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8)
을 위한 세계는 없다-48화(48/817)
〈 48화 〉 죽은 드워프를 위한 파반느
* * *
드워프는 인간이 아니기에, 세계인권선언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
너희를 위한 국제법은 오직 ‘야생동물보호법’ 뿐이다.
『소련의 침략에 항의하는 드워프 외교관들에게 스탈린이 한 대답.』
***
정마필은 임무를 생각하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별을 달 욕심으로 가득한 정 대령이 협박 반, 회유 반으로 맡긴 임무.
이번 임무에서 최선은 상대가 나오지 않고 자신은 도발만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기자들은 용병단의 굴욕이라며 기사를 올려댈 테고, 인터넷에는 선죽 용병단을 비웃는 리플들로 도배될 테니까.
치졸하지만, 군에게나 정마필에게나 가장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다음으로 중간 혹은 평균은 상대를 정마필이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
이 경우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천여명이란 꼬마에 대한 동정론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악은…
상대가 진짜로 용의 갈비뼈를 잘라낼 만한 실력자일 경우.
‘엿 됐군.’
우웅
천여명의 검에 고인 마나를 보자마자, 정마필은 쓰게 웃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특별한 무술을 익혔거나. 그만한 격의 차이가 있다는 뜻.
시작한다!
정마필 저 새끼, 아무리 그래도 지 아들뻘한테 결투를 거냐?
신참! 굳건이 새끼 팔을 잘라버려!
구경꾼들의 비웃음과 악담이 들려왔지만, 정마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이런 일이니 진짜 군 소속 초인이 아니라 자신을 보낸 것 아니겠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뒤져보자.’
그는 잡념 속에서 마나를 끌어 올린 뒤, 대검을 내려찍었다.
챙!
만주에서 십수 년간 구른 군인의 검이 여명의 보급용 철검과 부딪혔다.
먼저 선공을 가져가는 불명예를 감당하고 내지른 검이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에 비해 검술이 부족한 걸까? 상대의 자세가 흔들렸다.
쉬익!
정마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속해 검을 휘둘렀다.
머리를 노리고 떨어진 대검이 횡을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막혔다.
떨리는 손, 반발하는 마나.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도발이라도 한 번 해줬어야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검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실전에서 갈고 닦은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본능이 옳았다.
공방이 열 번을 넘어간 순간, 녀석의 검이 돌변했다.
보급용 철검이 일순간 가속했다. 빗살처럼 번쩍이며 공기를 갈랐다.
쩌엉!
군용 대검이 가까스로 철검을 막아섰다. 부딪힌 검날을 타고 저릿한 마나가 역류했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격. 정마필의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정마필은 이어질 연격을 막기 위해 숨을 참고 근육을 조였다. 팔 하나를 잃는 한이 있어도 목은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연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 일격이 거짓말인 것처럼, 상대는 쓸데없이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보고 막으라는 듯 느릿하게.
‘안 끝낸다고? 이 새끼, 설마.’
의도적인 힘 조절, 기자들을 힐끗거리는 눈빛.
직접 검을 맞대고 있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녀석은 이곳을 데뷔 무대로 만들 생각이라는 걸.
선죽 용병단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끌어모은 기자들과 구경꾼들을 역으로 홍보도우미로 쓰겠다는 건가.
“이런 미친 새끼.”
정마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대로 팔 하나쯤 잘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굴욕을 주려던 치졸한 계획이 역으로 뒤집히는 것도 모자라, 천여명이란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된다?
‘꼰대들이 지랄 나겠군.’
그런 일은 최대한 막아야 했다. 혹은, 노력했다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만 꼰대들의 분노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끝마친 정마필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구경꾼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한발 한발 살의를 담아서.
결투에서 저게 뭐 하는 짓이야?
한 방 먹더니 꼭지가 돌아버렸나?
그러다 신참 죽겠다! 미친놈아!
이러다 죽는 건 나일 텐데. 정마필의 쓴웃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의 검이 점점 더 가속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담긴 칼날이 대기를 갈랐다. 흙먼지와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기자들은 감탄하며 플래시를 터트렸지만, 정작 정마필은 죽을 맛이었다.
