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82)
을 위한 세계는 없다-482화(482/817)
EP.482 이변을 위한 예선전은 없다. (8)
* * *
***
멱살을 붙잡힌 시이나의 몸이 와락-위로 떠 올랐다.
뭐지? 뭐가 날 붙잡은 거야?
당황한 그녀는 천장과 충돌한 뒤에야 염동력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쾅! 낡은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는 가운데, 척추가 찌르르 울리며 기침이 튀어나왔다.
쿨럭, 이런 미친.
시이나는 다음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명은 그런 노력을 비웃듯 곧바로 염동력을 회수해버렸다.
“…!”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한 시이나는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뒤 검을 꽉 붙잡았다.
대체 어떻게 마법을 쓴 거냐-같은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여명이 이미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시이나는 마음속으로 신을 찾으며 검술을 펼쳤다.
손에 들린 가검이 축복을 머금고, 빛과 함께 먼지를 갈랐다. 목표는 다가오는 여명의 얼굴.
첫 충돌의 순간, 빗나간다. 예측한 바였다. 그녀는 숨을 참고 척추와 팔에 힘을 줬다.
성기사단의 검술이 그녀의 손을 따라 펼쳐졌다. 빠르고 굳건하게, 접근한 상대를 철저히 압박하는 전통 검술.
빗나간다. 그래, 1학년 중 최고라면 이 정도는 피해야지.
시이나는 계속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좁혔다. 마법을 쏘아내는 대신 접근전을 선택한 여명의 오만함을 심판하려는 것처럼.
더 가까이,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이윽고, 그녀의 검이 여명의 얼굴에 닿기 직전.
그가 시이나의 검을 붙잡았다. 무슨 캐치볼을 붙잡는 것처럼 가볍게, 한 손으로.
“…어?”
시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무리 가검이라지만, 마나가 담긴 이상 웬만한 칼보다 날카로울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의문보다 한발 빠르게 여명의 발이 그녀의 복부에 꽂혔다.
!
시이나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쾅 – ! 벽과 충돌한 그녀가 기절하지 않은 건, 그동안 남몰래 비각술에 대해 연구한 덕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비각술의 타점을 피해 위력을 줄인 것인데…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짐승 같은 그르렁거림이었다.
“너, 너… 끄, 그극… 감… 히….”
시이나가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손에 들린 검을 그녀의 발치로 집어 던졌다.
상대가 놓친 검을 돌려주는 지극히 대련다운 모습이었지만, 시이나가 느낀 감정은 조롱뿐이었다.
수치심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배에 남아있는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다시 검을 집었다.
시이나는 느긋하게 다가오는 여명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차이가 날 리가 없어.
상대가 아무리 1학년 톱이라지만, 그녀 또한 2학년에서 손에 꼽을 강자였다.
갑자기 학교를 그만둔 아서스를 제외하면, 2학년 중에서 그녀를 상대로 압승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뭔가 비겁한 수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상대는 1학년 중에서 가장 추악한 남자가 아닌가. 성녀님을 노리는 악종.
분명 강화 마도구 같은 걸 몸에 숨기고 있는 게—
그녀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질 때쯤, 여명이 팔짱을 꼈다.
“계속하실 겁니까?”
“….”
“호아나님과 저를 모욕한 걸 사과하시면,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여명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시이나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네놈이 성녀님의 뺨을 때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뭐? 아래도 때려?”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성녀님을 향한 너의 역겨운 망상!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다! 그 어떤 성기사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상식적인 지적이라? 아니면 그보다 더한 걸 이미 저지른 몸이라서?
물론, 둘 다였다.
할 말을 잃은 그가 볼을 긁적인 순간, 시아나는 검을 높게 들고 기도를 외웠다.
“적색의 레독스시여, 당신의 검이 도전하나이다.”
짧은 기도를 따라 투쟁의 붉은 신이 응답하셨다. 신께서 그녀의 분노에 호응하시는 걸까? 검과 몸에 실리는 축복이 평소보다 한층 더 묵직했다.
그녀가 벌인 수작질을 알고 계실 텐데도 이만한 축복이라니.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순식간에 자신감을 되찾은 그녀는 그대로 여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였다.
여명은 차가운 눈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곧은 자세와 빠른 속도, 그리고 축복.
때때로 적에게 배운다는 격언은 그에게 있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순간에도 축복을 응용하는 그녀의 마나를 쫓다가, 검이 다가온 순간 슬쩍 몸을 틀었다.
