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467화(467/817)
EP.467 막간 – 네가 심연을 볼 때, 심연 또한 너를
* * *
***
그와 만난 첫날 밤에는 눈이 내렸다. 춥고 배고픈 밤이었다.
물론, 그때 계절은 여름이었고 도시를 뒤덮은 눈은 멍청한 마법사들의 실패한 마법의 결과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내가 눈에 파묻혀 죽어가고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로브를 입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 살려….’
얼어붙은 내 혓바닥은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했기에, 나는 간절하게 그의 로브 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지팡이로 얼굴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꼬마야, 토마토 좋아하니?’
그때의 나는 토마토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으나, 어렴풋 지구에서 온 음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래? 난 싫어한다. 시큼해서.’
‘….’
그때의 나는 표정을 숨기는 법을 전혀 몰랐다. 그러니까,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지? 얼굴로 그를 바라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 상관없이, 그는 내 모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근데 븅신들이 나한테 뇌물이랍시고 토마토를 주지 뭐냐. 다들 탑에 처박혀 사니 세상을 모르는 게지. 감자나 들여와서 심으면 얼마나 좋을꼬.’
‘….’
‘뭐, 이런 이야기는 됐고. 다행히 너는 토마토를 좋아한다니, 가서 나 대신 토마토 좀 먹거라.’
심술 가득한 목소리에도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라는 꼬맹이 특유의 확신 때문이었으나…
그날 이후 나는 토마토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가 정말로 30개나 넘는 토마토를 전부 내게 먹인 탓이었-
***
대체 어떻게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냐? 너처럼 어린놈이 이렇게나 깊은-
***
‘캬, 이렇게 재능 없기도 힘든데. 막내야, 너 절대 어디 가서 내기 당구 치지 마라.’
일이 끝난 청소부들이 모인 당구장에서, 덕배 아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당구채를 잡은 내가 애꿎은 볼을 긁적이는 가운데, 제임스 형이 끼어들었다.
‘초짜일 때는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처음 한 달은 공도 제대로 못 쳤는걸요.’
제임스 형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막내 너도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잘 치게 될 거다. 내가 보증하마.’
그러자 이번에는 춘식이 형이 끼어들었다.
‘쇠똥아, 너무 주눅 들 거 없다. 이게 다 이 형님 때문이니까.’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초인 영화의 배우처럼 당구채를 휘휘 흔들며 덧붙였다.
‘이 형님께서 불과 반년 만에 나머지 형님들을 뛰어넘어버렸으니… 하, 내가 눈을 너무 높인 탓에 네가 고생하는구나.’
그 말을 들은 두 형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내가 따라 웃자 춘식이 형이 당구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뭐, 당구 좀 못 치면 어떠냐? 당구 잘 쳐봐야 여자들이 좋아하지도 않아. 여기 모인 사람 다 솔로인 거 보면 모르냐?’
‘….’
‘그에 비해 막내 너는, 응? 얼굴이 반듯하잖냐. 눈도 황금색이고… 당구보다 그게 훨씬 좋은 거야. 알았지? 넌 그 얼굴 팔아먹고 살면 돼.’
‘…얼굴을 팔아요? 어떻게요?’
설마 그런 질문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춘식이 형이 피식 웃었다.
‘너 좋다는 여자 데려다가 살림 차리면 그게… 아, 근데, 덕배 형님보다 먼저 결혼하지는 마라. 저 형님 선 자리도 안 들어와서 저러고 있는데, 네가 덜컥 먼저 결혼하면 진짜-’
‘야!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당구대 반대편에 있던 덕배 아재는 그대로 춘식이 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춘식이 형은 낄낄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제임스 형과 나는 쫓고 쫓기는 둘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조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의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고대 전사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생각이었으나,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사회의 궂은일을 맡아 처리하는 남자들이었고, 우정과 신뢰, 그리고 형제애로 묶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전사들보다 나았다. 우리 중 누구도 피를 흘리며 죽을 일 없다는 점이 특히나.
그래, 쇠똥구리는 이 풍경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아마 큰 변화라고 해 봤자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자식 자랑하며 언성을 높이는 정도가 끝이리라.
…그렇게 믿었다.
용사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박한 믿음이었으나, 그의 믿음은…
***
그만! 그만해!
***
기쁨이란 단어로는 당시의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뿌듯함, 자부심, 행복, 혹은 그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온갖 단어들을 가져와도 모자랐다.
조금 천박한 단어까지 끌고 온다면, 처음 여자의 알몸을 봤을 때보다도 행복했다.
‘얼굴 펴라.’
그가 내 등을 때리며 말했다. 새로 산 로브 자락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붙었다.
‘마법사는 등신처럼 웃으면 안 된다.’
‘…제가 언제 등신처럼 웃었다고 그러세요.’