‘저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이라고?’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격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거칠어진 숨과 등에 흐르는 땀이 그 증거였다.
‘사람인가?’
작은 동요가 짧은 빈틈을 만들었다. 그 순간, 여명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검을 내려찍는 정마필의 틈 사이로, 보급용 철검이 파고든다.
여명의 검 끝이 휘어진 곳은, 정마필의 팔.
사악!
검광이 번뜩이며 팔뚝을 훑었다. 마나가 주입된 칼날은 수술용 메스만큼이나 날카롭게 뼈와 살을 갈랐다.
털석, 정마필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마필의 양손이 검을 쥔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패배. 그것도 처참한 패배였다.
“방금 그 검술… 뭐냐?”
정마필은 얼떨떨한 얼굴로 여명과 떨어진 팔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는 차마 내 검술을 응용한 거냐고 묻지 못했다.
마나의 수축, 손목의 움직임, 마지막에 틈을 노리는 방식까지.
모든 게 그의 검술을 닮아 있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군의 제식 검술을 기반으로 여러 무술과 실전경험을 살려 만든 자신만의 검술을,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훔쳤다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냐?”
“예.”
담담한 대답.
피 묻은 검을 터는 여명을 보며, 정마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허탈함보다는 황당함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뒤늦게 잘린 팔에서 고통이 올라왔지만, 입꼬리가 내려오지는 않았다.
‘꼰대들, 이거 잘못 건드린 거 같은데.’
***
“이야, 깔끔하게 자른 거 보십쇼. 치유 사제 한 명만 와도 바로 붙이겠는데요?”
용병 구역이 내려다보이는 군용 건물 옥상.
월라드는 여명과 정마필의 싸움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다른 구경꾼들처럼 바로 앞에서 봤으면 죽여줬을 텐데.
그는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존경하는 누님의 앞이었으니까.
“월라드.”
“예, 누님.”
“저 아이, 어떠니?”
모리네. 푸른 코트를 입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쥐 가면 쓴 여인이 물었다.
많은 게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월라드는 그 속에 담긴 뜻을 읽고 대답했다.
“10년 내로 우리 회사 VIP가 될 인재입니다.”
“후한 평가로구나.”
“성장 속도만 따지면 적수가 없습니다. 전윤성 이후로 저런 놈은 처음 봅니다.”
전윤성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모리네는 입술을 쓸었다. 미국의 자랑과 비견할만하단 말이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용병 구역을 내려다봤다.
이제 막 출발 준비를 끝내고 트럭에 타는 선죽 용병단원들 사이, 판초 우의를 뒤집어쓴 한 용병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동소총 두 정, 리볼버 세 자루를 주렁주렁 매달고도 부족했는지, 대전차 로켓을 꼭 껴안고 있는 여자 용병.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그녀의 딸, 성녀.
다행히 주변의 구경꾼 중 누구도 그녀가 성녀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누가 저걸 성녀라고 생각할까.
모리네는 은은한 미소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명령한 일은?”
“…세탁은 끝냈습니다.”
“빈틈은 없겠지?”
“저희 실력 아시잖습니까. 우리 업계 사람이 직접 나서도 저 친구가 쇠똥구리였다는 사실은 못 알아낼 겁니다.”
월라드는 피곤을 숨기지 않았다. 겨우 이틀 만에 한 사람의 과거를 싹 세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서류 쪽이야,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있어 어렵지 않았지만…
“처리한 사람은 몇이나 되지?”
“박구식이란 청소부 하나가 전부입니다.”
“…겨우 하나?”
월라드는 어깨를 으쓱인 뒤, 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푸른 쥐가 자랑하는 기억 이전 주문이 담긴 주문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주문서를 건네받은 모리네는 단번에 주문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러 기억과 정보가 밀려들었다.
쇠똥구리라 불렸던 청소부에 대한 정보들. 그녀는 천천히 머릿속 정보들을 되짚어봤다.