환골탈태 덕분인가? 축복의 잔향이 피부 위로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이나는 조금 전 굴욕을 갚아 주려는 듯 미친 듯 검을 휘둘렀다. 초인의 무술에 축복이 더해진 공격이 매섭게 여명의 몸을 노렸다.
제대로 맞는다면 사지가 깍두기처럼 잘려 나갈 만한 위력이었다.
대련에서 쓸만한 검술은 아니었고, 실제로 시이나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대련이란 단어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가능하면 여기서 이 더러운 오물을 끝장낸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그녀의 공격은 닿지 않는다. 정확히는, 닿지 못했다.
발차기에 막히고, 손날에 막히고, 틈틈이 날아오는 얼음 바늘에 또 한 번 막혔으니까.
하필 시간 끌기라니-계획을 눈치챈 건가?
시이나는 남은 시간을 가늠해봤다. 이기건 지건, 승부를 내야 할 시간이었다.
“이 겁쟁이 자식! 그만 도망치고 당당히 싸워!”
초조해진 그녀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리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도발했다.
“호아나에게 사과하라고 했지? 웃기지 마라. 네가 무슨 말을 해도, 호아나를 향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
“성기사의 본질은 군인. 전대 성녀님을 지키지도, 그렇다고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한 군인에게 보낼 존중은 없다.”
다음 순간, 촥! 그녀의 검이 흔들리는 여명의 볼을 길게 베었다.
도발이 통한 것일까? 그래, 그녀의 도발은 너무나 잘 통했다.
다음 순간, 여명의 기세가 변했다.
“…?”
이건 뭐지? 그녀는 어느 순간 옆구리를 후려 차는 발차기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비각술이 아닌데.
생각이 끝나는 동시에, 시이나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는 다음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여명은 그녀의 검을 붙잡고, 그대로 명치에 무릎을 쑤셔 넣었다.
“!”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힌 탓이었다. 시아나는 당장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여명은 그녀의 팔과 멱살을 붙잡았다.
직후, 하늘과 땅이 바뀌었다.
유도에서 흔히 말하는 업어치기였다. 아샤에서도 비슷한 기술이 있었기에 시이나는 자신이 무슨 기술에 당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 일격으로 자신이 전투불능이 될 거라는 사실도.
콰앙!!!
직후, 시이나의 몸이 훈련소 바닥과 충돌했다.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바닥이 움푹 파이며 주변 땅이 부르르 떨렸다.
안 돼.
어긋난 척추에서 올라온 충격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건 신음과 핏물뿐이었다.
“커헉.”
말 대신 튀어나온 신음, 여명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짝! 시이나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끝났습니다.”
뺨을 후려친 여명이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시이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축복을 받고도 졌다. 그것도 단 일격에.
하지만 싸움은 손발로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뚝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 니, 끄, 끝나지 않았다…”
“….”
“너, 너는… 서, 성녀님을… 모욕한… 죄를, 치르… 고… 그, 그분은… 성도로 도, 돌아가실….”
“예, 예.”
여명은 시큰둥한 태도로 물약을 꺼냈다. 그가 물약 뚜겅을 따자마자, 시이나가 발작적으로 도발을 날렸다.
“이, 이… 하, 한국 같은 쓰레기… 국가… 추, 출신이….”
아쉽지만 별 도발은 안 됐다. 왜냐면-
“뭐, 한국은 쓰레기 국가 맞죠. 동의합니다.”
“미, 미친… 새끼… 가….”
시이나는 다가오는 물약병을 보며 도망치기 위해 꿈틀거리다가 척추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또 다른 도발을 꺼냈다.
“이, 으, 음탕한… 차, 창놈…!”
“….”
“너, 너는… 결코… 서, 성녀님을… 얻을… 수… 없… 독사… 같은…”
“…찢어진 입술이랑 볼로 그렇게 말하면 많이 아프실 텐데.”
그렇게 말한 여명은 쪼르르-그녀의 얼굴에 물약을 부었다. 그녀는 물약을 맞으면서도 지껄였다.
“세티, 그, 창녀 같은 계, 집도-”
그래도 이번에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콰직! 여명이 그녀의 목을 짓밟아 버렸으니까.
“진짜 왜 이러실까… 팔다리 하나쯤은 잘려도 괜찮아서 그래요?”
“끄, 끄윽…!”
시아나는 여명의 발목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제 막 재생이 시작된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저 많이 참고 있습니다. 적당히 하세요.”
여명이 발을 치우기 무섭게,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자비로운 척하지 마라, 이 역겨운 놈! 네놈이 성녀님을 노리고 있는 걸 모를 줄 알고?”
