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70)
을 위한 세계는 없다-470화(470/817)
EP.470 아타카attacca (3)
* * *
***
졌다.
저 멀리, 괴수를 토해내던 차원문이 닫히는 걸 본 아야톨라는 확신했다.
버려진 신들은 마침표가 아닌, 이 추악한 운명을 더 이어가기로 했다는 걸.
왜 이렇게 됐지? 저쪽에 주인공이 있어서? 혹은 그게 운명이라서?
둘 다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나치 잔당과 원로원, 마왕의 심장, 마탑의 마나, 차원문, 심지어 에케모 본인까지.
하나하나가 히라리아 인구를 통째로 날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안배였건만, 모조리 파훼 되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전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주인공이 튀어나왔다 해도, 모든 걸 이렇듯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즉, 이건…
‘누군가 우리보다 한발 앞서 히라리아에 그물을 펼쳐놨다…?’
감히 누가? 라는 질문에 앞서, 몇몇 이름들이 떠올랐다. 예지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극소수인 탓에, 떠오르는 이름은 많지 않았다.
펜타곤의 예언자, 옛 지배자들의 별내장, 성국의 성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가능성 있었다.
햇볕처럼 따스한 빛을 뿜어냈다는 점에서 예언자를, 상대가 카할 마그두의 뼈를 꺼냈다는 사실에서 별내장을, 그리고…
‘…성녀의 아들.’
버려진 자들이 남긴 말에서 성녀를.
그건 무슨 비유가 틀림없었다. 전대 성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현대 성녀는 아직도 처녀였으니까.
혹시 현대 성녀가 개입한 걸까?
그녀를 떠올린 진실을 흘리는 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현대의 성녀가 벌인 일이라기엔 너무나 복잡했으므로.
그래, 진짜 그녀의 계획이었다면 조금 더 단순하고 즉흥적이었을 것이다. 아마 본인이 직접 튀어나와 예측할 수 없는 짓거리를 저질렀겠지.
따져보자면, 이건 오히려 전대 성녀의 계획과 비슷했다. 집요하고, 꼼꼼한…
‘…전대 성녀라.’
탁, 싸움터를 피해 히라리아 도심으로 착지한 아야톨라는 문뜩, 전대 성녀의 연구를 떠올렸다.
전대 용사 파티의 마법사인 마하간이 남긴 자료라 챙겨둔 것이었는데… 왜 하필 지금 그게 떠오르는 것일까.
머릿속이 간질간질, 무언가 이어질 듯 말 듯 했다.
‘….’
몸을 붕괴시켰음에도 마탑의 마나를 빨아먹고, 신성까지 두르고 돌아온 정체불명의 적.
녀석은 분명 용사의 무술을 사용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금빛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정식으로 계승한 건 아니었지만, 위력 자체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성녀의 아들… 꼭 자궁으로 낳아야만 아들인 건 아니지.’
어쩌면, 철혈의 아이들처럼 유전자만 떼다가 만든 인공 용사일지도?
아쉽게도 아야톨라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숨어든 히라리아의 어둠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으므로.
“진실을 흘리는 자.”
아야톨라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웃었다.
“…처형관 발막, 왜 여기 계십니까? 두메아 가문 저택은 어쩌고?”
질문의 대답은 발막이 아닌 그의 뒤통수에서 돌아왔다.
“내가 불렀다. 우리는 무언가를 지키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죽이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그를 설득했지.”
아야톨라가 고개를 돌려보니, 녹색 망토를 두른 거한이 골목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이야, 녹색 처형관까지?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두 분께서 절 쫓으시다니.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네요.”
두 처형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앞뒤로 그를 포위한 채 거리를 좁힐 뿐.
“쯧.”
짧게 혀를 찬 아야톨라는 곧바로 골목 위로 뛰어올랐다. 파지직!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전격이 꽂혔다.
“아쉽지만 두 분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럼 세 명은 어떻지?”
“…?”
골목 위로 떠 오른 아야톨라는, 무식한 크기의 권총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붉은 머리의 아줌마와 마주했다.
“적색 처형관…?”
어쩐지 일진이 사납더라니, 진실을 흘리는 자가 손을 쥐어 ‘천벌’을 발동하는 순간.
터엉 – !
처형관 셋이 동시에 그를 노렸다.
***
“커흑.”
심상에서 깨어난 에케모는 고통스러운 숨을 들이켰다. 폐를 채우는 차가운 히라리아의 밤공기를 따라 눈을 깜빡이길 잠시.
