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62)
을 위한 세계는 없다-462화(462/817)
EP.462 Sonnenaufgang (3)
* * *
***
이 목소리는, 설마?
여명이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두꺼운 투구를 쓴 기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꽃 한 송이가 새겨진 옛 제국 기사단의 투구.
“단장… 님…?”
여명이 입을 열자, 기사는 투구의 면갑을 올려 얼굴을 드러냈다. 제미니 시티 때와 다른 맑은 눈동자가 그를 마주했다.
“대답하거라.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이지?”
질문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불씨가 휘날렸다. 희망의 봉화처럼 밝게 빛나는 불씨. 여명은 멍하니 대답했다.
“아직… 모르, 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두메아 가주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결단코, 후회는 아닙니다.”
여명이 헐떡이는 숨을 붙잡으며 선언하자, 기사단장은 웃었다. 그는 불타는 메이스를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과연,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대답이로군.”
그리고 그사이, 뒤늦게 단장을 알아본 벨라디바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 기사단 갑옷? 이 양반, 혹시…?
기사단장은 데스나이트들의 면면을 살핀 후,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전우들, 지금은 바쁘니 사정은 나중에 듣겠소. 나는 먼저 갈 테니, 따라올 사람이 있다면 따라오시오!”
직후, 그의 발아래가 폭발했다. 흙먼지가 튀는 가벼운 충격을 디딤돌 삼은 기사단장은 두메아 가주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벨라디바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와, 씨, 제국기사단장, 저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었네? 벽에 똥칠할 나이 아니야?
다음 순간, 골목 뒤편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똥칠이 뭐요. 똥칠이. 곱게 늙었다고 하면 어디 덧납니까?”
-으응? 산초? 너도 살아 있었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벨라디바. 거기에 바라나 부단장님과 두하칸까지… 다들 다시 보니 반갑군요.”
여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단장과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은 산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여명의 모습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방패를 탁-바닥에 꽂으며 물었다.
“여명… 흠, 인사를 나눌 꼴은 아니군. 혹시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아뇨… 딱, 맞춰 오셨… 습니다.”
“흐, 도망가려는 기관사를 붙잡고 온 보람이 있구만.”
“….”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대화는 여기까지 하지. 가서 밀려오는 놈들을 처리하면 되겠나?”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초는 곧바로 방패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단장이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직전, 데스나이트들에게 말을 남겼다.
“면면을 보니 옛 전쟁이 생각나서 좋군요. 끝나고 오랜만에 술이나 같이 마십시다.”
산초는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여명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벨라디바에게 물었다.
“아직도… 가능성 없는, 일… 입니까?”
-새끼, 꼽주기는.
투덜거린 벨라디바는 조심스레 여명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피 묻은 도끼를 뽑아 들었다.
-부상자를 옮기는 일은 한 명으로도 충분하겠지? 난 먼저 간다.
그렇게 그녀를 시작으로, 데스나이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발소리. 긴장이 풀린 여명은 더는 정신의 끈을 붙잡고 있지 못했다.
아.
모든 감각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여명은 누군가 자신을 둘러업는 것을 느끼며 기절했다.
***
같은 시각, 두메아 가문의 저택 마당.
“…세티?”
군수품 상자를 옮기던 살로메는 세티를 불렀다.
함께 상자를 옮기고 있던 그녀가 마치 화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굳어버린 까닭이었다. 저쪽에 뭐가 있나?
“왜 그래?”
“….”
세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심 저편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군수품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뭐, 뭐해?”
“온다.”
“온다고? 뭐가?”
그녀는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상자를 뒤지더니, 이내 구형 수류탄과 소총, 대전차 로켓 등을 꺼내 무장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뭐야? 살로메가 눈을 껌뻑이자, 세티는 무기를 내밀며 말했다.
“너도 무장해.”
“나, 나는 총 못 쏘는데? 그냥 마법을….”
“지금은 마법 못 쓰니까 총 챙겨. 방아쇠는 당길 수 있잖아? 아, 그리고 혹시 수류탄은 던질 줄 알아?”
“아,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쉰 세티는 곧 그녀의 상자까지 뜯어버리고는, 낡은 샷건 한 정을 꺼냈다.
권총이라기엔 너무 크고, 소총이라기엔 너무 작은 총.
