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7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75화(475/817)
EP.475 이변을 위한 예선전은 없다. (2)
* * *
***
새벽 일찍 일어난 성녀는 평소처럼 기도회를 준비했다.
동아리니 뭐니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임시로 진행하는 새벽 기도회였지만, 그녀의 본직은 성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조심스레 몸단장하고, 오늘 예배를 위한 성경 구절을 정하고, 묵상할 때 들을 찬송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안대까지.
여명과 세티, 두 사람의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듯,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회를 준비한 성녀는 곧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일반 신도들과 달리 신전 뒷문을 연 그녀는, 안을 보자마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모였어?
신전 내부에는 동급생과 선배들, 심지어 교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신전 의자가 빽빽이 차다 못해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
올림피아 예선전 때문인가? 하지만 이제와서 기도한다고 신들께서 승리를 내려주실 리 없는데.
성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성도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 백 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기도회를 진행한 그녀 아닌가.
하지만 신전에 들어선 그녀는 곧바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츠카와 사제가 보이지 않아서?
아니,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3학년 마법사 선배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으므로.
“성녀님! 제 고향을, 히라리아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대가 표정을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할까.
성녀가 간신히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숨기는 사이, 선배 마법사가 들고 있던 신문을 활짝 펼쳐 일면을 장식한 기사를 보여줬다.
『찬양하라, 성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니… 만주와 시카고를 넘어, 이번에는 히라리아까지.』
성녀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기사는 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녀를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성녀가 보인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뭔데 이거.
***
승만 시티에 도착한 여명 일행은 서둘러 차원문으로 향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뒤에 붙은 꼬리가 한둘이 아닌 까닭이었다.
노골적으로 따라붙는 차가 둘, 하늘에서 지켜보는 드론이 셋, 그리고 관광객인 척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는 녀석이 열 명 이상.
“저렇게 대놓고 따라다니는 걸 보면, 우리가 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게 정말 싫은가 본데?”
“우리가 아니라 살로메일 거예요. 그때 만났던 괴수 군인들이 문제겠죠.”
“하, 찔리는 걸 감추는 것도 귀찮으니, 대놓고 꺼지란 건가?”
발막의 말마따나, 일행 모두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관광하고 싶다던 기사단장님마저 학을 떼며 바로 차원문으로 향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어쨌거나, 일행이 개성 차원문에 도착하자 한국군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차원문 너머로 보냈다.
먼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뭐라 반항도 못 할 정도로 고압적이고,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개성으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발막이 말했다.
“난 여기서 찢어져야겠어.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농땡이 치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여명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그가 킥킥 웃었다.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지. 고향이 휘청거리는 이런 때에 어떻게 나만 놀 수 있겠나. 내가 아무리 한량이라도 그런 건 못하지.”
“그럼 무슨 일로 개성에…?”
“에케모가 이 나라와 거래한 내용 중 찾아볼 게 좀 있어서. 지금은 말해줄 수 없지만… 확실해지면 자네에게도 연락해주지.”
종말 교단, 괴수를 이식한 군인, 그리고 한국… 그가 뭘 캐고 다니려는지 예상한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발막은 시선을 돌려 살로메를 향해 말했다.
“그릇… 아니, 살로메 두메아. 올림피아 잘 치르렴. 무슨 일이 있어도 넌 히라리아의 미래라는 걸 잊지 말고.”
“…응원 고마워요, 발막. 열심히 할게요.”
대답을 들은 발막은 웃으며 나머지 일행에게도 꾸벅 인사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두들 나중에 또 봅시다.”
개성의 골목 사이로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행동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다. 여명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제 개성 공항으로 가시죠. 아카데미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장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잠시 이 나라를 둘러보고 가마. 개성이란 이 도시도 좀 돌아보고….”
말끝을 흐린 단장님은 여명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가 자랐다는 인천이란 도시에도 가보고.”
“….”
그제야, 여명과 산초는 단장이 단순히 관광 목적으로 일행을 따라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 라는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여명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쪽지에 연락처 몇 개를 적어 단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맨 위에 있는 건 시크릿 소사이어티 한국 지부의 연락처입니다. 두 번째는 푸른 쥐의 연락처인데 대답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마지막은… 음, 인천에 계신 제 은사님의 연락처입니다.”
정확히는 장만 어르신의 연락처였다. 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든 단장은 조심스레 쪽지를 접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여명은 별 것 아니라는 뜻으로 웃었다. 때마침 햇빛이 구름을 뚫으며 그를 비추었고, 여명의 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더 선명하게 반짝였다.
단장은 그 눈동자 속에서 익숙함을 찾아냈다. 옛 후회와, 이행되지 않은 맹세가 뒤섞인 익숙함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아무리 늦어도 올림피아 본선이 시작되기 전에 가마.”
단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감상적이었다. 듣고 있던 산초가 조금 놀랄 정도였다.
“예선전 기간은 꽤 긴 편이니, 쉬엄쉬엄 오셔도 됩니다. 관광 즐겁게 하세요.”
여명의 인사를 끝으로 단장은 골목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산초는 바로 따라가지 않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여명과 단장을 번갈아 바라본 뒤 말했다.
“흐음, 이렇게 분위기 잡으면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해지는데.”
“….”
“그러니 난 분위기 안 잡고 그냥 가겠네. 아, 혹시 개성이나 인천에 맛집 같은 거 있나?”
그러자 여태껏 조용하던 세티가 입을 열었다.
