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87)
을 위한 세계는 없다-487화(487/817)
EP.487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5)
* * *
***
영화나 드라마의 표현과 달리, 모든 은밀한 거래가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건 아니다.
국가 단위의 치안 조직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뒷골목이나 하수도보다 잘 차려진 고급 식당이 더 안전한 거래 장소인 법.
최고급 식당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정치인들은 경찰의 손아귀 바깥에 있지만, 뒷골목 마약쟁이들은 감옥에 처박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장만은 오랜만에 최고급 식당을 찾았다.
카츠라. 인천에서 손꼽히는 일식집.
맥아더 동상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한 이 일식집을 찾은 건 맛보다는 보안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쇼. 어르신, 몇 번 룸으로 예약하셨습니까?”
일식집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목소리의 직원이 그를 반겼다. 장만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예약된 방 번호부터 불렀다.
“3번.”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룸으로 안내했고, 룸에 도착한 장만은 곧바로 지갑을 꺼내 직원에게 꽤 묵직한 양의 팁을 건넸다.
당연하게도 감사의 인사는 없었다. 비밀보장을 위한 당연한 대가였으니까.
아무튼, 룸에 앉은 장만은 조용히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걸 깨달은 그는 조용히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 어르신들! 관광 오신 것 같은데, 이것 좀 보고 가시죠? 싸게 드리겠습니다!
창문 밖, 번화가 상인들의 목소리가 음표처럼 그의 귀를 간질였다. 흥정하는 목소리는 욕망을 노래하는 음악이요, 돈을 향한 옹알이였다.
돈, 돈, 돈… 그래, 한때는 그의 전부였던 것.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이었다. 군대라는 권력.
하지만 소련으로 도망간 아버지 덕분에 빨갱이 낙인이 찍힌 그는 무슨 짓을 해도 권력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는 돈에 매달렸다.
밀수꾼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고, 팔 수 있는 뭐든 다 팔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딱 하나의 선만큼은 넘을 수 없었…
그때, 문 너머에서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장만이 초인은 아니었지만, 이 방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상념을 끊은 장만은 그대로 자세를 다잡았다.
직후, 그를 안내했던 직원이 문을 열었다.
“어르신, 예정보다 한 분이 더 오셨는데… 확인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직원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명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마스크로 주둥이를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탁한 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본 장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식사는 1인분 추가해서 30분 뒤에 가져다주게.”
“예, 알겠습니다.”
직원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았다. 두 금발 청년은 고급스러운 방을 두리번거리며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그…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그냥 어르신이라고 부르게.”
장만은 둘에게 차를 따라주며 대답했다. 마스크를 벗기기 위한 수작이었고, 역시나 녀석들은 찻잔을 받자마자 마스크를 벗었다.
장만은 두 녀석의 얼굴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가, 문뜩 녀석들의 이빨을 확인했다.
‘날카롭다…?’
평범한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이빨. 장만이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는 가운데, 녀석들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저, 어르신. 형님 대신 저희가 와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좀 바쁜 일이 생기셔서….”
“괜찮네. 누가 오건 거래만 잘 풀리면 되는 거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 뭐냐… 오늘 거래 내용을 좀 추가해도 되겠습니까?”
“거래를 추가해? 그게 무슨 말인가?”
장만이 미간을 구기자, 녀석 중 하나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쓰읍, 저, 그,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어르신께 의뢰를 하나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의뢰?”
“예, 인천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야 해서요. 그, 모카 딕이라고… 엄청 유명한 밀수꾼입니다.”
장만은 차를 마시는 척, 표정을 숨겼다.
“모카 딕? 이상한 이름이군. 그 양반은 왜 찾는 건가?”
“그게… 그, 윗선에서 찾으라고만 했지, 저희도 잘 모릅니다. 아, 그래도 확실한 건, 찾는 걸 도와주시면 10억, 아니, 20억까지도 추가로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윗선의 명령이라. 윗선이 있는 걸 이따위로 흘리는 걸 보면, 녀석들은 아마추어가 분명했다.
‘…거기다 20억?’
