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7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71화(471/817)
EP.471 아타카attacca (4)
* * *
***
두메아 저택 내부, 부상병들이 끙끙거리고 있는 병실.
“사비나.”
익숙한 목소리가 사비나를 깨웠다. 그녀는 복부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삼키며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개를 닮은 괴수의 면상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가진 괴수, 카레닌은 사비나의 복부에 꽂아 넣은 촉수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일어나, 사비나.”
“….”
사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촉수가 연결된 복부를 내려다보니, 찢어진 로브 사이로 치유된 피부가 보였다. 자신의 살로 상처를 치료하는 카레닌의 능력이었다.
“왜….”
“왜 살렸냐고?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친구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고,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이대로 편히 죽기엔 너의 죄가 너무 깊기 때문이지.”
“….”
사비나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그녀는 지금 자신이 마음먹으면 카레닌과 이 병실에 있는 다른 인간들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음을, 더 나아가 외벽 밖에서 대기 중인 정예 괴수들을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에케모는… 어떻게 됐지?”
카레닌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두메아 가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스피커를.
[전투는 끝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밤은 끝났습니다! 두메아 가문과 히라리아에 영광을…!]병실이 환호로 가득 차는 가운데, 사비나는 자신이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케모와 그녀의 행동은 그저 작은 발악에 불과하다는 걸…
사비나가 씁쓸하게 입술을 깨무는 가운데, 카레닌이 그녀의 배에서 촉수를 떼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상에서 일어났다. 카레닌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사비나를 밖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복도로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저택 내부로 향했다.
뒤뚱거리는 카레닌의 걸음이 이어지고, 흥분한 가솔들이 그들을 지나치길 한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카레닌이 대뜸 입을 열었다.
“에케모는 살아있어. 피를 좀 많이 흘려서 기절했지만.”
“….”
“그리고… 해가 뜨는 대로 토마시가 너랑 에케모를 재판에 세울 거야.”
“…재판?”
사비나는 입꼬리가 뒤틀리는 걸 참으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정치적 명분은 중요하지.”
“….”
“좋아, 기꺼이 죽어줄게. 운명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패배한 이상… 이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카레닌은 촉수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건 카레닌이 뭔가 어색한 말을 꺼내기 전에 보이는 습관이었다.
뭐지?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기 무섭게, 카레닌이 말했다.
“흐으음… 에케모의 생각은 조금 다르더라고.”
“뭐?”
“녀석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간청할 거야. 살아서… 여태껏 지은 죄를 갚을 생각인가 봐.”
사비나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눈앞의 괴수는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한 마디로 물었다.
“…어째서?”
“희망… 까지는 아니고, 가능성을 봤거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가능성.”
거기까지 말한 카레닌은 어떤 방 앞에 멈춰 섰다. 문짝에 고급스러운 장식이 달린, 아마도 손님을 위한 방.
카레닌은 촉수로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깨어난 김에 만나봐. 어쩌면, 에케모처럼 너도 생각이 달라질지 몰라.”
“….”
“지금 안에 주인공이랑 같이… 야, 야, 잠깐! 노크는 해야-”
그가 뭐라고 지껄이건, 사비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입술을 겹치고 있는 두 남녀와 눈을 마주쳤다.
“….”
“….”
놀란 커플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 빈자리로 무거운 침묵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려는 순간.
당황한 소녀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배꼽 위까지 올라온 웃옷을 정리할 생각도 못한 채 곧장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래봤자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반대쪽에 앉아 있던 금색 눈동자의 사내놈은 풀린 웃옷 단추를 잠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침묵 속에서 문 앞까지 걸어온 그가 물었다.
“카레닌이랑… 사비나? 맞죠? 왜 찾아오셨어요? 노크도 없이.”
“어… 그게… 네가 에케모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듣고 싶어서….”
대답을 듣자마자 사내놈… 아니, 여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게 분명한 웃음이었다.
“그건 에케모한테 직접 듣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여명의 웃는 얼굴이 어찌나 살벌한지, 덜컥 문을 연 사비나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하, 하… 내 정신 좀 봐, 그걸 미처 생각 못 했네.”
“…다른 볼일은 없으신 거죠? 그러면, 이만하고 내일 뵙도록 하죠. 오늘 고마웠어요.”
사비나가 듣기에, 그건 ‘오늘 고마운 일만 아니었어도 머리통을 뽑아버렸을 거다.’ 라는 말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증명하듯, 여명은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는 덤이었고.