“래밍턴 MH750… 특수처리된 은탄도 있네. 이거면 너도 쓸 수 있을 거야. 미필인 여명도 쓰던 거니까.”
엉겁결에 총과 총알을 받아 든 살로메가 되물었다.
“여명이 이런 걸 썼어?”
“응, 나보다 약했을 때.”
“….”
그게 언젠데? 그녀가 황당한 시선으로 보건 말건, 무장을 마친 세티는 저택 외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 같이 가!”
살로메가 후다닥 그녀의 뒤를 쫓길 잠시.
전운이 감도는 외벽 위에 올라선 세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히라리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혼란에 젖은 묽은 밤하늘 아래, 도시는 혼돈으로 가득했다.
도망치는 피난민들, 날아다니며 무어라 외치는 마법사들, 문을 활짝 연 마탑, 그리고 번쩍이는 빛과 불씨들.
“헥, 헥….”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던 세티는 숨을 헐떡이는 살로메가 옆에 도착한 후에야 목표물을 발견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어둠’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골목을 비추던 불을 끄고, 달빛을 피해 다가오는 어둠.
저택과의 거리는 어림잡아 400m 내외. 세티는 망설이지 않고 대전차 로켓을 조준한 뒤, 그대로 발사했다.
푸슈웅 – ! 굉음과 함께 발사된 로켓은 피난민의 머리 위를 넘어 그대로 어둠을 향해 날아갔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외벽에 있던 살로메와 가솔들이 기겁했으나, 세티는 흔들림 없이 로켓이 날아간 방향을 노려봤다.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
소리친 건 세티가 아닌 외눈의 가솔이었다. 그는 세티가 로켓을 발사한 어둠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며 계속 소리쳤다., -당장 문 닫고! 피난민들에게 달리라고 소리쳐라! 닫히기 전까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받아!!
갑자기 왜 저러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살로메는 문뜩, 로켓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로켓이 불량품이라서? 아니, 누군가 날아가는 로켓을 붙잡았다는 뜻.
그리고 곧이어, 어둠 속에서 로켓을 쥔 누군가가 드러나며 그 깨달음을 증명했다.
“사비나….”
황금색 로브를 입은 여마법사. 그녀는 사뿐사뿐 하늘로 걸어 올라오더니, 손에 쥔 로켓을 바닥에 내던졌다.
쾅!
폭발 소리를 따라 주변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사비나는 긴 지팡이를 늘어 트리며 입을 열었다.
[주인공….] [나와 에케모는 충분히 보았다. 운명의 피해자인 네가 가해자가 되는 모습을.] [우리는 널 증오하는 동시에, 동정한다.] [그러니….] [끝내자.] [여기서 끝내자. 우리가 겪어온 고통, 또 우리가 겪을 모든 고통에 마침표를 찍자.]마력이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어둠 속에서 괴수들이 슬금슬금 걸어나왔다.
히라리아 도심으로 밀어닥치는 괴수들과 달리, 손과 발이 ‘효율적’으로 달린 괴수들.
세티는 녀석들을 보자마자 싸움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녀석들은 마치 군인처럼 오와 열을 지키며 걷고 있었으니까.
다른 가솔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긴장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가운데, 마탑주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지랄은 거기까지 해라. 사비나.] [토마시….] [백날 분위기 잡아봤자, 너희가 하려는 짓이 학살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 [그러니 아가리 그만 털고 당장 덤-!]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저택 요새 꼭대기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사비나를 향해 쏟아졌다. 번쩍!
살로메와 함께 세티가 고개를 들어보니, 현 두메아 가주가 손바닥만 한 완드를 겨누고 있었다.
“덤벼라! 이 악독한 년!”
[악독? 가문 때문에 제 딸도 팔아먹은 년이 감히….]지팡이를 휘둘러 불기둥을 쳐낸 사비나가 그대로 손을 뻗자, 그녀의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정예 괴수들이 일제히 요새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꺄아악!! 달려드는 괴수를 보며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외벽에 준비된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
-밀지 마!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차례를 지키십시오!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천박한 농노 놈들! 당장 비키지 못할까! 내가 누군지 아느냐?!
마탑 입구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먼저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시민들, 빨리 길을 내라며 호통치는 귀족, 그리고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려는 마법사들까지.
