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60)
을 위한 세계는 없다-460화(460/817)
EP.460 Sonnenaufgang
* * *
만약 내일 죽는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까요?
정말? 난 아닌데.
『전대 성녀님의 알려지지 않은 교리 논쟁 중 발췌』
***
지이잉—
밖으로 밀려난 여명은 멍하니 차원문을 바라봤다.
‘방금 그건 뭐야? 눈? 성녀의 아들?’
계속 머리를 짓누르던 압박감 때문인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방금 본 것들이 환상이 아니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눈’들의 약속대로, 차원문은 더 이상 괴수를 내보내지 않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미 밖으로 나온 괴수들까지 멈춘 건 아니었다. 어림잡아도 만 단위가 넘는 괴수들은 여전히 히라리아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노련한 데스나이트들이 불타는 지형을 이용해 틀어막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는 상황.
그 모습을 본 여명은 애써 정신을 붙잡고 ‘눈’들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에케모와 자신, 둘 중 누가 더 옳은지 증명하라…
고상한 말이었지만, 결국 에케모와 싸우라는 말.
아마 자신이 이기면 차원문을 닫고, 에케모가 이기면 다시 괴수를 토해낼 거라는 뜻이리라.
대체 성녀와 무슨 약속을 했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그 이전에 그 약속이 진실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못할 것도 없지.”
핵이라는 최종 해결법이 있는 이상, 선택권은 그에게 있었다.
다시 차원문 너머로 날아가서 ‘눈’들에게 핵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들의 말대로 에케모와 싸우는 것도, 전부.
스탈린 실종 이후 수틀리면 핵 버튼부터 찾던 모스크바의 정치인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여명은 한결 덤덤해진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용의 그림자 아래, 인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히라리아의 쓰레기장이 보였다.
“….”
아주 잠깐 뜸을 들인 여명은 에케모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다시 차원문으로 들어가 ‘눈’들에게 핵을 던지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울 것 같아서? 혹은 ‘눈’들이 속삭인 성녀의 아들이란 단어에 마음이 흔들려서?
아니, 둘 다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한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운명을 알고 타락한 자, 그리고… 마하간의 제자.
“…에케모.”
여명이 그의 이름을 읊조리기 무섭게, 그가 위를 올려다봤다.
마법사 특유의 깊은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 그는 여명을 향해 아샤 특유의 예법으로 허리를 굽혔다.
굽은 허리 너머로 보이는 날개 달린 지팡이와 유난히 차분한 얼굴이 시선을 끌었으나, 정작 여명이 시선을 빼앗은 건 그의 로브였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로브.
“…미친 새끼.”
여명은 단 한마디로 그를 정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입고 있는 로브는 지박령이 된 마하간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로브였으니까.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에케모는 작게 웃으며 하늘을 밟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마치 투명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느긋하게 하늘 위로 올라선 녀석은 이윽고 여명과 눈을 마주했다.
얽히는 시선, 이글거리는 용의 숨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괴수들의 괴성.
그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에케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에케모입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대체 당신이 누구길래… 버려진 신들이 약속을 어긴 겁니까?”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겐 이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인천의 쇠똥구리였고, 세티의 여명이었으며, 드워프와 용의 친구이자, 세계수의 사위, 적기 훈장을 받은 붉은 별이자 그리고…
“용사.”
“…?”
“네가 죽인 스승에게 공인받은 용사다.”
직후, 에케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죽인 스승이란 말 때문인지, 아니면 용사란 단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맞거나, 둘 다 아닐 수도.
어쨌거나, 에케모는 한 쌍의 날개가 장식된 지팡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설득해봤자 소용없겠군요.”
“설득? 히라리아의 사람들을 전부 죽이는 걸 도와달라는 설득?”
여명이 산의 눈물과 무장 혈청을 뽑으며 이죽거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전 히라리아 사람들로 끝낼 생각 없습니다.”
“…뭐?”
“모두 죽어야 합니다. 이 땅을 넘어, 아샤 전체, 그리고 지구까지. 이 땅에 지성이 있는 모든 생명체… 예,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그것은 믿음을 넘어선 광기였다. 역겨움을 느낀 여명은 그대로 용에게 명령했다.
