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56)
을 위한 세계는 없다-456화(456/817)
EP.456 진실의 무거움 (6)
* * *
***
살로메가 마무리를 잘못한 걸까?
여명은 원로원의 주상복합빌딩이 아닌, 마탑주의 방에서 눈을 떴다.
단번에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을 차지하고 있는 마탑주는 토마시가 아니라 마하간이었으니까.
뭔가 싶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깔끔한 모습의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때는 미끄럼틀이 아니었다.
아무튼, 마하간이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진실을 알고도 모든 걸 포기하시다뇨!
그 말을 내뱉은 직후, 마하간을 스승이라 부른 남자의 모습이 변했다. 갑자기 몇 달 정도 늙은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간절한 어투로 말했다.
-바꿀 수 있습니다. 스승님, 냉철한 계산과 이성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마법사의 본분 아닙니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걸 끝내는 겁니다!
여명은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투부터 행동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러니까 마하간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뒤부터 그의 모습이 바뀌었다.
[시계추를 멈춰도 시간은 돌아가고, 이불 속에 숨어도 해는 뜬단다. 제자야. 어떤 것도 끝나지 않아.]남자는 변했다. 여명의 관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랬다.
-아뇨, 스승님. 그래도 해봐야 합니다.
침착했던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조심스러웠던 말투는 뭔가에 쫓기듯 날카로워졌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모든 걸 끝내겠습니다. 더 이상의 좌절도, 포기도 없습니다.
그는 천천히 마하간을 향해 다가왔다. 걸음걸음마다 그의 복장이 변했다.
낡은 로브, 지구의 양복, 화려한 로브, 그리고… 누더기를 입을 시점에서, 그는 마하간의 등을 찔렀다.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 대신, 약속드리겠습니다. 이건 자기실현적 예언이 아닙니다.
여명은 스승을 죽인 남자를 바라봤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남자. 그는 조용히 스승의 시신을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이게 끝인가? 여명은 뭔가 더 보여주려나 싶어 기다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방은 변하지 않았고, 그는 한참이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잠깐, 잊은 게 있네.』
갑자기 옆에서 스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명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서기장이 인공성물을 들고 있었다.
여명이 KGB에서 빼앗은 인공 성물.
『다시는 이걸로 꼼수 쓰지 말게. 알겠나?』
예, 또 부를 일 없을 겁니다.
여명이 그렇게 대답하자, 스탈린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가봐야 아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
여명이 되묻기 전에, 스탈린은 자신의 옷에 걸린 훈장 하나를 똑-떼어냈다.
황금빛 월계관 안에 소련의 상징인 낫과 망치를 품은 붉은 별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는 횃불과 휘날리는 적색 깃발이 새겨진 훈장.
훈장 깃발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글자가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여명은 그 글을 읽고 나서야 훈장의 정체를 깨달았다.
적기 훈장.
소비에트 정권이 최초로 만든 훈장을 든 스탈린은 자연스레 여명의 가슴에 그 훈장을 가져다 댔다.
이런.
뒤늦게 놀란 여명이 훈장을 떼고 도망치려 했으나, 스탈린이 그를 붙잡자마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렇게 굳어버린 여명의 가슴에 꾸욱-붉은 약장까지 멋들어지게 달아준 스탈린이 웃으며 말했다.
『히틀러 부활 저지 작전의 공을 치하하며… 아,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의 금성 메달은 ‘아직’ 줄 수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뇨,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훈장도 필요 없고요.
난색을 보인 여명이 그렇게 꿍얼거리자, 스탈린은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가봐야 아는 걸세.』
여명은 반박하지 못했다. 번뜩이는 훈장의 빛을 따라, 억지로 이어가던 꿈이 끝을 고했으므로.
***
…
여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몇 번 깜빡거리자, 낯선 천장이 그를 반겨줬다. 기절했던 걸까?
크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늦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칼칼한 고춧가루의 냄새와 MSG의 진한 향기.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아름다운 얼굴, 대충 올려 묶은 검은 머리,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홍세티. 여명이 누운 침대 옆 탁자에 앉은 그녀는 컵라면 뚜껑을 열고 있었다.
이제 막 다 익은 참이었는지, 세티는 컵라면 뚜껑을 든 채로 굳어버렸다.
짧은 침묵, 그보다 짧은 어색함.
이불을 걷어낸 여명이 연극 톤으로 물었다.
“임자, 내껀 없소?”
세티는 갑자기 웬 사투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곧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없어요. 그리고 다른 여자 구하러 가서 기절한 주제에 밥부터 찾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피식 웃은 여명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나무젓가락을 뺐으며 말했다.
“이 여편네가, 일하고 온 남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
그렇게 투덜거린 여명이 라면 면발을 크게 퍼서 입으로 가져가자, 세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렸다.
“대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고전 소설.”
“다큐가 아니라 소설? 흠, 그러면 컵라면 가져와서 다행이네. 설렁탕 가져왔으면 못 깨어났을 테니까.”
“….”
“오라질 놈, 설렁탕을 가져왔는데, 왜 먹질 못해?”
세티가 성우처럼 고전 소설의 대사를 따라 하는 사이, 여명은 아직 반이나 남은 라면을 다시 돌려주며 물었다.
