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81)
을 위한 세계는 없다-481화(481/817)
EP.481 이변을 위한 예선전은 없다. (7)
* * *
***
“천여명,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갑작스러운 결투 신청과 동시에, 네티는 상대를 올려다봤다.
‘이쁘네.’
원래 색이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탈색한 포니테일과 단아한 이마 라인, 날카로운 콧대와 그보다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꾹 다물어진 채 분홍빛을 띠는 입술까지.
시이나 선배는 길에서 마주치면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줄 정도로 괜찮은 미인이었다.
뭐, 팔선녀에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네티가 그렇게 별 의미 없는 외모 평가를 하는 사이, 여명은 전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상대의 강함.
쫙 펴진 척추와 교복 라인을 타고 드러나는 섬세한 근육, 그리고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 긴장한 마나…
성녀의 호위란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돈된 모습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10강을 넘보는 그에게 있어, 선배의 강함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검을 주고받을 수 있겠다 싶은 정도?
그렇기에, 여명은 가슴에 떨어진 장갑을 슬그머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지구에서 결투를 거부하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고 알고 있다만.”
“예, 뭐… 그런 전통도 있죠. 하지만 그건 유럽 전통이고, 저는 한국인이라서요.”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그대로 장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르겠지만, 골동품에 가까운 장갑.
장갑을 다시 받아 든 시이나는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한국의 결투 전통은 뭐지?”
“아, 그게, 한국에서는 결투가 불법이라서요. 그런 거 없습니다.”
“….”
“사실, 유럽 전통도 19세기 이후에는 사라졌고요… 음, 장갑을 던지시다니, 중세 관련 다큐를 꽤 많이 보셨나 봐요?”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걸까, 시이나는 장갑을 꽉 쥐었다.
“내가 장난하는 것 같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 그녀는 허리를 굽혀 여명과 눈을 마주했다.
“결투는 그나마 신사적인 해결법이라는 걸 알도록. 거부한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걸맞은 대응? 어떻게 하실 건데요?”
옆에 있던 네티가 묻자, 시이나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를 거다.”
“…예?”
뭔 소리야? 시이나는 얼떨떨해하는 네티를 보며 설명을 이었다.
“성국에는 목소리를 크게 키우는 축복이 있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등교 중인 학생들은 물론이고, 1학년 기숙사까지 목소리를 퍼트릴 수 있다.”
설마? 여명이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기 무섭게, 그녀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었다.
“천여명, 내가 지금 약속대로 아이를 지웠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치면… 넌 어떻게 될까?”
주륵, 기겁한 네티의 입가로 콜라가 흘러내렸다. 여명은 간신히 경악을 참고 물었다.
“…성기사가 거짓말을 하시겠다고요?”
“나는 총대주교님께 정식으로 거짓말을 허락받았다. 교리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다.”
“….”
이제보니 합리적으로 미친 사람이었군.
여명은 어디 해보라고 말하려다가, 문뜩 자신의 평판을 떠올려봤다.
1학년 모두가 아는 양아치… 멋대로 행동하기 위해 만든 평판이라지만, 선배를 임신시킨 건 전혀 다른 레벨의 문제였다.
잠시 고민한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네티가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요. 왜 이렇게까지 결투하시려는 거예요? 형ㅂ… 아니, 오빠는 선배가 누군지도 몰랐는데요?”
시이나는 여전히 뒷짐을 진채로 대답했다.
“정말 몰라서 묻나?”
“….”
“감히 성녀님의 성체를 멋대로 침범한 죄…. 공개할 수 있었다면 성기사단 전부가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대죄다.”
거기까지 말한 시이나는 여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내가 왜 결투를 신사적인 행동이라고 했는지 알겠지?”
아무리 성녀의 치부를 밝힐 수 없다지만,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여명은 애써 질문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야… 예, 어쩔 수 없죠. 하시죠. 결투.”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시간과 장소는….”
“지금 당장 시작하지. 따라와라, 내가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다.”
일방적으로 선언한 시이나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여명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한숨을 푹 내쉰 뒤, 네티에게 속삭였다.
‘지금 최대한 빨리 가서 성녀나 호아나를 모시고 와.’
‘왜요?’
