? 투명 망토 쓰고 호텔 방을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잖아. 그리고 또 그쪽이 걱정되기도 했고…”
시선을 피하는 성녀를 보며, 여명은 분노보단 황당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여명의 황당함과 상관없이, 베이스캠프 바깥에서 안을 구경하고 있던 용병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을 훔쳐봤다.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여? 신입 얼굴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닌디.
그, 그 뭐냐. 그거 아닌가? 사랑의 도피?
내일 9시 뉴스에 우리 용병단 나오는 겁니까?
시발, 잘 안 들리니까 다들 닥쳐!
여명은 쏟아지는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평소라면 화라도 냈겠으나,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을 마주하자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기엔, 솔로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탓이었다.
***
그렇게 여명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뒤에 서 있던 드워프가 조심스레 성녀에게 다가왔다.
“저, 성녀님…?”
“예?”
“저는 둔간중공업에서 전통 복원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다룰마 둔이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사업 이야기를 잠시…”
그는 고풍스러운 종이로 만든 명함 한 장을 꺼내 성녀에게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요. 이야기는 일단 도망친 뒤에…”
성녀는 익숙한 태도로, 정중하게 명함을 거절했다. 아니, 거절하려 했다.
탕!
다음 순간, 다룰마가 들고 있던 명함에 총알이 꽂혔다. 구멍 뚫린 명함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드워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엄마!”
성녀의 비명을 신호 삼아, 여명과 권 단장이 몸을 날렸다.
권 단장은 드워프를, 여명은 성녀를 끌어안고 탁상을 쓰러트린 뒤, 그 뒤에 엄폐했다.
“꺅!”
여명이 몸을 피한 자리로, 총알이 꽂혔다. 전조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침묵의 총알.
반사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지만, 상대방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본 감각. 여명은 검을 뽑으며 성녀에게 물었다.
“어머니께 투명 망토를 뺏긴 거냐?”
“…투명 망토는 원래 엄마 꺼야.”
퍼석! 성녀가 대답하자마자, 탁상이 톱밥을 토해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본 드워프가 기겁했다.
“오, 맙소사. 모르닥이시여!”
그의 기겁이 끝나기도 전에, 권 단장이 드워프를 들어 올렸다.
“궈, 권 단장! 지금 뭐 하는…!”
권 단장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대로 드워프를 뒷문으로 집어 던졌다.
으아아악! 비명과 함께 드워프가 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권 단장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성녀님, 이번 일에 대한 배상은 톡톡히 하셔야 할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권 단장도 딱히 상대를 제압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마나와 기척을 모두 숨긴 투명 저격수라니. 이걸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베이스캠프 바깥에 있는 용병들을 불러들인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 사격판이나 다름 없…
단장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여명이 탁상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름 아니라, 여명이 성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어… 인질이라니, 좋은 아이디어네.”
성녀의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베이스캠프를 짓눌렀다.
권 단장은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있냐는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고, 상대 또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베이스캠프의 허공에서 고저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이군요.”
“말도 없이 총을 갈긴 사람만 하겠습니까?”
여명은 보란 듯 성녀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성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글쎄요. 신도들에게 오체분시를 당하느니, 총알 한 발에 죽는 게 나을 텐데요.”
“…제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길래?”
“새하얀 눈밭에 멋대로 발자국을 남긴 죄.”
새하얀 눈밭이라니, 여명은 뒷골이 지끈거리는 걸 꾹 참았다.
“맹세코, 전 성녀님과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이제는 거짓말까지? 지옥에 떨어지기 싫다면 더 이상 죄를 늘리지 마시지요.”
여명은 마나를 쥐어짜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조금 더 시간을 끌어, 상대의 실수를 이끌어내야 했다. 여명은 슬금슬금 물러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하시는군요. 대체 이유가 뭡니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명은 빈손을 들어 성녀의 목을 쥐었다.
“야, 잠깐…!”
성녀가 흡, 숨을 삼켰다. 여명은 손아귀의 힘을 조절하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
“대답.”
성녀가 과장되게 숨이 컥컥 막히는 연기를 하고 나서야, 상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아이의 운명을 바꿨으니까.”
“운명?”
이것도 뭔가 비유인가? 종교인이라서 그런지, 두 모녀 모두 뜻 모를 말을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이 이상은… 설명할 수 없답니다. 지금이라도 내 딸을 농락한 대가를 치르세요.”
그 순간, 상대에게 빈틈이 생겼다. 여명의 감각이 숨어있던 총구를 찾아낸 것이다.
허공으로 드러난 작은 총구. 아주 작은 빈틈이었으나, 여명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야! 너 또 어딜 만지는…!”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녀를 총구가 있는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상대가 성녀의 어머니이기에 할 수 있는 짓거리였다.
성녀 투척은 예상하지 못한 걸까? 상대는 총을 발사하지도, 떨어지는 딸을 외면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반응은 다른 어머니들과 똑같았다. 총을 놓고, 날아오는 딸을 받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의 검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투명 망토 탓에 검을 겨누고 있는 곳이 머리인지, 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치명상이 될 위치.
상대는 침묵으로 패배를 시인했다.
“…이거 진짜 독한 놈이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성녀의 짤막한 감상을 끝으로, 여명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럼 우선, 오해부터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는 손을 빙글 돌려 검을 회수한 뒤, 왼쪽 허리춤에서 막대기 하나를 꺼내 성녀에게 내밀었다.
“잡아.”
“…이게 뭔데?”
질문의 대답은 투명 망토 너머에서 들려왔다.
“우라간의 손잡이? 그걸 어떻게…?”
목소리에 처음으로 높낮이라고 할만한 게 생겼다. 꽤 놀란 듯, 살짝 올라간 목소리.
“뭐야, 이게 뭔데?”
성녀가 어리둥절하건 말건, 여명은 재빨리 성녀에게 막대기를 건넸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동정이여!’ 라는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도.
…아무튼, 우라간의 손잡이는 성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성녀를 축복했다.
“야, 잠깐… 뭐? 눈밭이라는 게 그런 뜻…”
유니콘이 무슨 말을 해주는 건지, 막대기를 쥔 성녀의 입매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여명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보란 듯 고개를 돌려 투명 망토 너머를 바라봤다.
“보셨습니까?”
“….”
“전 따님분의 눈밭에 침입한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침입할 생각 없고요.”
투명 망토 너머의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눈밭의 의미를 깨달은 성녀가 빽 소리 질렀다.
“아, 진짜. 그놈의 눈밭 이야기 좀 그만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