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6)
을 위한 세계는 없다-46화(46/817)
〈 46화 〉 성녀는 희생양의 꿈을 꾸는가 (6)
* * *
***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들이 굴러다니고, 곳곳에 총알 자국이 가득한 베이스캠프.
캠프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가득했다.
내부에 앉아 있는 다섯 사람 중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은 탓이었다.
가장 먼저 권 단장.
그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용병들이 전부 기절해 있는 걸 확인한 뒤부터,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나마 상대가 손속을 둬서 다행이지, 죽일 생각으로 손을 썼다면 전멸이었을 테니까.
심기가 불편한 건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드워프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깥으로 내던져졌던 드워프는 이마에 큼지막한 혹을 달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반지가 가득한 손으로 혹을 주무르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성녀는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종종 눈밭이 어쩌고 하는 소리로 침묵을 깨긴 했지만…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성녀의 어머니.
이 모든 침묵의 원인인 그녀는 여전히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망토 바깥으로 내민 양손이 작게 떨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딸의 눈밭(?)을 운운하며 총질까지 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답니다…라는 상황 아닌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부끄러워야지.
물론,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명은 그녀를 용서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목을 잘라버릴 수도 없는 일인지라, 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명의 금빛 눈동자가 다른 네 사람을 쑥 훑었다.
드워프와 선죽 용병단, 성녀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여명 본인까지. 서로 얽히고설킨 생각과 목적들을 정리할 시점이었다.
“의견이 없다면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우선, 각자 돌아가며 원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지금은 서로… 오해가 좀 있으니 말입니다.”
여명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드워프였다. 그는 혹을 주무르지 않는 손을 들어 여명에게 동의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나는 찬성일세.”
사업가다운 태도였다. 다른 사람들도 별 이견을 내지 않았기에, 여명은 드워프에게 눈짓했다.
“그럼 먼저 시작하시겠습니까?”
“자네만 괜찮다면야, 얼마든지.”
드워프는 큼큼, 헛기침한 뒤 몸의 먼지를 털었다. 이마의 혹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나름 예의를 차린 몸가짐이었다.
곧이어, 그는 성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성녀님?”
“네?”
“둔간중공업과 선죽 용병단을 대표해서, 성녀님께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띄운 드워프는 여명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반복했다.
만주에 숨겨진 보물과 그것을 지키는 용.
보물을 얻기 위해 용병단과 소수의 초인들이 동원될 것이며, 거기에 성녀님께서 꼭 함께해주십사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드워프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녀가 입을 열었다.
“그 보물이라는 거… 혹시 싱안링 산맥 북쪽 부근에 있는 건가요?”
“어… 어?”
짧은 침묵, 큰 놀라움. 드워프가 입을 쩍 벌렸다.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게요…”
성녀는 말끝을 흐리며 여명과 드워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두꺼운 안대 탓에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붉은 입술을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또 되먹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저도 그곳에 갈 일이 있거든요.”
여명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녀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말할 차례죠?”
“저, 성녀님. 그럼 저희 쪽 제안은…”
“대답은 조금 이따가 해드릴게요.”
그녀는 손가락을 펴 드워프의 입을 막은 뒤, 여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흐음, 천여명… 씨? 군? 오빠? 뭐라고 불러 줄까?”
오빠라니, 무슨 되도 않는 호칭이란 말인가.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냥 여명이라고 불러라.”
“뭐 아무튼, 여명. 내가 아침에 했던 말. 기억나지?”
여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노인네들 몰래 만주에서 찾을 게 있으니, 그동안 보디 가드가 되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단번에 거절했지만.
“내 요구는 그대로야. 어때?”
“내 대답도 그대로다. 싫어.”
회복실에서 나눴던 대화가 반복되었으나, 성녀의 반응은 그때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드워프를 바라봤다.
“다룰마씨? 저도 같이 보물을 찾으러 갈게요. 대신, 저 사람도 일행에 넣는 조건으로.”
“….”
“용병은 용병단이 까라면 까야지. 안 그래?”
드워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명과 성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왜 저러지? 성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여명이 입을 열었다.
“난 용병단에서 탈단했다.”
“뭐? 갑자기 왜?!”
“이유는 저 드워프에게 물어봐라.”
“아니,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용병단을 탈단하는 경우가 어딨…!”
여명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내가 말할 차례다.”
그 말에 입을 벙긋거리던 성녀는 결국 푹 한숨을 쉬고 팔짱을 꼈다.
여명은 허리에 달린 검집을 풀어 무릎에 올린 뒤, 투명 망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성녀의 어머니라고 하셨지요.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누군가는 오해랍시고 제 머리에 총을 쐈고, 또 누군가는 저를 이용할 생각으로 수작질을 걸었습니다.”
여명은 슬그머니 드워프와 권 단장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친 드워프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고, 권 단장은 조용히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혹은, 그런 척하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건 뻔뻔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칼보단 혓바닥으로 얻어낼 게 많다는 뜻이었으니까.
여명은 혀로 입술을 적신 뒤,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당께선 저보다 어른이시니, 조언을 구하는 마음으로 여쭙겠습니다.”
느릿하지만 정중한 말투. 여명은 눈을 깜빡였다.
“제가 어떻게, 무엇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상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드워프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권 단장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작게 속삭였다.
그 직후, 권 단장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이스캠프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투명 망토 너머의 여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양손을 꽉 쥔 채로, 잠시 침묵했다. 아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여명은 끈기 있게 기다렸고, 마침내 투명 망토 너머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이 길어질 듯하니, 잠시 기다려주겠니?”