[시민 여러분, 세 줄로 서주십시오. 세 줄로 설 경우 가장 이상적인 속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도서관의 마법책들까지 나서서 질서를 유지하는 판이었는데…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비키십시오! 부상자입니다!
누군가 그 모든 혼란을 집어삼킬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놀란 마법사들과 시민들이 돌아보니, 인파 맨 뒤에서 창을 든 성기사가 피에 젖은 누군가를 업은 채 마탑을 향해 막무가내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봐! 차례를 지키-”
급한 시민 한 명이 그를 말리려 하자, 성기사가 먼저 소리쳤다.
-닥쳐라! 너희가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게 누구 덕분인 줄 알고! 우리는 지금도 목숨을 걸고 괴수를 막아내고 있다!
“….”
-만약, 내 동료가 먼저 마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라! 성녀님께 맹세코,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
결국, 카메라를 드는 기자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슬금슬금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명분도 명분이었지만, 성기사의 목소리가 마치 죽은 자의 그것처럼 오싹한 탓도 있었다.
아무튼, 성기사는 재빨리 마탑 입구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던 마법사들은 그를 환영하면서도 입구를 막아섰다.
-뭐냐?
“저, 성기사님? 부상자 분께선 성기사로도, 저희 히라리아 시민으로도 보이지 않는데… 죄송하지만 신원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신원? 상황이 위급한 게 보이지 않나? 이자의 신원은 내가 보증하겠다. 당장 마탑 의료실로 안내해!
“하지만….”
마법사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하늘에서 날아다니던 마법책이 말했다.
[파순, 그분의 이름은 파순입니다.]“…으음?”
[어제, 그릇과 함께 마탑 도서관에 찾아오신 손님입니다.]아, 그릇의 호위였나보군. 마법사들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끌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혼란할 때일수록 절차를… 아니, 빨리 들어가시죠. 안내 마법사가 의료실로 모실 겁니다.”
부랴부랴 변명을 내뱉던 마법사는 성기사가 눈을 부라리는 걸 보자마자 길을 터줬다.
성기사, 정확히는 성기사로 변장한 두하칸은 그대로 여명을 엎은 채 마탑 안으로 들어섰다.
지잉-마탑에 들어서기 무섭게 중력이 뒤바뀌었으나, 그는 익숙한 사람처럼 천장에 발을 딛고 뛰기 시작했다.
“의료실은 저쪽 입… 어? 잠깐, 어디 가십니까?!”
곧 그를 안내 마법사가 다가왔으나, 두하칸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수많은 마탑 통로 중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바깥의 난리 때문인지, 내려가는 길은 캄캄했다. 두하칸은 여명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보이지도 않는 길을 주파했다.
잠시 후, 두꺼운 철문을 열고 도서관에 들어선 그는 조심스레 창과 여명을 바닥에 내려놨다.
마지막으로 여명의 숨소리를 한 번 더 확인한 그는 도서관의 구석으로 향했다.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여명이 그를 불러 세웠다.
“두칸… 여기는… 왜…?”
두하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너를 치료하기 위해서다. 알겠지만, 의료실에서 백날 포션을 부어봤자 지금의 너를 치료할 순 없다.
“그게… 무슨…?”
-성녀께서 처음 내게 의뢰했을 때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그분께서는 미래를 본 거야.
“…?”
-성녀님의 연구일지, 찾았겠지?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하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조금만 기다려라. 성녀님의 편지를 찾아 오겠-그러나 이번에도 두하칸은 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어진 여명의 말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가… 가지고, 있….”
-….
여명이 힘겹게 인벤토리에서 찢어진 연구일지와 편지를 꺼내자, 두하칸의 얼굴 위로 놀라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찢어지긴 했지만… 중요한 건 재료 그 자체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곧바로 여명의 앞에 앉아 편지와 일지를 한곳에 모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숨을 몰아쉬는 여명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두하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당신께서 부탁하신 의뢰를 완수했나이다.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빌려 선언하오니, 때가 되었습니다.
그건 기도였다. 여명이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기도.
다음 순간, 편지와 연구일지에 깃들어있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신성도, 마법도 아닌 누군가 새겨둔 순수한 마나.
그 마나는 따스한 여성의 품처럼 여명을 감싸 안았고,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