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73)
을 위한 세계는 없다-473화(473/817)
EP.473 아타카attacca (6)
* * *
***
“아, 그리고, 히라리아에서 더 쉬고 가도 되네. 한 일주일 정도 숙박비는 무료로 해주지.”
케이크를 우물거리던 마탑주는 대뜸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여명은 웃었다. 어르신 특유의 새침하면서도 뻔한 호의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었다.
하지만 즐거운 건 즐거운 거고,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탑주님, 하지만 저희는 열차가 수리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뭐? 그렇게나 빨리?”
토마시는 화들짝 놀랐다. 히라리아의 역은 바로 오늘 새벽부터 정상화될 예정이었으니까.
반쯤 초토화된 서부와 달리, 기사단장님과 산초가 분전해준 덕분이었다.
“혹시… 뒤처리 때문에 그러나? 그런 거라면 걱정 말게. 손님에게 그런 걸 시킬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으니까.”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히라리아에 온 개인적인 이유도 다 해결했고, 무엇보다… 올림피아 예선이 코 앞이라서요.”
여명이 손사래를 치며 올림피아를 운운하자, 토마시가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고 보니 자네 학생이었지? 싸우는 모습 때문에 잊고 있었구만….”
말꼬리를 흐린 그는 슬쩍 세티를 확인한 뒤, 작게 ‘요즘 젊은것들이란…’ 이라고 중얼거렸다.
직후, 세티는 토마시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킥킥 웃으며 여명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조금 전까지 거래 비용을 두고 언성을 높이던 것과는 딴판인 모습.
이건 어디까지나 둘 다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거래를 끝낸 덕분이었다. 여명은 퀴니 코완이 남긴 잉여 자금을 히라리아 복구에 투자했고, 그 대가로 빈 베리야의 구슬에 정예 괴수를 담아 받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복구 사업에 끼어들어 이득을 볼 수 없도록 개인적으로 드워프들의 연락처를 알려준 건 덤이었고.
아무튼, 잠시 여명의 냄새를 맡던 세티는 주제를 돌렸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별 파티는 준비하지 마세요.”
토마시는 흠칫, 눈을 찡그렸다. 너무나 뻔한 반응이었고, 이어진 말투 또한 그랬다.
“이, 이별 파티는 무슨?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도시 정상화에 온 힘을 쏟아도 부족할 판에…! 당장 오늘 밤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열 거야.”
“술이랑 식재료가 주방에 잔뜩 쌓인 거 봤어요.”
“아, 그건 말일세… 음, 자네들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승리한 우리 모두를 위한 파티일세.”
“술 상자 옮길 때 도와드렸는데, 가솔분들께서 저희를 위한 파티라고 하셨는데요?”
“뭐?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걸 다 불었어? 이 멍청한 놈들 같으니….”
이번에는 세티와 여명이 동시에 미소 지었다. 토마시는 위엄을 유지하는 걸 포기하고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저녁에 잔치를 열 생각이니, 와서 건배 한 번씩은 하고 가시게.”
“….”
“자네가 모두를 구했다는 걸 밝히지도 못했는데… 이것도 못 해주면 양심이 찔려서 잠도 못 잘 걸세.”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여명이 세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탑주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아, 그리고 떠나기 전에 에케모를 만나보게.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니.”
***
여명은 곧장 에케모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일단 노크부터 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문이 끼익-열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마법사들이란. 여명은 세티에게 먼저 방으로 가라는 눈빛을 보낸 뒤 홀로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에서 흘러드는 햇빛에 의지해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에케모가 보였다. 그의 얼굴 절반에는 어젯밤까지 보지 못했던 검은 문신… 범죄자를 위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여명이 그 낙인을 빤히 바라보자, 에케모는 펜을 내려놓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죄인을 상징하는 문신일세. 내가 새겨달라고 했네. 원시적이지만, 죄를 상기하기에 이보다 효율적인 것도 없지.”
“….”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잘 어울린다? 진심으로 속죄하시는군요? 어느 쪽이건 이상했기에, 여명은 그냥 침묵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에케모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네. 여명, 진심으로 고마워. 자네 덕분에… 사상자가 100명도 안 돼.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네.”
100명 남짓한 사상자. 그중 죽은 사람은 두 자릿수에 불과했다. 덕분에 마탑이 사건을 축소할 수 있었으나…
“…당신이 아니었다면 한 명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겠죠.”
여명은 에케모의 맞은 편에 앉으며 지적했다. 에케모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모든 게 나의 죄일세.”
운명에게 죄를 돌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속죄의 시작은 자신의 죄를 마주 보는 것에서 시작되니까.
여명은 그를 평가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차오를 때쯤, 에케모가 책상 아래에서 작은 가죽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열어보게.”
여명은 의아한 얼굴로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에 담겨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현대 전류 마법 3선]이란 제목의 책 한 권, 작은 수첩 한 권, 그리고 단단하게 봉인된 편지 한 장.여명이 이것들은 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에케모가 설명했다.
“마법책은 토마시가 직접 쓴 물건일세. 이미 본 적 있겠지?”
암페르의 빛을 비롯한 특이한 전류 마법들.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케모가 덧붙였다.
“원래는 토마시가 주기로 했는데… 부끄러워서 못 주겠다더군. 어쩔 수 없이 내가 전해주기로 했네. 혹시라도 자네가 쓰기 어렵다면 살로메에게 주게.”
“….”
“그리고 수첩은… 내가 알고 있는 운명에 대해 적어놓은 걸세. 자네에게 쓸모 있을 거야.”
