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454화(454/817)
EP.454 진실의 무거움 (4)
* * *
***
갑작스러운 여명의 행동에 스탈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크게 놀랐는지, 주변을 뒤덮은 그의 위압감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물론,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명은 자유롭게 움직이기는커녕, 느리게 재생한 영상처럼 뻣뻣하고 어색하게 움직였으니까.
기껏해야 입만 움직이는 히틀러보다 조금 나은 정도?
그런 여명을 잠시 바라보던 스탈린은 뒷짐을 풀고 웃었다.
『하, 푸하하!』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스탈린은 그 커다란 콧수염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주사위를 쥔 여명이 간신히 주먹을 쥐고, 그의 손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쯤.
여명이 길게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에-게- 주-사-위-를- 굴-리-게-하-는-겁-니-까-?”
살로메는 공포를 넘은 경악을 느꼈다. 여명의 목소리가 마치 스탈린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린 까닭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존재를 앞에 두고 감히?
하지만 스탈린은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대답했다.
『예비 마왕이자, 운명의 주인에게 굴리게 했지. 좋은 숫자가 나온다면… 아마 마왕이 심장 없이 알을 깨고 부활했겠지? 나도 겸사겸사 바깥 구경 좀 하고.』
히틀러가 풀려나는 동시에, 스탈린도 이 공간에서 풀려난다는 뜻인가? 살로메가 두려움에 눈동자를 굴리는 가운데, 여명이 반박했다.
“당-신-을-부-른-건 접-니-다-꼼-수-쓰-지-마-십-시-오-”
『하, 동무가 꼼수를 부려서 나를 불러놓고, 나는 꼼수를 쓰지 말라?』
꼼수? 무슨 꼼수? 살로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물론, 스탈린 또한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 좋은,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은 채 뻣뻣한 여명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부하 직원을 챙겨주는 상사처럼 그의 어깨를 탁탁-털어주며 말했다.
『좋아, 동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네. 하지만 이건 알아두게. 이건 내가 동무의 억지를 받아준 게 아니라, 절묘한 우연에 그만한 경의를 표하는 걸세.』
“…운-명-?”
『운명이라니? 아니, 아닐세. 이건 우연일세. 동무가 하필 저 쓰레기가 부활하는 장소에 있었던 것, 그리고 굳이 나를 부른 것까지… 전부 우연이자 행운에 불과하네. 이건… 음, 그러고 보니 우리 동무는 아직도 운명이 뭔지 모르나 보군?』
딱딱하게 굳은 여명의 몸을 일으켜준 스탈린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작가, 감독, 제작자, 플레이어… 자신이 이 세상 바깥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몇 명이나 만나봤나? 그들이 늘어놓는 미래는 또 얼마나 들어봤지?』
“….”
『그들 모두가 비슷하지만, 다른 미래를 떠들지, 동무는 기껏해야 그것들 중 하나가 운명이라고 생각했겠지? 아닐세. 아니야. 녀석들이 떠드는 그 모든 미래가 운명일세.』
“그-게 무-슨-?”
『어지러운 나뭇가지가 결국 몸통으로 이어지고, 강물은 결국 바다로 향하듯. 세세하게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결론으로 향하기 때문에 시나리오라고 불리기도 하지. 나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
그때, 히틀러가 이쪽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입술 사이에서는 ‘운터멘쉬(열등 인간)’란 단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검은 점액질을 질질 흘려대는 모습이 여간 혐오스러운 게 아니었다.
살로메는 본능적으로 그의 각성이 거의 끝났음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먹어 치움으로써 그가 진정한 마왕이 되리란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틀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잘 보게, 동무. 저 쓰레기도 또한 운명을 알아챘지만, 하찮은 고집과 승리를 위해 자신을 그 속에 던져버렸네. 그리고… 저게 그 결과일세.』
“….”
『동무는 저렇게 되지 말게. 스스로를… 아니, 하다못해 자신이 바꾼 운명을 사랑하게. 신명을 깨닫고, 세상의 진실을 본 뒤에도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도록.』
“신-명-을-당-신-이- 어-떻-게-?”
『하, 동무, 설마 전대 성녀도 하는 일을 내가 못 할 것 같나?』
“….”
『자,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어서 굴리게. 이러다 손이 다 녹겠군.』
그의 말처럼, 여명의 손에 들린 주사위는 이미 피부를 녹이고 뼈를 반쯤 파고든 상태였다.