그는 볼 수 있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울 듯 일렁거리는 햇빛과 그 사이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는 불씨들을.
이상하게도, 그 광경을 본 에케모는 자신을 막아서던 데스나이트들의 말을 떠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날이라고 했던가.
과연 그랬다. 이런 하늘 아래에서 죽을 수 있다면,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놔도 괜찮을 것 같….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요.”
아쉽게도,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친 손바닥이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까닭이었다.
쩌적-끈적한 점액질과 동화되어 있던 몸이 강제로 분리되자, 몸의 힘이 쭉 빠졌다.
“커흑.”
에케모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점액질 더미 위에 무릎 꿇자, 그를 일으킨 여명이 한숨과 함께 그를 어깨에 둘러멨다.
“조, 조금 살살….”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에케모가 신음했으나, 여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훌쩍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의 신성 아래 비친 히라리아 서부의 전경은… 빈말로도 아름답지 못했다. 괴수의 시체와 무너진 건물이 뒤섞여 굴러다니는 모습은 흡사 지옥을 보는 듯했다.
“이제야 죄책감이 좀 느껴지십니까?”
여명의 한마디가 에케모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무슨 대답을 했어도 여명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정신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쏠려 있었으니까.
콰아아아앙 –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화산쇄설의 폭발음.
여명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를 막아서는 괴수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려온 곳에 도착한 여명을 맞이한 건 너덜너덜해진 두 기사였다.
“오, 왔는가.”
시체 위에 앉아 있던 단장은 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큰 놈은 어떻게, 잘 해결하셨는가?”
여명은 대답 대신 어깨에 걸린 에케모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패를 베개 삼아 바닥에 누워있던 산초가 말했다.
“그놈이 사람이었어? 이거 참, 우리 설마 마왕하고 싸운 건가?”
“비슷하죠.”
“이야,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군.”
산초는 뭐가 그리 웃긴 지 킥킥 웃었다. 매가리가 없지만, 뿌듯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아무튼, 여명은 두 기사에게 움직이실 수 있냐고 물었다.
두 사람이 ‘죽을 정도는 아니다’ 라고 대답한 직후, 여명은 참아온 질문을 꺼냈다.
“데스나이트 어르신들은…?”
“마탑 주변으로 후퇴했네. 미국인 친구가 고생 좀 했지.”
단장의 대답을 들은 여명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탑의 마법사들이 데스나이트의 정체를 눈치채면 어쩌지-라는 고민이 뒤늦게 따라왔으나, 그냥 가볍게 무시했다.
당장 자신은 마탑의 마나를 빨아먹은 걸로도 모자라 구멍까지 내지 않았나. 데스나이트쯤이야, 놀랄 일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두 기사에게 물었다.
“데스나이트 어르신들을 챙기고 두메아 가문의 저택으로 갈 생각입니다. 같이 가시죠.”
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네. 우리는 주변에 남은 괴수가 더 있나 수색하고 가겠네.”
“….”
가장 늦게 전장을 떠나는 모습.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여명은 설득 대신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 산초와 단장님에게 건넸다.
“그럼, 나중에 보세.”
호쾌하게 딸기 맛 물약을 들이켠 단장의 말을 마지막으로, 여명은 다시 마탑을 향해 날아올랐다.
“…멋진 사람들이군.”
에케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두 기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명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예, 멋진 분들이죠.”
“저 사람들 인생에 실패 같은 건 없었겠지. 나와 다르게….”
“그건 아닙니다.”
근현대사 속 제국 기사단의 역사는 실패로 가득했다. 그들은 전우를 돕지 못했고, 제국을 돕지 못했고, 황제에게 버려졌다. 단장과 산초는 그 계속된 실패의 당사자이자 증인들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케모가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실패를 극복했나?”
“….”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탑 주변 건물 옥상에서 데스나이트들의 마나를 탐지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실패를 극복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사도를 위해 산다는 점이겠죠.”
“….”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에케모는 입을 다문 채 고민에 빠져들었고, 여명은 너덜너덜해진 다섯 데스나이트 앞에 착지했다.
“모두 괜찮으세요?”
그는 안부부터 물었다. 언제 마탑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두하칸을 빼면 모두 도굴된 시체처럼 보였으니까.
-우리야 괜찮지. 이미 뒤진 것들인데.
벨라디바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데스나이트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여명은 억지로 웃었다.
“…일단, 두메아 가주님 빼고 전부 인벤토리에 회수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러자 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회수해주게.
“하지만, 따님을 뵈야….”
