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5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55화(455/817)
EP.455 진실의 무거움 (5) (수정)
* * *
***
여명의 정신은 조용히 자신의 몸을 관조(觀照)하고 있었다.
그가 아닌, 스탈린의 의지가 조종하는 몸.
육체와 정신이 괴리된 감각은 섬뜩했다. 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강신이 이런 느낌일까? 알 수 없었다.
생각은 물론이고, 물리적인 한계마저 넘어 움직이는 육체는 그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스타아아알리이인!!!!
구름을 밀어낼 정도로 커다란 노성을 지르는 히틀러를 향해 망치를 휘두른다.
근육과 관절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
손 망치를 따라 공기가 비명을 지르고, 소닉붐과 함께 히틀러의 몸이 터져나갔다.
뒤이어 공중에서 허리에 힘을 주고 회전, 반대쪽 손의 낫을 휘둘렀다.
혈관과 심장이 모조리 터져나갈 정도로 강렬한 마나를 뿜어내면서.
붉은 궤적을 따라 그의 앞에 있던 모든 것, 그러니까 구름, 매연, 그리고 히틀러의 목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이에 질세라, 히틀러는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목을 붙잡고 입에서 빔을 쏘아댔다. 그러나 여명의 육체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허공을 밟아 빔을 피했다.
여명은 그 모든 것을 보았다. 홀로 마왕을 압도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이 모든 게 어떤 시범임을, 스탈린이 자신에게 뭔가를 보여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주가시빌리.
그래, 그는 보란 듯 주가시빌리의 응용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형화된 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하는 건 물론이고, 아지랑이를 물리적으로 응용해 그가 익힌 무술과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기껏해야 무술 짬통으로 사용했던 여명은 상상조차 못 한 응용법들.
물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선 막대한 마나가 선행되어야 했지만, 여명은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고작 더 강하게, 더 빠르게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살인 무술로…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니.
스탈린은 정말로 신인가?
아니, 공산주의자들의 표현처럼 고차원적 에너지 생명체가 된 건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속에서는 뭔가가 벅차오르고 있었다.
무술에 대한 깨달음? 아니면 신을 마주한 놀라움? 어쩌면 히틀러를 토막 내는 스탈린의 기쁨일지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심장이 뛰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진의를 세운 이후, 이렇게나 가슴이 뛴 적이 있었던가?
그 흥분에 전염된 것인지, 스탈린은 흥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하고 있나? 파시스트! 더 열심히 덤벼라! 네가 갈아먹은 독일의 청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그 와중에도 스탈린은 히틀러의 몸을 신나게 두들기고 있었다. 마왕의 몸을 이루고 있던 점액질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며 스탈린그라드의 폐허를 적셨다.
-크아으아아아! 친위대! 어디 있나!! 힘러!! 친위대!! 저 쓰레기를 막아!!!
히틀러의 고통 섞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그의 몸 곳곳이 꿈틀거렸다.
여명은 마왕의 힘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녀석에게 저당 잡힌 영혼들의 비명과 탄식을 읽어냈다.
그것은 마법이나 무술의 영역을 벗어난, 타락한 존재만이 부릴 수 있는 폭력.
꺄아아아악!!
다음 순간, 히틀러의 몸에서 우수수-괴수가 떨어졌다. 하나 같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무기를 든 괴수들이었다.
그 중 대부분은 여명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 원로들의 몸에 붙어있던 녀석들을 비롯한 나치 전범들이었으니까.
스탈린은 그걸 보며 웃었다.
“오, 이런 선물을 줄 필요는 없네.”
직후, 그가 농민의 낫을 휘둘렀다. 휘릭-대기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스탈린그라드가 출렁거렸다. 그리고 너머에 서 있던 괴수들의 목으로 길쭉한 빛줄기가 번쩍였다.
그건 엘프 검술이었다. 여명이 도둑질한 무술.
그러나 결과는 여명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달랐다.
!
어긋나는 건물, 가느다랗게 선이 그어지는 괴수의 목, 쏟아지는 검은 점액질.
고작 엘프 검술로 수많은 괴수의 목을 따버린 스탈린은 여명의 입을 빌려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 저 새끼를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참으로 아쉬웠는데, 이렇게나마 아쉬움을 푸는군. 고맙다. 히틀러. 전부 네 덕분이다.”
여명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스탈린의 말투가 뒤섞이자, 꽤 그럴싸한 조롱이 됐다.