여명은 애써 고통을 참으며 뻣뻣하게 굳은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사위는 그의 살을 더 파고들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 동무는 아직 신성을 못 쓰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깜빡했군. 내가 도와주겠네. 주가시빌리를 펼쳐보게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탈린의 손바닥 끝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여명의 그것만큼이나 검붉은 주가시빌리.
여명이 그에 맞춰 주가시빌리를 일으키자, 두 아지랑이가 공명하며 뒤섞이더니 그대로 그의 팔에 깃들었다.
평소에 펼치던 주가시빌리와는 전혀 다른, 거의 신의 축복에 가까운 감각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녹아내린 살이 재생되는 건 물론이고, 뻣뻣하게 굳은 관절과 근육들이 다시 자유를 되찾는 감각.
주사위를 쥔 여명은 마지막으로 스탈린을 바라본 뒤, 주사위를 던졌다.
데구르르, 탁.
철판 위로 굴러간 주사위의 숫자는…
***
이곳에서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했다.
모두가 똑같은 폐허 위에서 얼어붙는 동시에 불타는 곳.
형체조차 남지 않은 콘크리트 사이로 포탄 소리와 총격음만이 죽음을 증명하는 곳.
그곳에서, 흐루쇼프 중장 휘하의 64군 병사였던 이반 벨리는 마지막 숨을 들이켰다.
운 나쁘게도 눈먼 유탄 파편에 맞은 그의 간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의료지식이 없는 그는 어떻게든 옆구리를 붙잡고 지혈대를 꾹꾹 눌러댔지만, 부질없는 짓일 뿐.
이윽고 러시아 겨울의 냉기가 이반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차갑게 식은 피가 전쟁의 포화 아래 더해졌다.
감지 못한 그의 눈동자 위로 죽어가는 도시가, 저 멀리 서기장 각하의 이름을 딴 도시의 간판이 비췄다.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그 간판 아래, 불타는 콘크리트 사이로, 산처럼 쌓인 수십구의 시신이 보였다. 어린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쌓인 시체의 산은 마치 지옥을 형상화한 듯했다.
아니, 여긴 지옥이 틀림없었다.
-어디 있느냐!! 나와라!! 이 역겨운 유대-볼셰비키!! 나와서 게르만 민족의 심판을 받아라!!
거대한 히틀러가 돌아다니며 도시를 무너트리고, 누구도 눈을 감지 못한 채 고통과 공포로 얼룩진 표정으로 죽는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이겠는가?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마하간의 머리통이 물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점액질로 가득했던 풍경이 갑자기 지옥 같은 도시로 바뀌고, 멀쩡했던 살로메가 눈 코입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으니까.
바뀌지 않은 건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거대한 히틀러와 여명뿐.
아니, 다시 보니 여명조차도 뭔가 이상했다.
“여긴 나의 심상이다. 운명에 순응한 패배자야.”
-뭐, 뭣? 심상? 누구의? 아니, 그보다 어떻-?
“이 이상 알아서 뭐 하게? 넌 늘 하던 대로 방관이나 해라. 아니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텐가?”
-….
머리를 올빽으로 넘기며 어깨를 푸는 그의 모습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보던 그 청년과 동일인이 맞나?
머리통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건 말건, 머리를 뒤로 넘긴 여명은 손을 가볍게 털어 무장 혈청을 뽑아 들었다.
그가 평소에 쓰던 검과는 확연히 다른 낫과 망치.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머리통이 기겁하는 가운데, 여명이 살로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가 너를 살리고자 주사위를 굴렸으니, 운명의 육하원칙 아래 맹세하마. 너는 오늘 살 것이다.”
“….”
“물론, 어떻게 살지는… 너의 선택이지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여명은 붉은 아지랑이를 펼쳐 하늘 위로 솟구쳤다.
-스타알리이인 – !!!!
곧, 그를 발견한 히틀러가 도시를 밟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도시 전역이 흔들리며 전율하고, 대공 포대와 겁에 질린 군인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여명… 아니, 그의 몸을 빌린 스탈린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너를 직접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니.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다!”
여명은 전장의 매연으로 가득 찬 하늘을 밟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작디작은 반딧불 같았다.
이윽고, 둘이 충돌한 순간.
스탈린그라드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무슨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도시를 채운 매연과 불길, 반짝이는 눈과 바닥에 고인 구정물조차 색을 잃고, 오직 붉은색만이 남았다.