-이딴 꼴을 딸아이에게 보이느니, 그냥 혀 깨물고 죽겠네.
가주의 말대로, 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복부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나 있고, 다리가 몽땅 잘렸으며, 팔도 한 짝밖에 남지 않은 모습.
확실히 딸에게 보여주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여명이 그대로 인벤토리에 데스나이트들을 회수하려는데….
마지막으로 벨라디바가 한 소리 했다.
-딸아이는 핑계고. 유언 남기고 산 게 쪽팔려서 그래.
-거, 제발 닥치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날이라 그런가? 입이 막 근질근질하…
-아, 좀!
***
두메아 저택은 고요하게 소란스러웠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요새 안을 채우고 있는 건 부상자의 신음, 눈치 없는 아이의 울음소리뿐.
이게 다 외벽 바깥에 남아있는 정예 괴수들 탓이었다.
조금 전에 외벽으로 달려들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기관총 사거리 바깥으로 물러나 조용히 저택을 노려보는 모습.
그 모습이 어찌나 공포스러운지, 기관총을 잡은 가솔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남들과 상관없이 여유로운 사람도 있었다.
외벽 위, 아래를 내려다보며 보급용 음료수를 홀짝이는 세티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배고프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살로메는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넌 긴장도 안 돼?”
“이겼는데 긴장은 무슨 긴장?”
“….”
“저 괴수들은 명령을 내려줄 사람이 없어서 저러고 있는 거야. 어차피 달려들 일 없을걸.”
살로메는 대체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묻지 않았다. 당장 차원문이 닫힌 것도 그렇고… 자신도 용사가 이 싸움에서 승리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그 빛을 보고도 패배를 생각할 수 있겠나.
거기까지 생각한 살로메는 후-한숨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고 괴수가 사라진 건 아니라서 그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안녕, 내 사랑스러운 연인이여.
안녕, 안녕, 안녕.
헤어져야, 헤어져야 해.
그녀가 허밍과 함께 잠시 흥얼거리자, 세티 옆에 누워 있던 토마시가 물었다.
“흠, 듣기 좋은 노래로구만. 무슨 노래인가?”
“아, 이거요? 이건 말이죠-”
아쉽게도 그녀는 설명을 끝내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누군가 그녀의 뒤통수를 찰싹, 때린 탓이었다.
“누, 누구야?!”
고개를 돌려보니, 웬 남자를 둘러멘 여명이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명?! 이겨서 돌아올 줄 알았어!”
살로메가 기쁨으로 소리쳤으나, 여명은 차갑게 말했다.
“지크 하일 빅토리아… 이게 어디서 나치 군가를 부르고 있어? 어? 그러다 콧수염도 붙이겠다?”
“으, 응?”
이게 나치 군가였어? 난 몰랐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명이 둘러멘 남자를 알아본 토마시가 그녀보다 먼저 소리친 까닭이었다.
“에케모? 자네 미쳤나? 여기에 에케모를 데리고 오다니!”
“…토마시.”
“이런 염병, 심지어 살아있잖아?”
“….”
“뭐 하고 있나? 지금 당장 벽 밖으로 던져버리지 않고!”
“….”
여명과 에케모가 동시에 할 말을 잃고 마탑주를 바라보길 잠시.
토마시는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왜 안 죽이고 데리고 왔나?”
“그냥, 제가 죽이기엔 너무 멍청한 사람이라서요.”
마하간이 자신의 제자를 가리키며 했던 말.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마시와 달리, 세티와 살로메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여명은 진심을 꺼냈다.
“사비나는 죽었나요?”
“…아니, 아직 살아있네. 치료받지 않으면 얼마 못 가겠지만.”
“그러면… 사비나도 불러주세요. 적어도 죽기 전에 피해자들이 두 사람을 심판할 수 있도록.”
“….”
여명이 에케모를 데리고 온 진짜 이유를 깨달은 토마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설마… 그를 공개 처형할 생각인가?”
“…그걸 원하십니까?”
토마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벽 바깥의 괴수와 벽 내부의 피난민들을 번갈아 본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응당 그래야지.”
“제 뜻이 아니라, 탑주님의 의견을 물은 겁니다.”
그때, 에케모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본 토마시는 흠칫, 놀랐다. 그의 눈동자는 혁명가 시절이 떠오를 만큼 맑은 까닭이었다.
마치, 이후의 좌절과 절망을 극복한 것처럼.
“….”
토마시는 놀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둘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묵묵히 서로를 바라봤다.
이윽고, 에케모가 다시 고개를 숙인 순간. 침묵하던 마탑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