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69)
을 위한 세계는 없다-469화(469/817)
EP.469 아타카attacca (2)
* * *
***
시간을 돌려, 두메아 저택.
“약해졌구나. 토마시.”
두꺼운 콘크리트 외벽 위에 사뿐히 내려선 사비나는 음울한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현 두메아 가주와 토마시.
그녀와 달리 너덜너덜한 두 사람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드문드문 타버린 옷과 그 아래 익어 버린 피부는 덤이었다.
그럼에도, 토마시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네가 너무 강해진 거지. 사비나,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어디 괴수의 간이라도 이식한 건가?”
“아니, 나는 여전히 나야. 단지 네가 안주하는 동안, 나는 더 강해졌을 뿐.”
토마시는 피식 웃었다.
“안주했다니, 사비나, 내가 개발한 마법들 못 봤어? 마법만 수십 개에 수식은 백 개도 넘어. 마법사들이 널 쫓아내고 나를 탑주로 세운 이유가 있다니까?”
“….”
“미래를 위한 가르침을 남겨 주는 것. 그게 늙은이들의 일이야. 물론 싸움은 재밌지만… 미래를 바꾸는 건 애들한테 맡겨 놓자고. 어때?”
“아니, 미래는 없어.”
사비나가 서서히 지팡이를 들었다. 외벽 아래에서 가솔들의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뿐이었다.
그 발소리는 이 상황을 뒤집기에는 너무 멀고, 너무 적었다.
그녀는 단언했다.
“모든 건 여기서 끝이야. 에케모와 내가, 끝내겠어.”
쓰러지려는 두메아 가주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토마시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아니, 사비나.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운명의 방식대로 운명과 싸우는 이상,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가 혁명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외벽 아래에서 기관총 소리와 괴수의 비명이 뒤섞인 끔찍한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리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미국이 우리를 속이고, 운명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 알잖아.”
“…닥쳐.”
“사비나….”
“혁명의 순수함이니, 최선을 다 했느니 같은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마. 너, 나, 에케모 모두… 책임이 있어. 실패를 바로잡을 책임이.”
토마시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지팡이를 들고, 최후의 전격 마법을 펼쳤다.
파지직-! 뱀같은 전격 수십 줄기가 그의 몸 주변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시대의 잘못을 고치려다 더 큰 실패를 저질렀지… 부디, 이번에는 네 말이 옳기를.”
“옳을 거야.”
그렇게 사비나의 지팡이 끝에 칼날처럼 날이 선 불길이 떠오른 순간.
또르르—
뭔가가 그녀의 발치로 굴러왔다.
“수류-”
-탄? 그녀의 말보다 한발 앞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콰앙!
폭발이 그녀의 몸을 후려쳤으나 사비나는 재빨리 보호막을 펼쳐 막아 냈다. 뭐지? 주변에 마나 반응은 없었는데?
그녀는 적을 찾기 위해 마나를 펼쳤다. 넓게 퍼진 마나가 말하길… 머리 위?
고개를 들자마자, 터엉! 샷건이 불을 뿜었다. 쇠구슬들이 보호막에 충돌하며 타다닥 빗소리를 냈다.
탁, 곧이어 샷건을 발사한 녀석이 사비나와 토마시 사이에 착지했다.
앙다문 입, 덜덜 떨리는 붉은 눈동자. 산탄총과 함께 착지한 건 살로메였다.
“살로메, 여기… 오면… 안, 쿨럭!”
두메아 가주는 갑자기 나타난 손녀를 보고 지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나이 든 몸은 그녀의 의지를 배신했다.
“괜찮아요. 할머니.”
살로메는 철컥, 산탄총을 재장전하며 덧붙였다.
“제가 지켜드릴게요.”
사비나는 그런 살로메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눈물 나는 가족애로군. 하지만 몸에 마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인 걸 보면 방금 비행 마법이 끝인 거 같은데… 들고 있는 건 래밍턴 MH750이라? 고작 그걸로 대마법사를 상대하겠다고?”
“마법사용 총인데, 못할 것도 없죠.”
“마법사용 총…? 하.”
사비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토마시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얘야, 그 총은 말이다. 미국이 혁명을 선동하면서 떠넘긴 무기란다. 어느 정도의 위력이 돼야 마법사들이 급하게 펼친 보호막 뚫을 수 있을까 실험하기 위해 혁명가들에게 준… 그런 무기지.”