“운수 좋은 날이면 정말 그랬을지도? 뭐… 어쨌거나, 나 얼마나 기절해있던 거야?”
“대충 열 시간쯤.”
의외로 오래 기절해있지는 않았네. 여명은 면발을 오물거리는 세티를 보며 물었다.
“그러면 나머지 일들은 어떻게 됐어?”
“음, 우선 살로메는 무사해. 마법 하나 못 쓸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 마왕을 봉인한 것치고는 별일 없는 거지. 마탑주의 말에 의하면 운이 좋았데.”
“….”
여러모로 운수 좋은 날이었네.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컵라면 국물까지 싹 비운 세티가 말했다.
“그리고 원로원 문제는 일단 수사를 핑계로 덮어놨어. 아직 전대 마탑주랑 마하간의 제자가 남아 있으니까… 처형관 말로는 이틀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래.”
“….”
그제야, 여명은 아직 마탑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피로가 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도 됐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건 간에, 히틀러니 스탈린이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일을 겪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튼, 그가 한숨을 내쉬자 세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더 쉴래? 저쪽에서 움직임이 보이면 깨워줄게.”
“아니, 잠은 됐고 밥 먹을 수 있을까? 라면 들어가니까 괜히 더 출출하다.”
세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식당으로 가자. 이제 곧 식사 시간이니까, 먼저 먹고 있어도 될 거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아니, 새벽에 기절하고 열 시간쯤 잤으면 딱 점심시간이긴 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말하면, 세티가 점심도 거르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그의 옆을 지켰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히 뭉클해진 여명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을 나서려는데, 툭-여명의 헐렁한 상의 사이에서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꿈속에서 스탈린이 걸어준 적기 훈장.
여명이 정색하는 사이, 세티가 훈장을 집어들며 물었다.
“이거 뭐야? 훈장?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히틀러 잡는 거 도와줬다고, 스탈린이 줬어.”
“….”
너무나 솔직한 고백이었을까, 세티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물론, 여명은 웃을 수 없었지만.
그리고 잠시 후, 정적 속에서 여명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것도 킴 필비의 훈장처럼 성물의 상위 아이템 아닐까?”
“….”
너무나 그럴싸한 가설이었기에, 여명은 훈장에 마나를 불어넣으려는 세티를 막았다.
***
그 무시무시한 외관과 달리, 두메아 저택의 내부는 아름다웠다.
물론, 내부를 돌아다니는 가솔들의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완전무장한 그들은 여명이 지나갈 때마다 예를 표했는데, 단순히 손님을 대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가문의 은인을 대하는 것 같은 진지한 예법.
그 예법에 담긴 의지와 태도가 어찌나 진중한지, 여명이 부담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세티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왜, 가문의 은인 맞잖아?”
“….”
“전대 가주의 시체를 회수하고, 현 가주와 함께 싸우며, 미래 가주의 목숨을 구했다… 이게 은인이 아니면 뭐야? 그러지 말고 가슴 쫙 펴. 마왕도 막았잖아?”
그건 그랬다. 세티의 응원을 받은 그는 애써 가솔들의 태도에 적응했다.
때로 지나친 겸손은 예절에 어긋나는 법이라던가? 그가 예법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자, 몇몇 가솔들은 감격한 표정지었다.
아무튼, 그렇게 식당으로 걸어가길 잠시.
두 사람은 식당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역대 가주들과 안주인들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대부분 멋들어진 고전 그림들이었고, 특히 데스나이트 가주의 초상화는 기사 그림의 귀감이라 할만했다.
멋들어진 갑옷과 높게 든 가문의 보검, 그리고 진중한 표정까지.
당사자가 앞에서 주접을 떨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한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이야, 날 본 적도 없는 화가가 상상만으로 그려서 그런가, 진짜 멋지지 않나? 집 나가서 죽은 보람이 있어.
“….”
-근데 우리 마누라랑 딸애 그림은 좀 그렇군.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이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거든. 후손들에게 보여줄 얼굴인데, 이건… 음, 뭐라고 하더라… 보정? 그래, 보정으로 속이면 안 되지.
“….”
여명과 세티는 애써 모른 척, 데스나이트 가주의 주접을 피해 식당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식당에서는 또 다른 주접꾼들이 두 사람을 반기는 게 아닌가.
-예이! 왔다! 멍청한 수컷 놈들! 봤냐? 봤지? 쟤들 밥 먹으러 무조건 온다고 했잖아! 자, 자, 돈 내놔.
여명을 보자마자 히히덕거리며 주변 데스나이트들과 마탑주에게 돈을 걷는 벨라디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며 식탁에 앉자, 돈을 가장 많이 뜯긴 현 마탑주가 다가와 투덜거렸다.
“아니, 혈기 왕성한 나이에 남녀가 단둘이 방에 있으면 할 일이 하나밖에 더 있어? 얼마나 토끼 같으면 벌써 밥을 처먹으러 내려왔….”
그제야 무슨 내기를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여명이 마탑주의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그걸 본 카레닌과 두메아 가솔들이 놀라 팔짝 뛰긴 했지만… 뭐, 여명은 개의치 않고 식사를 주문했다.
히라리아 서부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15시간하고 32분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