싸움을 지켜보는 살로메가 보기엔 그랬다. 피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야에서 움직이는 건 거대한 히틀러와 붉은 여명뿐이었다.
살로메는 멍하니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그것은 조금 전 여명이 보여준 비현실적인 전투의 연장이자, 신화의 구현이었다.
날아다니는 여명을 휘감은 붉은 아지랑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였다.
구름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히틀러의 살을 찢고, 가르고, 씹어 먹는 무기.
저 아지랑이가 주가시빌리라는 걸 눈치 챈 살로메는 경악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저 눈에 보이는 살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질문의 대답을 떠올리려는 순간, 붉은 아지랑이가 넓게 퍼지며 무수한 잔영을 만들어냈다.
어떤 잔영은 검술을 펼쳤다. 어떤 잔영은 마법을 토해냈으며, 어떤 잔영은 순수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건 여명의 육체가 기억하는 모든 기술의 구현이었다.
적어도 살로메가 보기엔 그랬다. 그리고 곧, 무수한 잔영들이 히틀러를 덮치며 그녀의 예상을 증명했다.
여명이 쌓아온, 복수를 위해 익히고 빼앗은 살인 기술들이 히틀러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하찮은!! 운터멘쉬가!!!!
히틀러는 거기에 맞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조금 전처럼 짐승 같은 몸짓이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한 속도와 힘이 가득 담긴 공격. 그건 지구식 무술이자, 흑마법의 정수를 품은 주먹이었다.
!!!
기다렸다는 듯 여명의 망치가 주먹과 충돌했다. 망치와 주먹 모두 끔찍한 소리와 함께 쩌저적-갈라졌다.
공격이 막힌 히틀러는 곧바로 입을 펼쳐 광선을 토해냈다. 아까 전 힘러와 2원로가 쏘아낸 광선의 수백 배는 될법한 굵기의 광선이었고, 여명을 통째로 뒤덮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하지만 여명이 당황하지 않고 낫을 횡으로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광선을 반으로 자르다 못해, 그의 혓바닥을 토막 내고 지나갔다.
히틀러는 점액질이 피처럼 질질 흘러내리는 입을 붙잡은 채 다른 손을 휘저었다.
점액질로 이루어진 그의 손은 분열되며 수많은 무기로 변화했다.
작게는 살덩이로 만들어진 총을 든 손부터, 크게는 수십 명의 인간을 뭉쳐서 발사하는 대포까지.
나치의 끔찍한 상상력이 구현된 온갖 무기들, 만약 나치가 승리한 채로 차원문을 넘었다면 생산되었을 그 무기들은 여명을 향해 공격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의 군인들은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공격에 휩쓸려 고기 조각이 되었다.
살로메는 멍하니 그 지옥 같은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히틀러의 거대한 몸뚱이가 기우뚱-기울어지는 순간, 한가지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명… 아니, 스탈린은 왜 자신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거지?
신화적 폭력을 보는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졌다.
자신이 굴리는 주사위를 막은 여명, 꼼수, 스탈린, 히틀러, 마왕, 심장, 그리고-마하간.
그녀는 무언가 이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반짝이는 머리통은 멍하니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기적을 본 사람처럼.
“마하간.”
살로메가 그를 부르자, 머리통이 눈을 깜빡였다.
-무엇이냐?
“…방법을 알려주세요. 여명과 제가 무사히 여기를 나갈 방법을.”
머리통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왜, 저 무시무시한 존재가 알려주지 않더냐?
“네. 4가 나와서 안 된다고 했어요.”
-….
“그러니, 알려주세요.”
마하간의 머리는 잠시 여명이 히틀러의 가슴에 망치질하는 걸 바라봤다. 변경백과 닮았으되,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왕을 저지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심장과 머리.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예?”
-무술과 마법에서는 머리가 더 중요하지. 생각이 자신을 정의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신성에서는 다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때때로 심장만으로도 움직인단다. 저기, 저 청년처럼.
“….”
-히틀러가 너를 먹기 전에, 네가 히틀러를 먹어라.
“그러면… 제가 마왕이 되는 건가요?”
-그럴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어쩌면 마왕을 봉인한 인간으로 살 수도 있을 게다. 평생을 봉인을 유지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 되겠지만 뭐… 어떻게 살지는 너의 선택이니까.
머리통은 조금 전 스탈린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살로메는 고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