“….”
“총을 모르는 마법사들을 상대로 기습할 때는 쓸 만했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군용 소총보다도 보호막을 못 뚫었지. 그걸 모른 시민들은 그 총을 들고 마탑으로 향했고… 쓸려 나갔단다. 알겠니? 네가 쥔 그 총은 진짜 마법사에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기껏 해야 네크로맨서 따위에게나 먹히는 싸구려야.”
왜 갑자기 설명충 짓이지. 살로메는 놀라면서도 굳이 사비나의 입을 막지 않았다.
아래에서 지원이 올라오는 시간을 끌려고? 아니, 그녀는 떨어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됐다.”
이윽고, 살로메는 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뭐?”
사비나가 그녀를 고개를 든 순간. 위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그건 방금 전까지 입구에서 괴수들을 막고 있던 세티였다.
“…주인공.”
사비나의 목소리와 동시에, 파지직!!! 벼락을 머금을 망치가 사비나의 머리를 노렸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두터운 보호막을 펼쳤다. 주인공이라 해도 바로 조금 전 괴수들과 싸우며 체력을 낭비하지 않았던가. 못 막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번쩍!
도시 저편에서, 여명이 떠올랐다.
“뭐?”
사비나는 마탑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빛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현 두메아 가주와 토마시, 심지어 외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가솔들과 괴수들마저도 그랬다.
하지만 단 두 사람.
떨어지는 세티와 살로메는 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여명의 빛 아래에서 사비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충돌.
!!!!!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보호막 위로 홍단벽력의 망치가 충돌하며 마나가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음에도, 보호막을 깨기엔 부족했다. 세티가 왼팔만으로 망치를 휘두른 까닭이었다.
그녀의 오른팔이 망치를 쥘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쳐 있는 까닭이었다. 정예 괴수와 싸우며 얻은 상처였다.
‘왼손만으로는 부족해.’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세티는 이를 악문 채 공중에서 허리를 돌렸다.
곧 그녀의 발에 한 번 더 마나가 고이고, 비각술의 진의가 담겼다. 진각.
마하간과의 수련을 통해 익힌 그녀의 비기.
쩌-엉!!!!
벼락을 품은 그녀의 발이 그대로 망치를 후려쳤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지고, 사비나의 보호막에 쩌저적-금이 갔다.
직후,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박살 났다. 사비나는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 공격이 세티의 전력임을, 그러니까 다음 공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쥐어 짠 일격임을 눈치챘으니까.
“안타깝군.”
사비나는 손을 뻗어 세티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태워 버리려다가, 문뜩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세티의 입가에 미소가 남아있다는 것.
그제야, 그녀는 여명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철컥.
하지만 이미 살로메는 코앞에서 그녀에게 샷건을 겨누고 있었다. 실패한 혁명을 상징하는 총의 총구가 빛을 등진 그녀의 복부에 닿았다.
“Ade.”
작별 인사를 뜻하는 독일어를 끝으로, 샷건이 불을 뿜었다.
***
-커헉.
미그니움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 에케모는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기침 소리를 따라 그의 앞섬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피를 토했을까?
정신을 차린 그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여명을, 그리고 남자를 삼킨 바닥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방금… 그건, 대체…?”
미그니움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나, 그는 여전히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물었다.
“…너는, 용사가 아니었나? 왜 저런 걸… 마음속에 품고 있지? 무슨 생각으로 주인공 곁에 있는 거냐?”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에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질문을 쏟아 내는 그가 우스워서? 아니, 여명 또한 미그니움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는 최대한 간략하게 대답했다.
“제 업입니다.”
“업?”
“봉인과 선택의 대가… 뭐 그런 거죠.”
“….”
너무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탓일까,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인 눈빛이 여명의 얼굴을 찔렀다.
그리고 잠시 후, 에케모는 한 번 더 우웩-피를 토한 뒤 말했다.
“이제… 나를 어쩔 셈이냐.”
여명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대답했다.
“뭘 어쩌긴 어쩝니까. 죗값을 치러야죠.”
“나의 죄….”