‘진짜 비밀호위면 뒷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혹시 팔이라도 잘랐는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봐. 괜히 올림피아 예선에 문제 생길 거 아냐.’
여차하면 팔을 잘라버릴 생각이었군요… 뒷말을 삼킨 네티는 반대 방향을 향해 뛰었다.
***
마달 모 하쉬칸.
그는 다섯 신 교단 사제단의 정점에 선 다섯 추기경 중 한 명이자, 유일하게 지구에서 활동하는 추기경이었다.
지구인들에게는 마틴 루터 킹의 목숨을 구한 사제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총알에 관통당한 마틴 루터 킹을 치유하는 사진이 특히나 유명했다.
미국에서 총대주교의 얼굴은 몰라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구에 유독 모르닥님의 신도가 많은 이유가 그의 영향이란 말까지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아무튼, 오랜 시간 지구 각국을 떠돌며 인자함과 미소로 이름을 날린 그는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지구 교구는 저의 담당입니다! 당신께서 그 자리에 앉기 전부터! 그리고 앉은 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백색으로 빛나는 거울이었다. 전파와 마나가 끊기는 지구와 아샤 사이를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는 교단의 신성한 성물.
그 거울 위에 떠오른 검소한 복장의 노인은 쯧, 작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긴급한 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마달.]“긴급? 대체 무엇이 그리도 긴급하기에 강제로 성녀님께 소환령을 내리셨단 말입니까? 추기경의 권리를 무시하고, 심지어 성녀님과 한 약속마저 어길 만큼 중요한 상황입니까?”
마달 추기경의 목소리는 자비로운 사제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신성한 경전 어디에도 이런 법도는-”
그때, 거울 너머의 노인이 추기경의 말을 끊었다.
[잊으셨소? 그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본인의 권리이자 임무요. 추기경.]“….”
[본인에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본인의 자리에 걸맞은 예를 보이시오. 검은 신의 추기경이란 분이 그리 감정을 드러내셔야 되겠소?]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기경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에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참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추기경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충고를 받들겠나이다. 총대주교 예하.”
총대주교라 불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금색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검소한 복장과 전혀 다른, 화려한 잔이었다.
[좋소. 이제 머리도 식힐 겸, 본인의 말에 집중해주시오.]“….”
[다시 말하지만, 본인이 성녀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 건 불가피한 일이었소. 얼마 전, 히라리아에서 정체불명의 신성이 발호했소. 마탑은 고의적으로 그 흔적을 묵살하고 있고.]“…그래서 성녀님입니까?”
[맞소. 모든 건 그녀가 자신의 예지를 허투루 낭비한 탓이오. 그러니 성녀가 직접 가서 정체를 밝히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소?]“신들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본인과 사제단의 뜻이오.]마달은 한층 더 고개를 숙였다. 자칫하면 불충한 표정을 보일지도 몰랐으니까.
[추가로, 세간에 떠도는 불결한 소문 또한 하나의 이유요.]“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소문에 불과합니다. 성녀님은 그런 천박한 소문과 달리 지구에서 만주와 시카고를 구했….”
추기경은 예전부터 준비한 핑계를 입에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총대주교가 그의 말을 끊었다.
[성물지기가, 시카고에서 정체불명의 지구인에게 성물을 건넸소.]“….”
[그것도 다른 성물도 아니고 단죄의 빛을… 믿겨지시오? 현 성기사단 단장이 직접 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소!]쾅! 총대주교가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제단은 바보가 아니오. 나는 그가 세간에 알려진 가짜 호위라고 확신하고 있소. 그리고 여기서 지구의 속담을 빌리자면… 연기가 있는 곳에 불이 있는 법. 여지가 있었으니 성녀에게 그런 소문이 붙는 것 아니겠소.]“그래서… 시이나에게 멋대로 명령을 내리신 겁니까?”
[그렇소. 본인이 추기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게 가장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오. 추기경도 잘 알지 않소? 그녀는 성기사단이 아닌 교단 그 자체에 충성하는 거의 유일한 성기사라는 걸.]교단 그 자체가 아니라, 사제단이겠지. 그렇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를 성녀의 비밀호위로 뽑은 거고.
속으로 생각을 삼킨 마달 추기경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귀환 명령을 취소해주십시오.”