그래, 이렇게 꽉 막힌 종교인이랑 만날 때도 됐지. 그동안 너무 좋은 사람만 만났어.
여명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물약을 부으려는데, 시아나가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다.
“홍세티, 그 사갈 같은 년을 이용해서 성녀님을 노릴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네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했다! 성녀님은 여자를 좋아하니까!”
“….”
“그리고 이제, 성녀님은 성도로 돌아가실 거다! 너 같은 쓰레기나 호아나가 아닌, 진짜 그분을 모실 사제단이 있는 곳으로!”
이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오네. 여명은 그냥 그녀의 얼굴에 한 번 더 물약을 부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직후, 이런 말을 꺼냈다.
“성녀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이성애자예요.”
“…뭐?”
“세티도 좋아하긴 하는데, 어… 성적인 의미는 아니고, 음… 아무튼, 절 더 좋아해요.”
“감히…! 그 독사 같은 혀로 성녀님을 더럽히지 마라…!”
진심으로 화가 난 건지, 시아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여명의 다리를 때렸다.
“…뭐, 혀로 더럽히긴 했죠.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한방 먹였네. 여명이 한 번 더 그녀의 신경을 긁는 사이.
시아나가 준비한 마지막 계략이 그의 감각을 찔렀다.
***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
동아리실 건물 방향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훈련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스물이상.
지금 이 꼴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놀란 여명이 시이나를 내려다보자마자, 그녀가 씨익 웃었다.
“…왔군.”
“….”
“내, 다음… 올림피아 예선 상대는… 한국인이지. 내가 왜, 등굣길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는지, 알겠나?”
“…예, 좀 알겠네요.”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학생끼리 임신 운운하는 것보다, 허가되지 않은 대련으로 선배를 두들겨 팬 게 더 큰 죄였으니까.
“한국인 선배를 위해… 다른 선배를 멋대로 두들겨 팼다… 이게 알려지면, 한국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너도 꽤 큰 징계를 먹을 거다. 어쩌면 올림피아에 참가 금지가 내려질 수도 있겠지….”
“….”
“내가 이겼다.”
여명은 말없이 시이나를 내려다봤다.
성기사가 이런 계략을 짰다는 놀라움은 있었지만, 의외로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고작 이 정도 음모로 뒤통수가 얼얼하기엔, 그가 겪어온 수라장이 너무 많았다.
“머리 좀 쓰셨네요.”
“….”
“근데… 왜 이렇게까지 절 조지려고 하신 거죠?”
“넌, 성녀님의… 적… 이니까…!”
그녀의 눈에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적의가 느껴졌다. 그걸 본 여명은 오해였다고 설득하는 대신, 그냥 휴대폰을 꺼냈다.
어쩌면 이건 그가 성녀의 사랑을 받아준 시점에서 정해진 일일지도 몰랐다.
어떤 이유, 어떤 스토리, 어떤 감정으로 성녀와 만났건 간에… 그가 교단에게서 성녀를 빼앗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쩌면 변경백도 그것 때문에 전대 성녀님을 구하러 가지 못한 게 아닐까?
작은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저장된 휴대폰 번호를 꾹 눌렀다.
휴대폰 너머에서 샹송인 듯한 통화음이 잠시 이어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여명?]“뭐 하나 부탁 드릴 게 있어서요. 혹시 지금 아카데미에 계십니까?”
[도움이라, 마탑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카데미에서? 좋아. 난 지금 아카데미에 있네. 무슨 도움을 원하나? 싸움?]“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제가 선배 하나를 두들겨 팼거든요.”
[….]“근데 이게 사실 선배의 함정이라서… 지금 제가 있는 곳에 오셔서 입회인인 척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보고 정식 대련이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해달란 소린가?]“예.”
여명이 단박에 대답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시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지금… 장난, 같…냐?”
그러나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건, 여명은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의외로 빨리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그 정도는 도와주지. 지금 어디라고?]“동아리 건물 뒤편에 있는 구 훈련실… 음, 그냥 위치 정보를 보내겠습니다.”
픽, 간단하게 정보를 보낸 여명은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시아나가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계속 그를 바라보길 잠시.
“나중에 성녀한테 총 맞아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
여명이 그녀를 보며 쯧쯧 혀를 찰 때쯤, 입구 반대편 벽이 붉게 물들었다.
곧, 치이익-! 벽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벽 너머에서 등장한 건…
“…오귀스트? 10강?”
시이나의 황당한 목소리와 동시에, 낡은 훈련실의 문이 열리며 그녀의 증인이 되어줄 학생들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