과연, 히틀러는 괴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쿵! 쿵! 그의 걸음걸음마다 떨어진 점액질에서 나치 괴수들이 탄생했으나, 스탈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히틀러와 아지랑이에 뒤덮인 스탈린이 또다시 격돌했다.
쩌 – 어 – 엉 !!!
흡사 미사일이 터진 듯한 충격음과 함께 거대한 히틀러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물론, 압도적인 질량과 충돌한 스탈린 또한 폐허 저편으로 날아갔다.
쿵-! 가까운 시청 폐허에 추락한 스탈린은 퉤-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무너진 건물에서 나온 직후, 히틀러가 싸질러놓은 괴수와 녀석들의 살에 박힌 총구가 인사했다.
두두두두 – !!!
정상인은 거치해서 쏴야 하는 MG42 기관총 수백 개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히틀러의 전기톱이란 이명답게 섬뜩한 소리가 폐허를 가득 채웠으나, 그뿐이었다. 총알은 스탈린에게 닿기는커녕 붉은 아지랑이조차 뚫지 못했으니까.
다음 순간, 농민의 낫이 번쩍였다.
푸확! 총구보다도 많은 괴수의 목이 공중에 떠오르며 검은 점액질을 흩뿌렸다. 스탈린그라드의 폐허가 끈적하게 물드는 가운데, 스탈린은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여러 번 죽이는 건 흥이 식는군.”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가 낳은 나치 괴수들은 끝없이 스탈린에게 몰려들었다. 놈들은 하나 같이 이성을 잃은 채 이빨을 들이밀거나, 살덩이와 점액질이 뒤섞인 총을 쏴댔다.
가장 용감한 사람조차 겁먹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으나, 여명은 침착하게 녀석들을 살폈다.
어찌나 침착한지, 괴수들의 머리를 짓밟으며 하늘로 뛰어오른 스탈린이 이렇게 물을 정도였다.
“용감한 건가, 아니면 이런 지옥에 익숙한 건가?”
익숙합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공포를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불사의 왕의 심상, 꿈을 흘리는 자의 꿈속, 그리고 미그니움까지.
아무튼, 훌쩍 하늘에 올라선 스탈린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히틀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괜히 시간을 끌 필요 없겠군. 딱 하나만 더 보여주고 끝내지.”
하나 더? 여명이 뭘 더 보여주려는 거냐고 묻기 전에, 히틀러가 양팔을 쩍-벌렸다.
그러자 그의 가슴의 점액질이 꿈틀거리며 무수한 얼굴들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괴벨스를 비롯한 무수한 나치 전범들부터, 마탑 원로들 같은 아샤인의 얼굴 등등 무수한 얼굴들이 히틀러를 따라 괴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라!! 유대-볼셰비키여!! 진정한 위버멘쉬로 거듭난 나의 모습을!!!
위버멘쉬. 넘어선 사람이란 뜻을 담은 그 독일어는 현대 초인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했다.
확실히, 얼굴을 주렁주렁 매단 히틀러는 뭔가를 넘어선 거 같기는 했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그때, 여명의 생각을 읽은 걸까? 스탈린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답지 않다…. 재밌군, 그 깨달음. 절대로 잊지 말게.”
여명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직후, 히틀러가 하늘을 향해 가슴을 내밀었다.
-꺄아아악!!
-Wollt ihr den totalen Krieg?
-아파, 아파, 아파!!
-Deutschland, Sieg Heil!!!
가슴에 무수한 얼굴들은 제각각 연설하고, 비명을 질러대더니, 곧 히틀러의 어깨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스탈린그라드의 하늘을 반으로 갈라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연기.
그렇게 두 색으로 갈라진 하늘 아래 선 스탈린과 히틀러는 서로를 바라봤다.
인간을 벗어난 총통과 인간의 탈을 쓴 서기장.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상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거리를 좁힌 두 독재자는 거의 동시에 팔을 크게 젖혔다.
만(卍)자를 그리는 히틀러의 뒤틀린 손, 교차하는 낫과 망치가 허공을 가른 찰나.
충돌.
하지만 조금 전 충돌과 달리 이번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탈린에 비해 히틀러의 덩치가 너무 커서? 아니면 서로의 힘의 격차가 없어서? 아니,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정답은 히틀러에게는 없고, 스탈린에게 있는 힘에 있었다.
저 바깥 어딘가에서 온 힘.
여명은 주변의 소리를 집어삼키는 그 힘을 느끼며 문뜩 기시감을 느꼈다.