“태워.”
즉시 용의 입이 쩍-벌어지고, 푸른 화염이 에케모를 덮쳤다.
***
밤하늘을 뒤덮었던 푸른 화염이 아지랑이가 되어 날아오르는 순간.
여명은 이미 용의 머리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양손에 쥐어진 쌍검을 따라 검기가 휘몰아치고 막대한 마나가 대기를 일그러트렸다.
처음부터 탐색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일격.
곧이어, 산의 눈물이 어마어마한 살기와 함께 에케모가 서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짓눌렀다. 순간 주변의 마나가 호응하며 전율했다.
쩌어엉 – !
격렬한 검풍이 화염을 밀어내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에케모를 드러냈다.
지팡이로 여명의 산의 눈물을 막아낸 자세.
하지만 동시에 휘두른 무장 혈청은 그의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그것도 심장이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 아니, 초인이라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처였으나, 에케모는 가슴을 찌른 무장 혈청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용사란 말이 허언은 아니군요. 전통적인 아샤의 용사가 아니라 공산 용사일 줄은 몰랐지만… 하, 주가시빌리라니.”
“….”
여명은 대답 대신 무장 혈청을 뽑고, 발바닥으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빡! 발로 찬 그의 몸이 역으로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발차기. 에케모의 안면이 으스러지며 우드득-소리가 났으나, 그는 태연했다.
어찌나 멀쩡한지, 용의 머리에 착지하는 여명을 향해 먼저 질문을 꺼낼 정도였다.
“그런데 이거 참, 궁금하군요. 공산 용사도 제 정체를 눈치챌 수 있을지.”
“….”
정체? 곧 여명은 무장 혈청의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점액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왕의 피… 마왕?”
“오, 점액질만 보고 맞추시다니. 역시 원로원을 죽인 건 당신이었군요.”
“….”
“궁금했습니다. 현재의 주인공으로는 나치 잔당과 마왕의 심장까지 가지고 있는 원로원을 처리할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잡았을까? 그런데, 역시나. 제 예상을 뛰어넘는 동료가 있었던 거군요.”
조금 전 일격을 맞고도 이만한 여유라니. 여명이 녀석을 이미 완성된 마왕이라고 판단하는 사이 에케모가 지팡이를 쥐며 덧붙였다.
“간단히 말해, 당신만 죽으면 저 너머의 주인공도, 이 지긋지긋한 저항도 모두 끝이겠군요. 다행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길어지지 않아서.”
여명은 10강, 혹은 미군이 무섭지 않냐 같은 상식적인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한층 더 마나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해봐.”
에케모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가로로 허공을 그었다.
곧, 그 선을 따라 뒤틀린 마나가 공간을 집어삼켰다.
복잡한 수식이 뒤를 따르며 주문의 실을 엮었다. 소리는 없었고, 기세도 없었다.
그러나 느낌은 있었다. 온몸의 닭살이 일제히 일어나고, 본능이 경고등을 울리는 그런 느낌.
여명이 이를 악문 순간, 마법이 완성되었다.
[융해 광선]마하간의 시체가 사용했던 주문과 똑같은 주문이었으나, 안에 담긴 규격이, 범위가 달랐다.
찬란한 빛줄기, 거의 기차만큼 굵은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여명을 덮쳤다.
!!!
눈앞이 새하얗게 물든다. 피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뿐.
여명은 무장 혈청을 놓고 양손으로 산의 눈물을 쥐었다.
힘에는 힘, 그는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술, 즉 용사의 무술을 휘둘렀다.
밀려오는 빛을 향해 일필휘지로 선이 그어졌다. 여명의 몸속 마나가 쭈욱 빨려 나가며 광선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
반으로 잘려 나간 광선은 용의 위아래에서 폭발했다. 고막이 찢어지고, 용의 거체가 흔들릴 정도로 압도적인 충격파가 몰아쳤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여명은 그렇게 확신하며 에케모를 향해 용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현실이 되었다.
에케모는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러 똑같은 마법을 다시 시전 했다.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여명은 기다렸다는 더 빠르게 용의 뼈를 내달렸다. 마법을 피하며 장거리 싸움으로 갈 생각 따윈 없었다.