가족도 없는 뒷골목 청소부, 슬럼가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삼류 인생.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학력은 검정고시가 전부고, 그 흔한 휴대폰 개통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니.
그나마 특별한 점을 꼽자면, 그를 데리고 키운 작업반장의 이력 정도가 전부일까.
그 외에 다른 정보들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천 살인귀에게 살해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살아서 활동 중.
시체 사진까지 있는데 어떻게 살아났는가? 불명.
초인이 된 방법은? 불명.
익히고 있는 무술은? 불명.
최근 인천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관련돼있는 것 같지만, 자세한 사항은 불명.
이것도 불명, 저것도 불명.
장만이란 노인네를 뒤지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녀의 딸이 성물을 걸고 안위를 약속한 사람이었다.
지켜 줘도 모자랄 판에 뒤를 캘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뒤, 모리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명이 구경꾼들의 환호 속에서 트럭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천여명이란 신분도 꾸준히 관리해. 부족한 게 있으면 고치고, 혹시라도 추적하는 사람이 있으면 역으로 찾아내고… 말 안 해도 알지?”
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누님, 헌데…”
“헌데?”
“…저 녀석에게 이 정도로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겁니까? 과거 세탁에, 따로 정보보호까지 해주시고. 그… 피눈물 열쇠도 주시지 않았습니까?”
“불만이니?”
“10년 내로 VIP가 될 거라곤 했습니다만… 겨우 한 번 만난 사이 아닙니까. 성녀님도 그렇고…솔직히, 이 정도로 투자해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모리네는 이제 막 출발을 준비하는 트럭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월라드, 의심하는 거니? 너답지 않게 말이 길구나.”
“저는, 아니 저희는 언제나 누님 편입니다. 단지… 이사회가 심상치 않습니다. 몇 명은 이번 일을 명분 삼아, 일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라고 해. 망국의 찌꺼기들이 뭘 하건 상관없으니까.”
모리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녀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침묵.
월라드는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이유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용병단의 트럭이 만주 기지를 떠나고 있었다.
월라드는 굳이 이 침묵을 깨지 않았다. 엄마가 딸을 떠나보내는 자리 아닌가.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잠시 후, 용병단의 트럭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누님, 녀석과 뭔가를 거래하신 겁니까?”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모리네는 월라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보이니?”
“텔레파시 주문서를 사용하셨잖습니까.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눈치가 있다고? 모리네는 피식 웃었다.
“거래라… 이걸 거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래겠지.”
“성녀님은 아시는… 아, 모르시겠군요.”
“당연히 몰라야지. 왜, 고자질하려고?”
월라드는 지금이 웃어야 하는 타이밍임을, 그러니까 가볍게 너스레를 떨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누님의 서늘한 미소를 보자니, 도저히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저희가 찾아낸 영웅 후보들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딸과 관계없는 놈들뿐이지.”
“…불경한 생각입니다. 누님, 신들께서 화를 내면 어쩌시려고.”
“글쎄. 이 정도로 화를 내셨을 거라면, 소련 출신 빨갱이가 성녀를 낳았을 때 이미 벌을 내리셨겠지.”
그제야, 월라드는 웃을 수 있었다. 몰락한 고국의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헛웃음이 나오는 탓이었다.
“…허, 참. 그게 성기사하고 결혼하신 분이 하실 말입니까?”
“가족하고 신앙은 별개야. 스탈린의 어머니를 생각해보렴.”
짧은 농담이 오고 가고, 분위기가 살짝 풀린 그때.
모리네는 시선을 돌려 흩어지는 기자들과 구경꾼들을 바라봤다.
“월라드. 마지막으로 일 하나 더할까?”
“…누님, 여기서 일감을 더 늘리면 저 죽습니다.”
월라드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모리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용병단 앞에 모여있던 주요 언론사 기자들하고 접촉해.”
“….”
“저 기자들이… 천여명에 대해 긍정적인 기사를 쓰면 좋겠어. 어렵지 않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월라드가 슬쩍 말을 흐렸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라면 까라.
그것이 시베리아 시절부터 내려온 쥐들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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