그건 미그니움이 그에게 처음으로 ‘재능’이란 선물을 줄 때, 혹은 성녀가 그에게 축복을 걸어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으니까.
이게 신성인가?
여명의 깨달음을 따라, 붉은 망치와 낫이 히틀러의 손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느릿했기에 역으로 히틀러의 몸에 파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명의 몸은 빠르게 히틀러의 몸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손, 어깨, 가슴, 목…
이윽고 그의 몸이 반대편으로 튀어나온 순간. 히틀러의 점액질 몸 안에는 붉은 아지랑이가 가득 찼다.
“잘 느꼈나?”
스탈린의 말을 따라 하늘을 채운 시커먼 연기가 출렁거리고, 경악한 히틀러의 흰자위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길 잠시.
충격과 함께 미뤄졌던 소리가 드디어 도착했다.
***
후두둑—
살로메는 폭발한 히틀러의 몸에서 뿌려지는 점액질을 피해 몸을 굴렸다.
떨어지는 점액질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 무너질 정도였다.
철퍽! 철퍽!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여명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콘크리트 폐허 위로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진창에 빠져 신발이 벗겨지건 말건, 계속.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폐허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모국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우리의 영웅적인 붉은 군대에게 영광을!]무너진 건물 두 개를 넘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자, 역시나 여명이 있었다.
“위대한 인민에게, 승리한 인민에게 영광을!”
한데, 그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축구공만큼 쪼그라든 히틀러의 머리를 짓밟은 채, 시체에게 연설하는 모습이라니.
“적과의 싸움에서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거기까지 연설을 이어간 그는 관객들… 그러니까 죽은 스탈린그라드의 시체들을 쑤욱 훑은 뒤, 작은 목소리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영광을.”
살로메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녀가 조심스레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여명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했느냐?”
“….”
뭘 정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살로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살고 싶으냐?”
살로메는 한걸음, 여명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제 몸에… 마왕을 봉인하겠습니다.”
여명, 아니 스탈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재능을 평생 봉인 따위에 썩히겠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여명의 몸을 쿡쿡 찌르며 덧붙였다.
“이 몸에 먹이는 수도 있을 텐데. 네 생각보다 훨씬 잘 써먹을 수 있을 거다.”
그럴싸한 유혹이었다. 만약 여명의 몸이 불안정하다는 걸 몰랐다면, 얼씨구나 그러자고 했을 만큼 큰 유혹.
하지만 살로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천형이에요. 이 이상 그에게 부담을 주는 건 용사파티,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린 그릇은,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차기 두메아 가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신념이 가득했다. 마치 옛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진심인가?”
살로메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제야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 아래 숨겨놨던 무장 혈청을 해제했다.
“아쉽군.”
살로메는 뭐가 아쉬운지 묻지 않았다. 스탈린은 밟고 있던 히틀러의 머리를 그녀의 앞까지 뻥-차버렸다.
갑자기 굴러온 히틀러의 머리를 보며 기겁한 살로메는 뒤로 물러다가, 여명의 얼굴을 보고 뭔가를 다짐한 듯,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이, 이제 어쩌면 되죠?”
“흡수해라.”
“그러니까, 어떻게요?”
여명의 몸을 빌린 스탈린이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 팔짱을 끼는 찰나. 살로메의 허리춤에 데롱데롱 묶여 있던 마하간의 머리통이 말했다.
-양손에 각각 나와 히틀러의 머리를 붙잡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면 된단다. 주문은…
그때, 스탈린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너는 필요 없을 텐데. 패배자. 이제와서 무슨 생각이냐?”
-…변덕이오. 늙은이의 변덕.
그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스탈린은 뚱한 표정으로 마하간의 머리통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는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현명한 지도자는 스스로 일어나는 자를 방해하지 않는 법이니.”
-…자비에 감사드리오.
살로메는 그게 무슨 문답이냐고 묻지 않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 법이었으므로.
그녀는 그저 조용히, 히틀러와 마하간의 머리를 양손에 들었다.
-나를 따라 주문을 외우렴. 악순환의 신은 없다.
“…악순환의 신은 없다? 그게 끝인가요?”
-그래, 이게 끝이다.
허무하리만큼 짧은 주문이었지만, 그 끝은 허무하지 않았다.
그녀가 히틀러의 머리통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자, 세상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왕의 검은 점액질과 주사위가 만들어낸 스탈린그라드가 빛에 휩싸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윽고 빛나는 가루가 그녀와 여명을 가득 채운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