옅은 마나가 실린 목소리. 그것은 마치 주문처럼 여명과 그녀 사이에 어떤 마법을 연결했다.
여명은 검을 뽑을까 고민하다가, 마법이 연결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은 탓이기도 했고, 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나 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마법이 두 사람을 연결한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간단한 텔레파시일 뿐이니. 듣는 귀가 많아, 부득이하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텔레파시? 그녀의 말마따나, 드워프와 성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선… 성녀의 보호자로서,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거란다.”
입 밖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텔레파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천여명… 아니, 쇠똥구리. 제 이름은 모리네. 푸른 쥐의 사장이자, 성녀의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딸을 가진 부모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사적인 감정은 없었단다.”
가장 먼저, 푸른 쥐의 대표로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지난번 우리 직원들이 그쪽에게 끼친 무례와… 실수에 대해서도.
쇠똥구리였던 시절의 자신을 아는 사람, 그것도 푸른 쥐의 사장이라.
악연이란 그물과 같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얽혀있다더니. 이 상황이 딱 그 말대로였다.
여명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숨기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쪽이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한 게 잘못 아닙니까? 성녀와 일개 용병의 목숨값은 같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
목숨값이라. 저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명은 입을 꾹 다물고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대체 왜 이따위 연기를 하는 겁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제 딸이 들어선 안 되는 말이니까요.
….
당신은, 성녀가 어째서 성녀인지 알고 있습니까?
…딱히 알고 싶지 않습니다만.
다섯 신께 예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 남자라면 성자고, 여자라면 성녀라 부르지요.
…예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예지라니? 거짓말이라 생각하기엔, 성녀가 보여준 행적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다.
용과 싸우는 자신을 바로 찾아왔고, 누구보다도 먼저 북만주의 비극을 알렸다.
만주 기지가 빠르게 지원군을 낼 수 있던 것도, 전부 성녀 덕분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게 예지능력의 결과라면…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적들이 설명됐다.
예지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몇 번이고 미래를 엿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명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황금빛 눈동자가 투명 망토 너머, 성녀의 얼굴을 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한 번 본 미래는 다시 볼 수 없고, 신들께선 올바르게 미래를 바꾸는 법은 알려주지 않으시니까요.
….
모든 자유의지가 그렇듯, 자칫 잘못하면 좋은 의도로 행한 일이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래서, 저한테 성녀의 능력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뭡니까?
여명이 그렇게 이죽거리자, 상대편의 투명 망토가 출렁였다. 깊은 한숨.
사실, 제 딸이 성녀가 되는 순간, 저 또한 어떤 미래를 봤습니다.
….
제가 본 딸의 미래는… 장밋빛은 아니더군요.
텔레파시 너머로, 깊은 슬픔이 전해졌다. 여명은 느껴본 적 없는, 어머니의 슬픔이었다.
영웅의 동료가 되어 함께 세상을 구하지만, 딸아이 본인의 행복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성도에서 홀로 늙어가다가… 쓸쓸히 죽었습니다.
여명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투명 망토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딸 아이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당신과 불장난을 벌였기 때문에. 내 딸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게 아닐까.
여명은 검을 뽑지 않기 위해 심호흡했다. 운명이니, 눈밭이니 어쩌니 떠들던 건 결국 그런 말이었나.
그깟 이유로 날 죽이려고 한 겁니까? 딸 아이 운명을 바꾸겠다고? 아무 증거도 없이?
…예.
이기적이고, 잔혹한 생각이었다. 확실히, 성녀 앞에서는 못 할 말이군.
어쩌면 성녀가 살짝 맛이 가 있는 이유는 예지능력 이전에 가족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여명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모리네는 계속 텔레파시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조금 전, 인질로 잡힌 딸 아이의 표정을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걸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작은 헛웃음. 그리고 한숨.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 딸이 그렇게 즐거워하는데.
즐거워했다고? 여명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딸에 그 엄마라고 해야 할까.
딸은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미래를 봤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제정신이 아닌 건, 성녀의 어머니를 티끌만큼이나마 이해하는 여명 본인이었다.
청소부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정부를 불태우려는 여명과 딸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망설임 없이 총을 쏜 모리네.
서 있는 위치만 다를 뿐, 둘의 광기는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명은 그녀에게서 혐오를 느꼈다. 이른바 동족 혐오라고 할 만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덕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여명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모리네는 그가 쇠똥구리였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째서 천여명이 됐는지는 모른다.
만약 그 사실을 모리네가 알았다면, 그래서 여명과 똑같이 동족 혐오를 느꼈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텔레파시 대신, 사생결단을 냈을 테니까.
여명, 제가 제안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여태껏 자기 마음대로 떠들어 놓고 무슨 제안?
제 딸에게 당신의 청춘을 주십시오.
….
그 대가로, 제가 가진 모든 정보와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모욕적인 제안이었다. 여명과 성녀, 둘 모두에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마나를 풀어놓았다. 파양결이 일어나고, 주변의 대기가 출렁거린다.
청춘사업은 다른 사람에게 알아봐.
제 딸은 친구를 사귀는 데 서툽니다. 또래 친구라 할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고, 그조차 지난 3년간 만나지 못했습니다.
꺼져.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무릎 꿇고 애원이라도 할까요?
투명 망토에 가려져 있던 의자가 덜컹거렸다. 모리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무릎 꿇을 기세였으나, 다행히 그녀가 무릎 꿇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보다 먼저, 성녀가 자리에서 벌떡 여명과 모리네 사이를 가로막은 탓이었다.
“아 진짜, 그만 좀 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