“당신은 마왕의 심장과 괴수를 만들고, 불법 차원문을 열어 무고한 히라이아의 시민들을, 그리고 이 시간대의 모든 이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로원의 타락을 선동했고, 비인륜적인 실험을 저질러 그릇과 여러 가문들의 고통을 조장했으며, 수많은 이들의 존엄을 해쳤습니다.”
그는 무슨 법관이라도 된 것처럼 에케모의 죄목을 읊었다. 딱 하나만 빼고.
“…스승을 살해한 죄는 어딨지?”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건… 당사자가 딱히 죄라고 생각 안 하셔서 뺐습니다..”
“…뭐?”
“마하간은 당신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소립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조롱당했다고 생각한 걸까? 에케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화를 내기 전에,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마하간이 전하는 말을 적어놓은 쪽지.
여명은 큼큼, 짧게 헛기침한 뒤 말했다.
“죽기엔 너무 멍청한 제자에게, 마하간의 전언입니다.”
“….”
“널 이해한단다. 고생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종이를 내려놨다. 그리고 아직도 의심을 지우지 않은 에케모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옳았다. 그래, 내가 틀렸더구나.”
“….”
“이거 진짜 마하간께서 전한 말이니까, 의심하지-”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끊은 에케모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승님의 영혼을… 어디서 뵌 거냐?”
영혼이라. 그건 미라가 된 마하간의 머리가 아니라, 다른 마하간의 영혼이 있다고 확신한 목소리였다.
여명이 대답했다.
“아카데미의 한 마법책에 영혼을 남겨두셨습니다. 지금은 지박령으로 지내고 계시죠.”
“아카데미… 하, 퀴니 코완… 끝끝내 그 여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셨나.”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여명은 쪽지를 고이 접으며 물었다.
“음,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만, 당신이 옳았다는 건 정확히 무슨 소립니까? 저도 그쪽 과거를 꽤 본 거 같은데…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운명에 관한 문답이다.”
“운명?”
에케모는 조금 전보다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스승님이 나보다 먼저 운명을 봤다는 사실을 안 뒤로… 나는 함께 운명을 바꾸자고 설득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던 기나긴 시간 동안, 계속.”
“….”
“하지만 스승님은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발악하면 발악할 수록 운명의 노예가 될 뿐이라고 하셨지… 그 좌절, 그 절망…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그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 들리지 않는 뒷말을 읽은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케모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옳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분께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전대 성녀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말한 에케모는 움찔, 놀란 표정으로 여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지금 이게 네 진짜 얼굴이냐? 아니면 차원문을 습격할 때의 금색 단발이 네 진짜 얼굴이냐?”
“…지금 이쪽이 진짜 제 얼굴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에케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차원문 너머 눈들이 속삭인 단어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성녀의 아들….”
“….”
“그게 무슨 비유가 아니라, 담백한 사실 고백이었단 말인가? 아, 그렇군. 스승님은… 죽은 뒤에도 마법사셨구나. 운명이 바뀐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하, 에케모는 웃었다. 입술 사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두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음에도, 그는 웃었다.
그리고 참지 못한 여명이 걸레를 집어와 그의 앞을 슥슥 닦기 시작할 때쯤.
에케모는 거의 기침이나 다름없는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마지막 깨달음에 감사한다… 그러니, 자, 이제 죽여라.”
“…?”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내 생각이 옳았을지언정… 나는 오랫동안 운명의 노예였다. 내가 저지른 죄, 잘못… 죽음으로서 사죄하는 게 마땅해.”
걸레를 쥔 여명은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에케모는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내게 붙어 있던 과거가 날 속였더라도,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은 내가 스스로 정하고, 직접 행동에 옮긴 일이다. 그러니 죽여라. 운명을 바꾼 자에게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당장 목을 잘라 달라는 듯, 목을 길게 내미는 모습.
그걸 본 여명은 그의 피와 점액질로 젖은 걸레를 주욱-짠 다음 대답했다.
“저는 당신의 사과를 받을 생각 없습니다. 그런고로, 심판도 안 할 겁니다.”
“…뭐? 어째서?”
“저는 당신을 이겼을 뿐이지, 피해자가 아니잖습니까.”
“….”
“그러니 주접 그만 떨고 일어나세요. 당신이 진짜 무릎 꿇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