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74)
을 위한 세계는 없다-474화(474/817)
EP.474 이변을 위한 예선전은 없다.
* * *
…이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체제 경쟁이고, 체제 경쟁은 곧 전쟁일세. 전쟁에서 중요한 건 목숨이 아니라 승리지. 알겠나?
정 못 믿겠으면 나가서 확인해보게.
환호하는 대중들과 이권을 두고 다투는 광고주들, 심지어 예산을 정한 정치인들조차 금메달에 묻은 피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을걸?
그러니 지랄 말고 가서 약이나 놔.
[고작 금메달을 위해 이런 피 값을 지불하는 게 맞냐는 요원의 질문에, FBI 초대 국장 존 에드거 후버의 대답.]***
승만 시티로 향하는 열차는 조용했다.
승객이 거의 없는 새벽 열차를 탄 덕분이기도 했고, 도시를 떠날 사람은 피난령이 떨어졌을 때 이미 다 떠난 덕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명은 눈을 감은 채 열차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따라 흔들리는 그의 얼굴 위로 햇빛이 넘실거렸다. 언뜻 보면 낮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몸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시작은 심장에서 출발한 마나였다.
마음껏 풀려난 마나는 혈관을 타고 내달렸다. 곧 피부가 호흡하며 외부의 마나를 거기에 더했고, 마나는 혈관과 피부의 장벽을 넘어 그의 몸 주변에서 휘몰아쳤다.
무술 특유의 마나 운용법을 마법에 적용한 놀라운 모습.
그 마나를 한동안 유지하던 여명은 어느 순간 흐름을 거꾸로 바꿨다. 바깥에서 폭풍을 만들던 마나는 순식간에 그의 육체 속으로 되돌아왔다.
환골탈태로 강화된 혈관은 단단하게, 그리고 동시에 탄력적으로 폭풍을 받아들였다. 여명은 격렬하게 내달리는 기운을 그대로 육체 곳곳으로 퍼트렸다.
아직 마나에 익숙하지 못했던 지구인들이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이라 불렀던 길을 따라 마나가 파도치길 잠시.
신나게 육체에 녹아든 마나들은 정맥과 동맥, 그리고 모세혈관 하나하나까지 훑은 뒤 다시 심장으로 돌아왔다.
사아아-마나가 정지하자마자 그의 몸에서 작은 파장이 흘러나와 주변 공기를 밀어냈다.
하지만 여명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덮고 있는 햇볕을 느끼며 백회혈, 즉 정수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저 하늘 너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차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공간의 마나가 호응하며 정수리로 흘러들었다.
고차원적 존재의 힘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 신성.
지구인들은 그저 신화로만 기억하는 태양신의 힘이 그의 정수리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열기와 마나는 빠르게 여명의 몸 곳곳으로 퍼졌다.
성녀가 걸어준 축복처럼, 혹은 빙의한 스탈린의 주가시빌리처럼.
신성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팔다리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달궜다.
이윽고 자신감을 얻은 여명이 한층 더 깊게 신성을 빨아들인 순간.
『또 다른 나의 선택을 받은 아이야.』
햇빛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명이 놀라 화들짝 눈을 떴으나, 익숙한 신의 목소리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물을 바치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 적어도 기도라도 하고 쓰거라.』
“어… 이집트 신화의 기도는 잘 모르는데요…?”
『…알고 있는 우리 신화의 구절은 없느냐?』
잠시 고민하던 여명은 그나마 비슷한 종교 구절을 입에 올렸다.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출애굽기는 기독교다.』
“음… 그러면…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이라. 이 몸의 위업을 보라, 위대하다는 이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여명이 기억나는 이집트 관련 내용을 그대로 지껄이자, 목소리가 정색했다.
『오지만디아스? 그건 영국 시인이 쓴 시다.』
“….”
『…그냥 제물을 바치거라. 아, 그리고 혹시라도 쇠똥을 바칠 생각이거들랑 하지 말거라. 술과 고기면 충분하다.』
여명은 움찔, 쇠똥구리 신이 쇠똥을 안 받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케프리는 자상한 목소리로 충고를 마무리했다.
『무턱대고 신성을 수련하지 말고, 다섯 신을 섬기는 성녀와 성기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신성에 있어 그들은 훌륭한 스승일지니.』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햇빛이 사그라들었다. 여명은 창밖의 태양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만 시티까지 이제 반나절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
“이번 기회에, 지구 관광이나 해볼까 하네.”
일행 모두가 식당 칸에 모여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가운데, 기사단장이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산초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관광이요? 갑자기? 또 뭘 하시려고….”
“관광이 관광이지. 올림피아인가 뭔가도 구경하고, 개성 같은 곳도 둘러보고… 뭐, 그런 거 있잖는가.”
“거, 헛소리 마시고 돌아가서 요양이나 하….”
거기까지 말한 산초는 단장의 삼엄한 눈빛을 보고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에서 식빵에 잼을 바르던 여명은 손을 멈추고 단장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하시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하필 한국 정부와 싸우기 직전에 관광이라니.
복수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속물적인 생각과 자칫 복수에 휘말리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고민을 끝낸 여명이 잼 바른 식빵을 세티의 입 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단장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실 수 있을까요?”