숨을 참고, 양손으로 검을 잡는다.
이어지는 융해 광선의 빛, 횡으로 그어지는 검, 그리고 폭발.
!!!!!!
세 줄기의 광선이 동시에 폭발하자, 후폭풍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명은 오직 감각만으로 용에게 명령했다.
후려쳐!
어느새 에케모의 코앞까지 다가간 용은 녀석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앞발을 휘둘렀다.
짜악 – !
용의 뼈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끝으로 에케모가 추락했다.
아직, 아직이다. 여명은 용과 함께 땅으로 고개를 돌리고 가속했다. 낙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쾅! 에케모가 쓰레기 더미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여명은 망설임 없이 녀석이 떨어진 자리로 용사의 무술을 휘둘렀다.
후우웅 – !
공기가 갈라지고, 땅이 위로 기다란 선이 생겼다. 쓰레기 더미와 그 바닥, 그리고 에케모를 동시에 갈라버린 일격.
여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용의 거체를 가속했다.
의지가 없는 용의 뼈는 망설임 없이 날갯짓했고, 그대로…
콰아아아아아앙 – !!!!
쓰레기장과 충돌했다.
***
“쿨럭.”
여명은 먼지를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돌 직전, 용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리긴 했지만, 모든 충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실시간으로 시큰거리는 뼈마디가 추락의 충돌을 증명하고 있었으나… 팔자 좋게 재생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에케모는?’
시야를 가리는 먼지 속에서 공간 감지를 펼치자, 주변의 궤도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곳.
지하 벙커… 아니, 쓰레기장 지하인가. 아마 용이 충돌하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천장이 갈라진 듯했다.
여명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용의 뼈를 내버려 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케모는 어딨지?’
용사의 무술과 용의 충돌을 동시에 맞았으니, 녀석도 멀쩡하지는 못할 터.
여명은 검을 꽉 쥐고 지하 통로를 내달렸다. 지금도 괴수를 막고 있을 데스나이트들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끝을 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초나 걸었을까? 여명의 감각이 문뜩 뭔가를 찾아냈다.
갈가리 찢어진 채, 바닥에 버려진 종이 쪼가리들.
단순히 쓰레기라기엔 의도적으로 찢어놓은 게 눈에 밟혔다. 여명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종이 쪼가리를 줍자…
[전-성녀- 연구-]전대 성녀의 연구기록. 그가 마탑으로 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찢겨지고, 버려진 채로.
“염병.”
아쉬움에 몸을 맡길 틈이 없었다. 여명은 한숨을 삼킨 뒤, 버려진 종이들을 대충 챙겨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나중에라도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듯 다시 조립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미처 줍지 못한 종이 쪼가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를 들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케프리.]떠오르는 태양, 즉 여명을 상징하는 이집트의 대표신.
가단은 이게 그의 신명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여명이 그의 본명도 아니거니와, 결정적으로 떨어진 별이 아니라서 신명 후보에서 빼놓은 신이었다.
근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줍게 된 걸까?
여명이 묘한 인연을 느끼려는 찰나.
그의 공간 감지가 두 명의 인기척을 잡아냈다. 여명은 그대로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비각술에 파양결의 마나가 깃들고, 파도치는 마나가 그의 몸을 쭉쭉 밀어냈다.
이윽고 그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외의 인물이 그를 반겼다.
“…진실을 흘리는 자?”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안대를 쓴 소년. 녀석은 에케모와 나란히 천장이 뻥 뚫린 쓰레기 저장고에 서 있었다.
“어… 반갑습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어, 만난 적 있다.”
“진실… 이네요? 뭐죠, 이거?”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쓰레기 산 위에 서 있는 에케모를 노려봤다. 조금 전 충돌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그의 얼굴 절반은 흉측하게 으깨져 있었다.
“도망가는 속도 한 번 빠르군. 에케모. 처음 지껄인 말들은 다 어디갔지?”
에케모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도망이라뇨. 아닙니다. 용사의 무술을 단 한 자세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용사에게 도망칠 이유가 없지요.”
“….”