저번에 만난 이 녀석들의 ‘형님’도 그렇고,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요즘 활동이 뜸해진 푸른 쥐의 영역을 침범하는 신흥 정보 회사인 척하고 있지만… 정보 회사라는 게 무슨 치킨집처럼 간단히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은가.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장만은 태연하게 말했다.
“20억이라… 여러모로 괜찮은 의뢰로군. 그건 내가 따로 힘써 보겠네.”
“어이구, 감사합니다. 어르신.”
“됐네. 어차피 돈이 걸린 일 아닌가. 우선은 오늘 거래부터 끝내지.”
장만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녀석이 ‘서울대’ 자켓 속에서 작은 USB를 꺼내 내밀었다.
“의뢰하신 여의도 의원님들이 들락거리는 식당 관련 자료와 사진입니다.”
“자유당과 노동당 상관없이 찍었겠지?”
“아이고, 물론입니다.”
장만은 곧바로 노트북을 꺼내 자료를 확인해봤다. USB 내부에는 세티의 아버지인 홍용완을 비롯한 유명 의원들이 식당을 들락거리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확실한 자료였다. 장만은 노트북을 접고 USB를 챙긴 뒤, 녀석들에게 돈 가방을 내밀었다.
“확인했네. 돈 받게.”
“감사합니다.”
금발 녀석은 가방을 받으면서도 ‘고작 식당에 들어가는 사진을 왜 돈 주고 사지’ 란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장만은 굳이 고급 식당이야말로 은밀한 거래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발 녀석이 물었다.
“어르신, 식사 안 하십니까?”
“좋은 계획이 생각나서 말일세. 계산은 내가 해둘 테니 내 몫까지 자네들이 먹어주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장만은 그대로 룸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 발을 떼자마자,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녀석의 휴대폰이 띠리리-울렸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휴대폰을 받은 녀석을 본 장만의 본능이 경고했다.
‘알아챘군.’
천천히 그를 향해 움직이는 시선, 작아지는 숨소리, 그리고 축소되는 살벌한 동공까지.
“잠깐, 당신-”
녀석이 무어라 지껄이려는 순간, 장만은 곧바로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집어 던졌다.
퍼억!
불의의 일격을 맞은 녀석은 잠깐 움찔했다. 2초. 거의 2초가 지난 뒤에야 녀석은 흉측한 이를 드러내며 장만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장만은 이미 창문 너머로 몸을 던진 뒤였다.
쨍그랑! 고급 창문을 깨부순 장만은 그대로 2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도박이었다. 두꺼운 옷으로 몸을 보호하긴 했지만, 유리 조각이 몸에 박히면 바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혹은 유리가 고급인 덕분에 그는 별 상처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오랜만에 격하게 움직인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장만은 억지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쿵!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창문에서 뛰어내린 둘… 정확히는 탁한 금색의 늑대 수인 두 마리가 보였다.
‘어쩐지 이빨이 이상하더라니.’
수인이라니. 장만은 욕지거리를 참으며 권총을 꺼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인천 한복판에서 총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초인이 아닌 그가 수인을 상대하려면 이것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돌격소총 한 자루라도 있었다면.
입술에 꽉 힘을 준 장만은 아쉬운 대로 두 수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밀수꾼 시절의 실력이 어디간 건 아닌지, 권총은 그대로 수인놈들의 무릎과 발목에 명중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잠시 움찔거렸을 뿐, 곧바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수인….”
산 넘어 산이군. 장만이 아찔함을 느끼는 사이, 수인 놈 중 하나가 소리 질렀다.
“모카 딕이 코 앞에 있었다니! 하하하! 운수 좋은 날이네!! 어르신!! 고맙습니다!!!”
장만은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죽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장만이 몇 걸음 더 걷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판 앞에서 호떡을 사 먹고 있던 노인… 그는 다가오는 수인과 장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당신이 모카 딕이오?”
“….”
인천에서 날 찾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고?
장만이 그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노인의 옆에 있던 중년인이 뚜둑-그의 권총을 힘으로 빼앗았다.