“맛집이라면 인천 번화가에 아줌마께서 운영하시는 국밥집이 하나 있어요. 저희끼리 가서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래? 노인네랑 같이 먹기에 딱 좋은 곳이구만. 고맙네. 세티 양.”
“별 말씀을.”
실없는 대답과 실없는 인사. 산초는 처음 했던 말처럼 털털하게 손을 흔들며 단장을 따라갔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으나, 슬픔은 없었다. 여명은 도시의 매연 냄새를 맡은 코를 킁, 털고 공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해봤자 피눈물의 환상을 바꾸는 게 전부였으나…
“잠시만.”
교직원으로 얼굴을 가린 직후, 세티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골목 저편에서 들리는 작은 발소리 때문이었다. 여명과 살로메는 곧장 소리를 따라 감각을 집중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네.
여명이 당장 공격하지 않은 건 발소리가 생각보다 불규칙한 까닭이었다. 누군가를 추적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찾는 것에 가까운 발걸음.
우리를 쫓아온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그의 기대와 달리 낯선 발걸음은 골목 바로 저편에서 멈췄다. 이쪽을 몰래 염탐하는 듯, 짧은 시선이 느껴졌다.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권총을 꺼내들며 말했다.
“나와.”
낯선 이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가, 천천히 골목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기다란 후드로 얼굴과 어깨를 가린, 누가 봐도 수상한 여자였다.
여명이 총을 겨누자, 그녀는 가슴팍에 있는 뭔가를 꽉 쥐며 후드를 벗었다. 후드 아래에서 드러난 낯선 이의 정체는…
“…나츠카와 사제?”
아카데미 1학년을 담당하는 다섯 신 교단의 사제.
그녀는 생명의 녹색 신 이사기녹의 상징이 새겨진 목걸이를 꽉 쥔 채로 말했다.
“…천여명, 맞아요?”
“….”
이제는 학교 사제도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보는 건가? 의문형으로 끝나는 걸 보면 정확히는 모르는 거 같은데…
여명은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저 맞습니다. 사제님. 왜… 아니,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그러자 나츠카와 사제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정말 맞나요? 우리 성녀님을 유혹한 그 천여명….”
누가 누굴 유혹했다는 거야. 여명은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애써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사기녹이시여… 다행이다.”
나츠카와 사제는 안도가 섞인 목소리로 한숨을 쉬고는, 터덜터덜 여명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사거리에 들어오기 직전, 여명이 물었다.
“잠깐만요. 사제님, 먼저 말해주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성도에서 절 추적한 겁니까?”
“아니, 아니, 이건 성도와 상관 없는 일이야.”
“그러면?”
“아, 그게… 어젯밤 기도 중에, 이사기녹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어.”
“…계시?”
“당신이 개성에 있을 테니… 다른 길로 빠지기 전에 성녀님의 곁으로 안내하라고요. 이 목걸이에 당신을 찾을 수 있는 축복을 걸어주셨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닮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대체 그건 뭐죠? 변신술? 아니, 그보다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당신은 대체 누가 변신한….”
“잠깐, 거기까지만.”
여명은 그녀의 말을 끊고, 들고 있던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철컥,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나츠카와 사제가 기겁하건 말건, 여명은 그녀를 겨누며 말했다.
“신께서 직접 계시를 내려주셨다? 지금 그걸 믿으란 겁니까?”
“하, 하지만 사실인 걸요? 제, 제가 여기 있다는 게 그 증거잖아요? 아, 그리고 이 목걸이도.”
그녀는 꽉 쥐고 있던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상징이 새겨진 목걸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진한 신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
여명은 비장한 표정의 사제님과 목걸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가? 그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다른 길로 빠지는 걸 걱정했다면 그냥 성녀에게 계시를 내리는 쪽이 편하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증거를 부정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츠카와 사제에게서는 거짓의 징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총구를 보고 겁을 먹었으면 먹었지.
거짓은 아닌가? 여명은 인벤토리로 총을 회수하며 물었다.
“뭐, 그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고… 그러면 같이 가시죠. 어차피 바로 개성 공항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요. 헛걸음을 한 건 아니니…”
그때, 세티가 끼어들었다.
“저, 사제님. 혹시, 이사기녹께서 지금은 뭐라고 안 하세요?”
“어? 그게….”
나츠카와 사제가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그녀의 목걸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츠카와 사제가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신들은 몰라도, 본인은 쇠똥구리가 좋다고….”
“예?”
“그게, 쇠똥구리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고… 지구 신 중에서 일부다처를 찬성하는 신이라 더 좋… 이게 대체 무슨 말이죠?”
나츠카와 사제가 역으로 뭐라 묻건 간에,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녹색 신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깨달은 까닭이었다. 이런.
“…사소한 이야깁니다.”
“시, 신께서 하시는 말씀에 사소한 건 없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설마… 성녀님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는 시선을 피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꽤 노골적인 대답이었고, 나츠카와 사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여명은 애써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물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사기녹께서는 왜 저를 아카데미로 이끄시는 겁니까?”
이번에도 목걸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나츠카와 사제는 조금 전보다 훨씬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장 훌륭한 복수는, 본인이 원할 때 하는 복수… 지금… 시작하는 건… 때가, 아니라고…”
“….”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녹색 신이 그에게 미래를 알려주는 걸까? 아니면,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이런 충고를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호의만큼은 분명했기에, 그는 이사기녹의 신성이 담긴 목걸이를 향해 대답했다.
“…그 조언, 잘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