“자네가?”
“예, 때마침 제가 올림피아에 참가하기도 하고… 아카데미에 숙소도 잡아드리고, 비행기 표같이 자잘한 것들은 제가 다 챙겨 드리겠습니다. 어떠세요?”
단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여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뭔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진중한 눈빛이 그의 얼굴을 훑길 잠시.
단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디, 노인네 주책도 잊고 후배의 안내를 받아볼까.”
그걸 들은 산초가 ‘주책이면 처음부터 안 하는 게 낫지 않냐’ 는 투로 중얼거리고, 단장이 먹던 거나 다 먹으라고 핀잔을 줄 때쯤.
덜컹! 열차가 쏠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안내 방송도 없는 갑작스러운 정지였다.
“으응?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는데?”
놀란 살로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무섭게, 여태껏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발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오지.”
그 말을 남긴 발막은 곧바로 식당 칸 밖으로 향했는데, 채 3분이 되기도 전에 돌아왔다.
그걸 본 여명이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뭐, 사고라도 난 겁니까?”
“아니, 차라리 사고였으면 좋겠군.”
발막은 고개를 내저은 뒤 덧붙였다.
“열차에 군인들이 쫙 깔렸다. 한국군이 철도를 봉쇄하고 열차 내부 인원을 체크하고 있더군.”
“….”
“다른 열차들을 내버려 두고 콕 집어 이 열차만 멈춘 걸 보면, 히라리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알아내려는 것 같은데… 어쩔 건가?”
그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시선이 여명에게 모였다.
여명은 그런 일행들의 얼굴을 스윽 훑은 뒤, 마나를 끌어 올리고 피눈물의 환상을 펼치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야, 굳이 장단 맞춰줄 필요 없죠.”
***
-찾았습니다! 히라리아에서 온 마법사가 있습니다!
무전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은 진여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위치는?”
-식당 칸입니다.
진여명은 곧바로 주변 부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열차를 막아선 군인 중 일부가 그를 따라 열차 내부로 들어갔다.
터벅, 터벅, 군화 소리와 함께 열차 가로지르길 잠시.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식당 칸에 도착한 진여명은 눈살을 콱 찌푸렸다.
“충성!”
미처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군인이 경례하는 사이, 진여명은 군인에게 둘러싸인 마법사들의 얼굴을 보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처형관 발막과 그릇…?”
“…제 이름은 그릇이 아니라 살로메 두메아입니다. 진여명 씨.”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식당 칸에 모인 군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열차에서 만나기에는 너무 거물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늘상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벗어 던진 까닭이었다.
이만한 미인이었을 줄이야. 군인들이 계속 그녀의 얼굴을 힐끗거리건 말건, 살로메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보다, 왜 열차를 멈추고 저희 일행을 포위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그게….”
진여명은 짜증 섞인 표정을 감추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히라리아에서 탈출하는 적당한 마법사를 붙잡아 심문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릇이, 아니, 살로메가 걸릴 줄이야.
‘이걸 심문해도 되나?’
처형관도 처형관이었지만, 살로메는 함부로 심문하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녀의 이명부터가 마탑의 미래 아니던가. 만약 심문 때문에 올림피아 예선 참가가 늦어진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씁.”
윗선은 히라리아에서 벌어진 일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마법사를 심문하라고 했을 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건 즉, 심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전부 그의 책임이 될 거라는 뜻.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열차 칸을 확인하러 간 녀석들에게 무전을 보내봤으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명령이냐, 책임이냐.
잠시 고민하던 진여명의 시야로, 살로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후줄근한 차림의 여자 하나와 남자 셋.
“저, 살로메 양? 혹시 일행분들 중에 마법사가….”
“…이분들은 저를 보조하기 위해 특별히 가문에서 붙여준 가솔들입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
진여명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판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저희 측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 무슨 오해요?”
“유감스럽게도 군사 기밀과 관련된 일이라, 설명 드릴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여명은 열차에서 후퇴를 명했다. 다음 열차에 마법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벌집을 건드릴 필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진여명 본인도 열차에서 내리려는데, 발막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 혹시, 지구 신문이나 책 같은 거 있나?”
“…?”
“열차에서는 볼거리가 없어서.”
뭐라는 거야. 와이파이도 다 연결되어 있는데.
진여명이 그런 거 없다고 말하려는데, 한발 앞서 부하 군인 중 한 명이 신문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어제 신문이지만, 볼만하실 겁니다.”
신문을 받은 발막은 고맙다는 듯 눈짓했고 군인 또한 그에 맞춰 경례했다.
저 눈치 없는 새끼가… 진여명이 열차에서 내리면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도 무언가가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푸흡.
가솔 두 명이 동시에 뭔가를 뿜는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신문을 본 두 가솔이 신문을 보며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뭐지?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진여명은 그들이 보고 있던 기사를 보고 곧바로 의심을 거뒀다. 그들이 본 기사는 그 또한 읽자마자 웃었던 기사였으니까.
[올림피아 러시아 지역 예선에 불어 닥친 이변…? 1위 쇠똥구리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