그꼴을 본 사비나는 ‘정말로 저게 네가 말한 희망이냐’ ‘대체 무슨 고마운 일을 했느냐’ 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이 튀어나오기 전에, 카레닌이 여명이 서 있던 장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랫도리 잘 만들었네. 쓰읍… 그래서 성능 테스트부터 해보는 건가?”
“….”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는 법. 사비나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
기나긴 밤을 지나, 히라리아에 아침이 찾아왔다.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운 오늘을 보며 안도했으나, 햇빛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코를 찌르는 악취였다.
무너진 건물이 풍기는 파괴의 냄새, 누군가 밤새 쏘아댄 화약 냄새, 그리고 무수한 괴수의 시체가 남긴 오물 냄새까지.
그 무수한 악취를 마주한 시민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성기사님들은 어딨지? 어젯밤에 시민들을 대피시키던 성기사분들 본 사람 없나?
-다섯 신과 성녀님이 보우하심이라.
-대피령을 내린 걸로도 모자라 일반인들에게 마탑을 개방할 줄이야. 마탑주가 큰일을 했군.
살아남은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자들과.
-원로원이 불타고, 괴수까지… 마탑은 왜 이 상황에도 침묵하는가?
-내 집이 무너지는 동안 마탑과 마탑주는 뭘 한 거야?!
-방사능 유출이라며! 마탑과 마탑주는 책임져라!
탓할 사람을 찾는 자들.
머릿수는 전자가 압도적이었지만, 목소리는 후자가 훨씬 컸다.
만약 이곳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지구의 선진국이었다면 당장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이 아닌 마법사들이 군림하는 히라리아라서?
아니면 두메아 저택을 확인하러 간 마법사가 돌아오며 꺼낸 말 때문에?
-두메아 저택으로 가는 길목에 아직도 수백 마리의 괴수가 남아있는 걸 확인했소. 탑주께서 오실 때까지 시민 여러분 모두 이곳에서 대기하시오.
둘 다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시민들이 자리를 지킨 결정적인 이유는 마탑주가 도시 전체에 퍼트린 라디오 방송이었다.
[오늘 정오, 마탑 앞에서 일련의 사건의 책임자를 문책하고, 죄의 경중을 따지기 위한 재판을 열겠소. 어젯밤 전투에서 피를 흘린 전사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재판이니, 히라리아의 양식 있는 시민들과 마법사들은 모두 결과를 기다려주시오.]절차와 정의가 살아있다면, 아무리 분노한 자라도 폭도가 되지 않는 법.
시민들은 침착하게 재판을 기다렸다. 구멍 난 마탑을 보며 오열하는 마법사들과 전파를 잡기 위해 애를 쓰는 지구의 기자들을 구경하자니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속된 정오가 가까워지자, 두메아 가문의 가솔들과 마법사들이 마탑 앞에 커다란 공개 재판장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뚝딱거렸을까? 임시 재판장이 거의 다 완성될 때쯤.
뜻밖의 인물들이 가장 먼저 재판장에 도착했다.
-성기사님들이다!
-오, 다섯 신이시여.
그런데 여섯 명이던 어젯밤과 달리, 재판장을 찾아온 성기사는 세 명뿐이었다.
망치를 든 여성 성기사 한 명, 각각 창과 검으로 무장한 남자 성기사 둘.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나머지 성기사들이 순교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괴수는 인질은커녕 부상자조차 허용하지 않으니까.
아, 성기사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이 도시에서 죽다니. 시민들은 환호가 아닌 기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다섯 신과 성녀님을 찬양하라.
그렇게 성녀가 영문도 모를 칭송을 받는 가운데, 지구의 기자들은 아쉬움을 삼켰다.
환호하는 분위기라면 모를까, 이런 경건한 분위기에서는 성기사들에게 마이크를 내밀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기자들의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마탑주가 재판장에 도착한 까닭이었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한데, 마탑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두메아 가주와 가솔들, 그릇, 포박된 두 명의 마법사, 그리고 무수한 괴수들이 길게 꼬리를 만들고 있었다.
-아니, 저 괴수들은 다 뭡니까?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미리 대피령을 내린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전부 알고 계셨던 겁니까?
기자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라붙었으나, 마탑주는 한마디로 그들을 정리했다.
“재판장에 자리를 내어 드리겠소. 선착순이니, 빨리들 들어가시는 게 좋을 거요.”