“하지만… 용의 뼈를 껴서 2:1을 하려니 귀찮은 점이 많더군요. 그래서 이쪽도 머릿수를 사용하려는 겁니다.”
“아야톨라 껴서 2:2를 하시겠다? 스승을 뒤에서 찌른 놈답게 혀가 길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명의 머릿속은 쉴 새 없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아직 미지수인 진실을 흘리는 자의 천벌에 어떻게 대항하고, 이 각도에서 융해 광선을 어떻게 막을 것이며, 어느 타이밍에 용의 뼈를 움직일 것이냐…
하지만, 이어진 에케모의 말은 그 고민이 무색하게 만들었다.
“2:2라뇨? 아니, 잊으셨습니까? 이쪽 머릿수는 그 이상입니다.”
“….”
“오너라, 버려진 찌꺼기들아.”
그건 괴수를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다. 직후, 머리 위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에케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강합니다. 10강과 동급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변경백처럼 노련하지도 않고, 알파 원처럼 압도적인 것도 아니며, 호세처럼 자신만의 특별한 무술을 세운 것도 아닌… 그저 그런 강함. 그런 강함으로는 저를….”
그래, 계속 아가리 털어봐라. 여명은 개의치 않고 마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
터엉!
그의 목표는 에케모가 아닌 진실을 흘리는 자였다. 한 놈이라도 머릿수를 줄이기 위한 기습이었건만, 아야톨라는 주먹을 쥐는 것만으로 총알을 ‘무시’했다.
“퀴니 코완의 마총? 탐나는 컬렉션이네요. 당연히 성녀에게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오늘 여기서 죽으시면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렇게 지껄인 녀석은 곧바로 쓰레기 산 너머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가야 하나?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여명은 진실을 흘리는 자를 내버려 두고 검기를 일으키며 에케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조금 전 같은 융해 광선을 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역시나, 조금 전처럼 융해 광선 주문을 시전하던 에케모는 지팡이를 휘둘러 여명과 맞서야 했다.
그리고 그대로 둘이 충돌하는 순간…
쩌 – 엉 !!!
소리가 폭발했다.
그것은 주가시빌리로 강화된 용사의 강대한 힘과, 이미 인간을 벗어난 자의 힘이 격돌하며 생긴 결과였다.
여명도, 에케모도 자세를 고치지 않고 고스란히 그 충격을 흡수했다.
마나와 육체의 힘으로 부리는 억지.
둘은 아직도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웅웅거리는 무기를 다시 휘둘렀다. 서로의 손아귀가 터질 정도로 우악스러운 일격을 시작으로, 공방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방어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무식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손목이 베이고, 허벅지가 베이는 것 정도로는 둘 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늑대처럼, 물고 물리는 공방.
그 공방의 본질은 결국 마법을 사용할 틈을 벌기 위한, 마법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한 싸움의 연장이었다. 결국, 먼저 조급함을 느낀 건 마법사였다.
어느 순간, 에케모는 여명의 목을 향해 지팡이 끝을 찔렀다.
실수였다. 여명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지팡이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으므로.
챙! 서로의 꼭짓점과 꼭짓점이 충돌하고, 비교적 굵은 지팡이의 궤도가 휙 꺾이며 에케모의 가슴이 열렸다.
점으로 점을 찌르는 기예.
가진바 무술의 이치와 지닌바 깨달음의 격차를 증명하는 일격이었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여명의 검은 그대로 에케모의 목을 꿰뚫었다.
푸확, 피가 튀는 가운데, 에케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강함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 니다.”
목에 난 구멍 때문에 말이 뚝뚝 끊겼다. 여명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목에 꽂힌 검에 화산쇄설을 사용했다.
퍼엉!!
녀석의 머리가 폭발하며 검은색 점액질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마무리를 위해 녀석의 몸을 토막 내려 했으나… 시간초과였다.
다음 순간, 머리 위로 무수한 괴수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으니까.
-캬아아아악!
결국, 여명은 에케모를 내버려 둔 채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휘둘러야 했다.
화르륵! 쓰레기장이 통째로 소각장으로 변했지만, 괴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명을 향해 쏟아졌다.