“장만, 맞습니까? 본인이 맞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이름까지?
“당신들은 대체 누구…?”
“지나가던 기사입니다.”
시큰둥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노인이 그를 타박했다.
“어허, 산초, 지구라고 해서 기사의 멋을 포기하다니. 이런 우연 앞에서는 그만한 멋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가?”
“아니, 이틀 동안 인천을 헤맸는데 멋 부릴 기운이 어딨-”
산초라 불린 남자가 뭐라고 지껄이건, 노 기사는 멋진 목소리로 장만에게 말했다.
“반갑소이다. 나는 세티의 연인을 찾아 인천까지 흘러든 기사라오. 당신이 그의 대부가 맞소?”
장만은 황당함과 우연을 향한 감탄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꺄아아! 놀란 시민들의 비명 소리가 귀를 울리고, 가까이 다가온 수인들의 이빨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노 기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멋진 우연이로군. 기념으로 술 한잔 사고 싶은데,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후두둑-말을 끝낸 그의 뒤편으로 잘린 수인의 팔다리가 깔끔하게 추락했다. 피가 떨어질 위치까지 계산해서 휘두른 검술.
그것을 알아본 장만은 멍하니 비명을 지르는 수인들을 내려다보다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물론,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내어드리리다.”
***
쇠미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푹신한 침대와 이불의 감촉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으나, 어깨가 찌뿌둥했다.
우선 크게 기지개를 켠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커다란 창문과 그 너머에서 반짝이는 달이었다.
밤인가?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설마 세티의 말처럼 한 달 내내 잠들어있던 건 아니겠지.
침대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려던 그녀는 문뜩, 이상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달빛에 비해 그림자가 너무 진하지 않나?
의아함과 함께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한 존재와 눈을 마주쳤다. 달빛이 피해 가는 기다란 그림자 깊은 곳, 그 너머에 있는 존재.
『벌써 날 볼 수 있게 되다니,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나무의 새싹… 아니, 셋째야.』
거대한 어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셋째? 누구? 저요?
쇠미리는 고개를 돌린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여명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수축한 폐도, 벌린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워 말거라. 넌 충분히 잘해주고 있으니.』
어둠은 그렇게 속삭이며 거대한 팔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었다.
잠시 후, 쓰다듬는 걸 멈춘 손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를 붙잡았다.
『보거라, 정직한 너와 달리 다른 것들은 너도나도 꼼수를 쓰느라 바쁘지 않느냐.』
그 거대한 손에 들린 건 비전 유물 속에서 봤던 촉수 덩어리였다.
저게 언제 내 머리에 붙어있었지? 쇠미리가 작은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더 큰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어둠에 붙잡힌 촉수 덩어리의 눈동자가 살려달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꿈틀거리고, 밤 그 자체가 일렁거리며 그녀가 보는 모든 것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녀는 밤에 홀로 버려진 씨앗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콰직.
그것으로 끝이었다. 촉수 덩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명도, 고함도 없는 최후였다.
어둠이 소리 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쇠미리는 몸이 정지되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움직일 수 있었다면 추하게 팔다리를 벌벌 떨었을 테니까.
『겁먹지 말라고 했거늘… 어쩌면 내가 새싹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란 걸지도 모르겠구나.』
“….”
『하지만 나의 간택자가 널 참으로 좋아하니, 어쩌겠느냐? 이렇게 된 거, 이번 공물은 네가 바친 걸로 치겠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쇠미리는 거절할 수 없었다. 어둠이 그녀의 이마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공물의 대가를 내려주마. 잠든 척하고 있거라. 간택자가 지금 옆 방에서 눈을 떴으니, 지금을 놓치면 셋째가 아니라 여섯째가 될지도 모른단다.』
뜻 모를 말을 끝으로, 어둠은 사라졌다. 곧 달빛이 다시 차오르며 정상적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쇠미리는 멍하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끼익-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녀를 찾았다. 여명이었다.
“미리? 일어났어?”
쇠미리는 그제야 어렴풋이 셋째와 여섯째의 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잠든 척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