그가 혀를 차며 덧붙였다.
‘조금 전에 그렇게 웃었다. 내가 저번에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마법사의 제1법칙. 언제나 근엄한 척 하라.’
‘….’
투박한 말속에 담긴 진솔한 애정을 느낀 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기도 전에, 무대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케모!
그러자 그는 또다시 내 등을 밀며 말했다.
‘이제야 네 차례인가 보구나. 나가봐라. 다시 말하지만, 근엄한 표정 잊지 말고.’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억지로 미소를 지우고 입술과 미간에 가득 힘을 준 채로 무대에 올랐다.
농노와 마법사들의 무심한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지팡이를 들고 그들을 내려다봤다.
시기, 질투, 비웃음, 부러움, 그리고 분노.
마탑주가 주워 온 거지새끼가 정식 마법사가 되는 순간에 어울리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이 순간의 경이로움에 취한 채로 준비한 연설문을 꺼냈다.
2년, 그래, 무려 2년 동안 공들여 쓴 연설문이었다. 어쩌면 그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연설문.
나는 힘껏 숨을 들이쉰 후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지구의 어떤 종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그렇게 뻔한 도덕과 정치질, 그 밖에 지루하고 따분한 내용으로 가득 찬 연설문-이라고 그가 평했다-을 읊기를 잠시.
‘저, 저 근본 없는 놈이!’
‘지금 뭐라고 한 거요?’
‘돌았군, 돌았어.’
관객석에서 야유가 튀어나왔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농노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증해야 한다’ 는 내용을 읽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연설문을 읽었다.
몹시 놀란 채로, 손을 벌벌 떨면서, 마법사들의 분노가 아니라, 농노들의 희망에 놀란 채로 읽었다.
이 연설문이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모른 채로, 계속.
***
그만! 이건 내 정신이다! 내 기억이야!
***
‘해가 뜨는구나.’
쌀쌀한 새벽 청소가 끝나갈 때쯤, 작업반장님이 말했다.
그분의 말대로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인천 바다 저편에서부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하늘이었으나, 이어진 반장님의 말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되겠구나. 막내야, 너도 슬슬 학교에 가지 않겠느냐?’
‘…네?’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이자, 반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대학을 나오면 더 좋고.’
‘….’
학교라니. 나는 새벽 청소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갈 때 마주치던 학생들을 떠올리며 거북함을 느꼈다.
‘…굳이 학교 같은 거 안 다녀도 전 이미 충분히 똑똑하지 않나요?’
나는 평소 같지 않게 반장님 말에 토를 달았다. 반장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셨다.
‘춘식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가지고 있다.’
‘….’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느냐? 널 직접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은 널 춘식이보다 무식한 놈으로 볼 거란 뜻이다.’
내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춘식이 형과 반장님을 번갈아 보자, 춘식이 형이 쪼르르 다가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쨔사, 형이 돈 때문에 대학을 못 가서 그렇지, 너보단 훨씬 똑똑하거든?’
‘미국 초대 대통령은?’
‘…링컨?’
‘풉.’
딱. 뒤통수 한 대를 더 맞은 나를 보며 형들이 동시에 웃는 가운데, 반장님이 말씀하셨다.
‘왜, 학교는 영 아니더냐?’
‘예, 동갑하고는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청소 업무 시간도 안 맞고….’
내가 애써 핑계를 둘러대자, 작업반장님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거칠지만 따스한 손, 그 손에는-
***
네 기억을 보여달라고 한 적 없다. 그만, 제발. 그만!
***
저벅.
나는 조용히 단상에 올랐다. 내 뒤로 토마시와 사비나가 호위하듯 자세를 잡았다.
곧, 소리 없는 환호가 공간을 집어삼켰다.
단상 아래 모인 수많은 농노들과 징집병들은 입 한 번 열지 않고 뜨거운 눈빛으로 우리를 반겼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다. 누군가는 대장장이였고, 누군가는 식료품 가게 점원이었으며, 누군가는 거지였다.
지저분한 수염을 가진 남자, 이제 막 사춘기를 벗어난 꼬맹이, 헐거운 앞치마를 맨 여자,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는 노인까지.
그 군상들이 가진 공통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도시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으나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자들.
마법사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지구의 자본에 밀려 빈 금고를 착취로 채우던 마법사들이.
나는 숨소리조차 조심했다. 나 또한 마법사이기에, 그들의 눈빛에서 작은 두려움과 의심을 읽을 수 있었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우리는, 인내해 왔습니다.’
침묵이 호응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토마시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참았습니다. 참고 또 참았습니다.’
누군가 고개를 끄덕인다. 톱밥 섞인 밀가루를 받은 징집병이었다.
‘더 나은 미래가 올 거라 믿었기에 그리할 수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미래의 내가, 혹은 우리의 자식들이 더 나아질 거라 믿었기에! 우리는 참았습니다!’