여명은 어떻게든 에케모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녀석의 몸뚱아리는 머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꿈틀꿈틀 여명과 멀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날려도 안 죽냐.’
결국, 버티지 못한 여명은 훌쩍 밖으로 뛰어올랐다.
득실거리는 괴수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골용이 두꺼운 꼬리를 휘둘러 녀석을 쳐냈다.
그렇게 고기 조각이 되어 사라지는 괴수들을 내버려 둔 채, 여명은 잠시 숨을 골랐다.
히틀러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빌어먹을 마왕의 심장을 가진 놈들은 하나 같이 징글징글했다.
재생력만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장 징글징글한 건, 수틀리면 거대화하는 꼬락서니였다.
쿵!
그리고 역시나, 괴수들이 뛰어내린 구덩이에서 거대한 손이 튀어 나왔다. 용의 그것보다 두 배는 굵고 흉측한 괴수의 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체념 섞인 여명의 목소리를 따라, 거대한 에케모의 얼굴이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검은 점액질과 괴수의 시체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육체는 덤이었고.
-말했잖습니까. 나는 강함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거대한 몸에 어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지랄을 한다. 지랄을.”
여명이 다시 용의 머리 위로 올라타며 말하자, 에케모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싸우는 겁니까? 단순히 용사라서요?
“….”
-아니면 주인공이 당신에게 뭔가를 약속했습니까? 사랑? 애욕? 그것도 아니면 운명?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용을 타고 다시 하늘로 떠오른 여명을 보며 에케모는 진심으로 한탄했다.
-다 거짓입니다. 용사란 굴레도, 사랑이란 선물도… 전부 거짓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무한한 도돌이표 속에 갇힌 음표에 불과합니다. 왜 모르는 겁니까?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걸! 악보 자체를 불태우는 것. 오직 그것뿐이란 말입니다.
“….”
-그러니 용사여… 나는 당신의 분전을 동정합니다. 무지한 이 세상 모두를 증오하는 동시에 동정하는 것처럼.
거기까지 말한 에케모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쓰레기장 위에 섰다.
어림잡아 20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몸체.
히틀러의 그것보다도 거대한 몸을 본 여명은 조용히 양손으로 검을 잡고, 마나를 실으며 생각했다.
녀석에게 무슨 대의가, 무슨 정의가 있건 상관없다고.
스승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고, 누군지도 모를 무수한 민간인들을 죽이며 얻어낼 대의가 뭐란 말인가.
그런 대의는 나치즘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지구인들은 너무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 그때 흘린 피와 눈물의 강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거기에 피와 눈물을 더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승자와 패자뿐.
그렇게 각오한 여명이 먼저 용사의 무술을 휘두르려는 순간.
여태껏 숨어있던 소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당신의 목숨을 해칠 수 있는 약점이 뭐죠?”
뭐? 여명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입은 이미 정답을 말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힘을 담은 탓에 육체란 그릇에 금이 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걸 담으면 이 그릇이 통째로 깨지겠지.”
“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약점이네요. 너무 많은 힘을 담았다니.”
“….”
저 아래, 쓰레기 사이에서 진실을 흘리는 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떻게? 분명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 아니었나? 아니면 번갈아 질문하는 것 자체가 연기였던 건가?
여명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아야톨라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겨눴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흠칫, 여명이 본능적으로 녀석에게 용사의 무술을 휘두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에케모가 그를 향해 입을 쩍-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은 광선.
콰아아아 – !!!
히틀러의 그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굵은 광선을 본 여명은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리며 용을 인벤토리에 회수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광선을 피했지만… 탁, 그가 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아야톨라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종말이시여-제 피를 바치나이다. 그러니 바라옵건대, 용사에게 축복을 내려 주소서.”
이 새끼—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미증유의 힘이 그의 몸으로 몰려들었다.
싸늘하고, 섬뜩한 힘은 한시적인 다섯 신의 축복과 달랐다.
그 힘은 마치 영약처럼, 그대로 피부를 뚫고 여명의 근육과 골수 속으로 파고들었다. 평범한 초인이었다면 기쁨에 소리칠 만큼 강대한 힘이었으나…
뚝-여명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가 만들어준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