여명은 슬쩍 수첩을 확인했다. 안에는 작가가 쓴 미래 수첩과 비슷한 내용이 죽 적혀 있었다.
둘을 대조해보면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책과 수첩을 인벤토리에 챙긴 여명은 마지막 남은 편지를 들고 물었다.
“그러면 이 편지는 뭡니까?”
“그건… 자네가 꼭 전달해줬으면 하는 편지일세. 멍청한 제자가,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지.”
에케모는 부끄러운 듯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여명은 말없이 편지를 챙긴 뒤,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더 무슨 말을… 아, 아니지.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부탁이시라면?”
“마음껏 살게.”
“…?”
“다른 누군가의 법이나 요구가 아닌, 자네의 의지를 따라서, 자유롭게… 그렇게 살아주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면서 대답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딱-문이 닫혔다. 에케모 한참이나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펜을 잡았다.
[근계, 친애하는 성기사단 단장님께…]운명이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
세티의 건배 인사와 박수로 시작된 두메아 가문의 승전 파티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평화로웠다.
음식은 맛있었고 술은 감미로웠다.
술에 취해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으나, 누구 하나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기억에 남는 파티.
살로메가 가문 후계자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며 괴벨스의 연설을 응용한(?) 연설을 하다가 여명에게 혼난 걸 제외하면-그녀는 이걸 알아듣는 여명이 더 나치 같다고 항변했다-파티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가솔들이 방으로 돌아가고, 긴급 호출을 받은 토마시가 마탑으로 달려갈 때쯤.
그러니까 저녁에 시작된 파티가 자정을 넘길 정도로 이어지고 나서야, 여명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이들과 가볍게 인사하며 저택 밖으로 향했다.
“…작별 인사도 안 하고 가요?”
뒤늦게 그를 따라온 살로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다시 만날 텐데, 뭐.”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살로메의 입이 아닌, 노부인의 입에서 나왔다.
“꼭 우리 아버지처럼 말하는구나.”
현 두메아 가문의 가주. 그녀는 여명 일행이 이렇게 떠날 걸 예상했다는 듯, 가솔들과 함께 저택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서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시는 분이지.”
“….”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숨어버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는 딸 사이에서 그가 뭘 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여명을 보던 현 가주는 살짝 웃었다.
“반응을 보니, 다행히도 아직 성불하지 않으셨나 보구나.”
“…예, 멀쩡한 꼴은 아니시지만요.”
설명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현 두메아 가주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여명과 손녀를 번갈아 보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손녀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알지?”
“…할머니?!”
기겁하는 살로메와 상관없이, 여명을 바라보는 가주의 눈은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능청스러움 아래 감춰진 지혜와 깊은 이해심.
그것을 마주한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필요할 때는… 특히 나치 따라할 때는 훈계하겠습니다.”
“아, 그건 어쩔 수 없지. 잘 부탁하마.”
“네?!”
그러자 살로메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놀랐다. 가주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두메아 가문의 은인이여.”
여명과 세티는 그대로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당황한 살로메를 이끌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정문 앞에는 산초와 기사단장, 그리고 익숙한 마법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운전석에 탄 마법사는 여명을 보자마자 크게 손을 흔들었다.
“오, 다시 보니 반갑구만! 살아 있어서 다행일세.”
그 난리 통에서 그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던 여명은 히죽 웃으며 그의 마차에 올라탔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용케도 살아계셨네요.”
“아이고, 당연히 살아야지. 저금한 돈이 얼만데. 아, 그리고. 대기료는 150달러일세. 이 저택 입구에서 3시간 기다렸거든.”
“….”
전 부른 적 없는데요? 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한발 앞서, 마차 창문이 열리며 의외의 인물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불렀네.”
후줄근한 얼굴의 아저씨… 마탑의 청색 처형관, 발막이었다. 여명은 물론이고, 세티와 살로메도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바쁘지. 시체 치우고, 서류 정리하고, 원로원의 빈자리를 메꾸고… 근데, 생각해보니 나 말고도 처형관이 둘이나 더 있더라고?”
“….”
“그래서, 아카데미까지 너희를 배웅하기로 했단다.”
결국, 여명을 핑계로 농땡이 칠 거란 소리였다.
기사단장과 세티를 비롯한 일행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마차에 올라타는 사이, 발막이 한 마디 더했다.
“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대기료는 그쪽이 내주겠나? 도망치느라 지갑을 두고 왔거든.”
“….”
살로메가 독일어가 분명한 욕설을 중얼거리는 가운데, 여명은 돈을 꺼냈다.
***
임시 마탑주의 방으로 쓰이는 빌딩.
“떠나네.”
창밖을 바라보던 사비나는 저 멀리, 움직일 준비를 끝낸 열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서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있던 마탑주, 토마시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새벽의 어둑함 사이로 열차와 역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시간 때문인가, 출발 전 열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배웅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사비나가 물었다. 혁명을 함께하던 시절만큼이나 감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잠시 창밖을 보던 토마시는 고개를 저었다.
“배웅은 무슨, 어차피 또 만날 텐데.”
“…운명은 모르는 거잖아.”
그 대답을 들은 토마시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분명히.”
운명을 믿고 타락한 마탑주와 운명에 신경 끄고 살던 마탑주.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이 바뀐 것에 어떠한 희극적인 감상을 느꼈다.
“그를 믿는 거야? 운명도 믿지 않던 네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내 경험상, 돈 투자한 놈들은 절대 쉽게 안 죽더라고.”
실없는 농담을 끝으로, 토마시는 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열차가 점으로 변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조용히, 묵묵히 눈빛만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