목소리가 커진다. 침묵은 더 무거워진다.
‘하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인내를 곡해하다 못해 비웃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받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진 것조차 빼앗겼습니다!’
쾅! 나는 연단을 내려쳤다. 지구의 독재자가 보여준 연설의 기법이었다.
‘어제는 급료를 빼앗겼습니다. 오늘은 에어컨을 빼앗겼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이 땅에 깃발을 꽂고,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우리에게 존엄은 없습니다. 자, 이제 그다음에는 무엇이겠습니까?’
가슴을 두들기고, 모인 청중을 하나하나 훑었다. 성공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존엄을 잃은 자에게 빼앗길 건 미래뿐입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 자식들의 미래!’
청중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뜨겁다 못해 가슴이 타버릴 것 같이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는 사비나에게 손짓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되찾읍시다.’
덜컹, 사비나가 무대 뒤에서 염동력으로 끌어온 나무 상자가 단상 앞에 놓였다. 나는 그 상자 뚜껑을 열며 소리쳤다.
‘우리의 존엄을 되찾읍시다.’
상자 안에는 지구산 무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친절한 ‘미국인 친구’가 제공해준 무기였다.
‘우리의 미래를 되찾읍시다.’
나는 상자에서 샷건을 꺼낸 뒤 처음에 눈을 마주쳤던 징집병을 향해 집어 던졌다. 총을 받은 그는 손을 떨면서도 머리 위로 높게 샷건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그것을 봤다. 귀족들이 무서워 벌벌 떤다는 바로 그 무기를, 그들의 수 년 간 모은 봉급으로도 살 수 없는 지구의 무기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목 놓아 소리쳤다.
‘이제, 우리의 혁명을 시작합시다!’
***
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치는 거냐? 당장 날 잡아먹지 않고?
이거 제가 한 거 아닌데요?
뭐?
***
‘마법을 못 쓰는 귀족 529명 사망. 마법사가 192명, 민간인 삼천 명, 그 외에 수많은 재산피해.’
내가 결과를 말해주기도 전에, 아니, 내가 결과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는 도시의 피해를 읊었다.
‘스승님, 그게 무슨…?’
내가 애써 모른 척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후대에 이 사건은 에어컨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이유와 이름이 우스꽝스러울수록 마탑의 권위는 떨어질 테니까.’
‘….’
그는 평소처럼 심술궂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잘했다. 제자야. 네 바람대로 일반인과 마법사가 평등해졌구나. 모두 망하긴 했지만, 이것도 평등이라면 평등이지.’
‘모두 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제국 내부의 혁명 세력과 함께…’
‘제국 내부의 혁명 세력? 그 스탈린의 노예들? 하, 네 미국인 친구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으냐?’
‘….’
‘아마 그 친구들은 벌써 돈과 안전을 대가로 마법서들을 사들이고 있을 게다. 이걸로 지구에 온갖 마법이 퍼질 테지. 어쩌면 프랑스에게 팔려 변경백 전쟁에 쓰일지도 모르겠구나.’
‘스승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제가 전부 막을 수 있…!’
그때, 그의 스승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
‘탓하지 않겠다. 네가 주범이란 사실도 알리지 않으마. 그러니, 이제 나가보거라.’
그는 손을 흔들었고, 그 말뜻을 오해한 나는 방을 떠났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그의 말대로 흘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
그 과정에서 카레닌을 만났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가 말해줬습니다. 당신이 돈을 벌고, 새로운 마법들을 개발하며 마탑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
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
나는 조용히 그의 책장을 정리했다.
낡은 책상은 현재 주인의 상태를 말해주듯 뽀얀 먼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스승님….’
성녀와 퀴니 코완이 차례차례 세상을 뜬 뒤, 그는 거의 산송장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사비나를 다음 대 마탑주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
사비나는 질색했지만,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조차 그가 마탑주 자리에서 내려와서 요양하길 바라고 있는 판이니, 오래가지는 못 하리라.
만약 가능하다면, 그가 변경백령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그 순간, 나는 책장 사이에서 그가 꽁꽁 숨겨 놓은 뭔가를 찾아냈다.
새까맣게 타버린 편지지.
왜 이런 걸 숨겨놓았나 싶어 편지지를 둘러보자,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에케모에게.
설마 그가 자신에게 쓴 편지인 걸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뜯었다.
그러자 분명 새까맣게 타 있던 편지지가 멀쩡히 재생되더니, 숨겨져 있던 내용을 드러냈다.
-실패한 에케모가, 다음 에케모에게.
그래, 그건 그가 쓴 편지가 아니었다. 내가… 정확히는 마왕이 된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보았다.
무수한 시간과 무수한 실패, 그리고… 스승을 살해하는 무수한 자신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