[불가하오.]“히라리아 탐사는 나중에, 성녀님이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다릅니다. 종말 교단이 지구에 돌아다니는 판인데, 성녀님이 성도로 돌아가시면… 수억 지구의 신도들이 마음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수억 지구 신도. 그건 총대주교를 움직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어였다.
그리고 그 단어가 먹힌 걸까? 총대주교는 잠시 움찔, 눈살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호주와 모스크바에서 아야톨라가 나타났을 때는 성녀가 없었음에도 아무 문제 없었잖소.]“그거야, 모스크바 사태를 막은 당사자가 성검이고, 성녀님 또한 지구에 계셨으니까 그랬던 겁니다. 당장 호주에서 아야톨라를 쓰러트린 빨갱이가 나타난 뒤로 아샤의 빨갱이들이 얼마나 기세등등하게….”
[그만!]아샤 빨갱이들의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 총대주교는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추기경의 의사는 본인도 잘 알겠소. 하지만 본인과 사제단의 의지는 확고하오. 이것은 안전의 문제이기도 하오!]“하다 못해 올림피아라도 참가하게 해주심이… 아야톨라가 올림피아를 덮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리고 다시 말하건대, 성녀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고, 그대는 성녀의 대부가 아니오. 교단의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더 해서는 아니 되는 법! 추기경은 그 이상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이상함을 느낀 추기경은 그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윽고 성물의 빛이 꺼지는 순간.
그는 당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지구인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연예인, 기업가, 그리고… 정치인.
거기다 직접 성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정치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
이상하다.
1학년 섬을 벗어나는 시이나 선배의 뒤통수를 보면서, 여명은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눈앞의 선배가 어젯밤 성녀의 처소에 침입한 장본인인 거 같아서?
아니면 더럽고 치사한 수로 그를 끌어내서?
아니, 둘 다 아니었다.
그가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은 성녀에 대한 그녀의 태도였다.
성녀의 몸을 ‘멋대로 침범했다’ 니? 그가 봐온 모든 성기사들, 심지어 죽은 성기사조차 성녀에게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성녀를 잘 부탁한다고 했으면 했지. 한데 저 선배는 어째서…
이질감이 의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순간, 시이나가 걸음을 멈췄다.
동아리 건물 바로 뒤편, 초인들을 위한 구형 훈련실.
등교 시간임에도 학생들이 넘치는 신형 훈련실과 달리 구형 훈련실에는 뽀얀 먼지만이 쌓여 있었다.
“여기서 싸우실 겁니까?”
“왜, 문제 있나?”
끼익-시이나는 낡은 문을 열며 물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꽤 넓은 공간이 둘을 반겼다. 먼지 쌓인 바깥 풍경과 달리 내부는 최근까지 누군가 사용한 듯 비교적 깔끔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래된 헬스장 같다고 해야 할까.
시이나는 벽면에 장식된 연습용 가검을 뽑으며 말했다.
“대결 방식은 무제한으로 하겠다.”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그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실력을 마음껏 뽐내는 게 좋을 거다.”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는, 무슨. 여명은 애써 시큰둥한 태도를 삼키며 손날을 펼쳤다.
“…검을 쓰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손도 잘 씁니다.”
“….”
시이나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일자로 굳어지는 입가, 그녀는 똑바로 검을 들고 여명을 겨눴다.
날카로운 기세가 그녀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일반적인 학생 수준은 아니었다.
서로 한 걸음, 거리를 좁힌다. 두 걸음, 거리를 가늠한다.
세 걸음, 격돌까지 한 걸음 남은 순간, 시이나가 도발을 날렸다.
“호아나님도 늙으셨군. 이런 자를 위해 명예를 거시다니.”
“….”
“성기사단의 치욕이다.”
너무나 뻔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성기사의 입에서는 나와선 안 되는 도발이기도 했다.
아니, 요즘 것들은 왜 이렇게 예의가 없는 거지?
확 짜증을 느낀 여명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선배.”
“…뭐지?”
“다른 건 몰라도, 저 여자라고 안 때리는 거 없습니다. 성녀도 저한테 위아래로 맞았어요. 그러니까….”
“…?”
그게 무슨-시이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금니 꽉 깨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