그건 어떤 인터뷰보다도 가치 있는 제안이었고, 눈치 빠른 기자들은 재판장 앞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간단하게 기자들을 처리한 마탑주는 뒤뚱거리는 괴수 한 마리와 나머지 일행 모두를 이끌고 재판장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재판장 주변에 떡하니 멈춰 선 괴수들을 보며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재판장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려는 찰나.
예고되지 않은 손님들이 추가로 도착했다. 두 명의 기사. 그것도 괴수들이 들끓던 서쪽에서 걸어온 기사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괴수의 피와 살점을 가득 뒤집어쓴 그들의 걸음에는 피곤이 역력했다.
그건 누가봐도 밤새 괴수를 막다 온 영웅들의 모습이었고 시민들은 두 사람을 향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두 기사가 도착한 것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
[현재 사망한 원로들의 유품과 집안을 확인한 결과, 그들 모두가 허가받지 않은, 그리고 결코 허가받지 못할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현 두메아 가주의 충격적인 고백이 재판장을 울리는 가운데, 성기사로 변장한 세티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괜찮아?”
마찬가지로 성기사로 변장한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어.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정치쇼도 필요한 법인데.”
“이 재판 말고, 마탑의 마나 말이야.”
“….”
“정말로 그냥 돌려줄 거야?”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늘 아침에 마탑주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탑주는 그에게 환골탈태하고 남은 마탑의 마나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지맥의 마나를 모으는 기능을 되살리기 위해선, 원래 심장에 고여있던 마나가 필요하다나?
물론, 여명은 거절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가 아까워서? 아니, 그가 본 마탑의 마나는 독이었다. 마법사들의 발전을 저해하는 독.
마탑주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마나를 돌려달라는 부탁을 철회하지 않았다.
여명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지맥의 마나를 사용하고 싶네.
마탑주의 계획은 이랬다. 그는 심장을 살리는 동시에, 여명이 뚫어버린 마탑의 구멍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자연스레 마탑에 모인 마나는 내부에 저장되는 대신 바깥으로 퍼질 테고, 히라리아 그 자체의 마나가 풍부해질 것이다… 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땅에 처박힌 탑이 아닌, 도시 자체를 성장시키고 싶네. 누가 알겠나? 몇십 년 뒤에는 마법사와 일반인이 모두 마법을 누리는 진짜 마법의 도시가 될지?
고향을 사랑하는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그럴싸하면서도 멋진 생각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그 계획을 가만히 두고 볼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토마시를, 그리고 언젠가 이 도시로 돌아올 살로메를 믿기로 했다.
…어쨌거나,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그는 세티에게 대답했다.
“돌려줄 거야. 그냥은 아니지만.”
“뭘 또 받아내려고? 근데 뭐 줄 게 있으려나? 아까 출발하기 전에 카레닌이 나보고 도시 재건 비용 좀 빌려달라고 하던데.”
“….”
“그것도 은행 이자보다 싸게.”
여기서 현실적인 돈 문제가 튀어나오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웃음과 상관 없이, 재판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피고 에케모, 전대 마탑주 사비나는 원로원이 나치 잔당이 남긴 흑마법을 연구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예, 알고 있었습니다.]나치… 그 단어가 등장하자마자, 시민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인지 한탄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또한, 이번 사태에 종말 교단의 개입이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그러나 이어진 내용을 듣자마자, 모두가 동시에 입을 열어 그 침묵을 박살 내버렸다.
-종말 교단이라니!
-드디어 마법사들이 미친 게야?
-성기사들이 온 이유가 뭔가 했더니….
두려움, 분노, 그리고 혹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증거!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가 없는 한 믿을 수 없소!
-이만한 괴수를 부리려면 아야톨라 급이 아니면 불가능하거늘!
‘정숙하라’ 는 두메아 가주의 목소리조차 그 요구에 파묻힐 때쯤.
“증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끼이익-임시 재판장의 문을 열고 세 명의 마법사가 들어섰다.
각자 녹, 적, 청색의 상징을 달고 있는 마법사들.
마탑의 처형관이라 불리는 세 남녀는 재판장에 모인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척척 재판장 위로 올라오더니, 각자 하나씩 물건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적색의 아줌마가 작고 검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존경하는 마탑주님과 시민 여러분! 최근, 저는 도시에서 교단의 흔적을 발견하고,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이 타락석이 그 증거입니다!”
다음은 녹색의 거한이 찢어진 안대를 꺼내며 소리쳤다.
“도시에서 암약하던 것은 교단의 아야톨라, 진실을 흘리는 자였습니다. 이 안대가 그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색의 처형관 발막이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꺼내 소리쳤다.
“어젯밤, 저희는 진실을 흘리는 자의 꼬리를 찾아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아야톨라의 팔을 잘라냈지만…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팔은 저희가 실패했다는 증거입니다.”
직후, 재판장에 적막이 흘렀다. 처형관의 위엄 때문인지, 아니면 증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구 하나 따지지 못했다.
그렇게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음만이 이어지길 잠시.
마탑주가 일어나 목소리 가득 마나를 담아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증거만으로 에케모와 전대 마탑주 사비나가 지은 죄를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판결을 내려도 되겠소?]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언의 동의였다.
곧이어 토마시는 여명과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에케모와 사비나, 두 사람에게 변명과 변호의 기회를 주겠다. 입을 열라.]두 사람 중 에케모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재판장에 모인 모두를 쑥 훑은 뒤,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의 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합당한 죗값을 받고자 합니다.”
[그게 전부인가?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그대에게 더 이상 변호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예,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우-! 야유와 혐오감 가득한 욕설이 재판장을 채웠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탑주는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키고는, 직접 쓴 판결문을 들었다.
[나는 그대들의 동문이자 마탑주로서, 크나큰 죄책감을 느낀다. 그대들이 이 도시에 입힌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그 가치를 잴 수 없는바. 그대들에게는 사형조차 사치다.]“….”
[그러니 본 마탑주가 판결하건대, 두 사람 모두 평생 죽음이 유예된 종신 노역형에 처한다. 이의가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탑주가 손짓하자 곧 두 사람은 그대로 재판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물론, 재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탑주는 한층 더 진지해진 모습으로 이미 죽은 원로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마치, 진짜 재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세티는 고개를 저었다.
“종신 노역형이라… 어떻게 보면 사형보다 잔인하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
여명이 멀어지는 에케모를 보며 대답하자, 세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십 년 뒤에, 피해 입은 시민들이 이 재판을 어떻게 기억할까.”
“에케모와 사비나가 진심으로 개심했다면… 옳은 선택이었다고 기억하겠지.”
아니라면 바보짓으로 기억할 테고.
그는 굳이 뒷말을 꺼내지 않았다. 세티 또한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 음모론자들은 좋겠네. 앞으로 십 년은 이 재판을 우려먹을 수 있을 테니까.”
“…음모론자라면 진실이 밝혀져도 안 믿을걸.”
“음모론자 아니라도 안 믿을걸? 옆에서 지켜본 나도 못 믿겠는걸.”
그렇게 말한 세티는 은근슬쩍 여명의 허벅지를 쿡-찔렀다.
“마왕으로 부활하려던 히틀러가 여학생 몸에 봉인되는 것도 모자라, 현대의 용사가 전대 성녀의 안배를 따라 신명을 되찾고, 환골탈태해서 악당을 개심시켰다… 이걸 누가 믿겠어?”
“….”
그건 그렇네. 여명이 웃으며 그녀의 손장난에 맞춰 손을 어울리자, 옆자리에서 크흠-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산초가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들. 보는 눈이 많아.”
벌써 이런 방해가 익숙해진 건지, 세티는 새침한 표정으로 여명의 허벅지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산초의 투구를 툭-때렸다.
“젊은 아해들 연애 방해하지 말고, 네 결혼이나 신경 써라.”
“…아니, 여기서 제 결혼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기사의 약속에는 때와 장소가 없는 법.”
단장이 언급한 약속은 기사단 전대 부단장과의 약속이었다. 첫째를 낳으면 그의 이름을 붙이겠다는 약속.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어진 산초는 크흠, 헛기침하며 재빨리 여명을 불렀다.
“아무튼, 여명. 나는 나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된다고 했지?”
노골적인 주제 돌리기. 여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누가 우리를 여기로 불렀냐는 질문의 대답… 정말 그걸로 되겠니?
“네. 그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재차 확인해주자 산초는 흐음-콧바람을 불었다.
“용사… 용사라, 또 누굴 속일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만… 설마, 네가 진짜 용사는 아니지?”
여명은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로 화답했다.
지구 뉴스에 온갖 음모론이 올라오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