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95)
을 위한 세계는 없다-495화(495/817)
EP.495 애국자의 미덕 (7)
* * *
***
“….”
뒷목을 붙잡고 쓰러진 용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주둥이 밖으로 늘어진 혀를 본 여명과 시스는 말을 잃었다.
당황한 여명이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떠올릴 때쯤.
“커억-!”
등 뒤에서 목 막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야마우치라 불린 초인이 공산당 위원장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 뒤였다.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덤비십쇼.”
여명이 검을 뽑아 들며 묻자, 야마우치는 양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아니,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용을 쓰러트린 사람과 싸울 순 없지.”
“….”
“이 빨갱이 친구는 시끄러워질 거 같아서 잠깐 제압했네.”
그렇게 말한 야마우치는 요원 복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확실히, 한국 편은 아닌 거 같군. 반공에 미친 놈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주가시빌리를 키울 리 없으니.”
“….”
탁탁,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보스 때문에 상황이 좀 이상해진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후우, 하지만 이해해 주게. 우리 보스가 한국에게 워낙 시달리다 보니 정신이 좀….”
말끝을 흐린 그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충성스러운 부하가 할 만한 손짓은 아니었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는 약간의 충성이 담겨있었다.
“그래도 자네만 좋다면 이대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데, 괜찮겠나?”
“대화만이라면요.”
“고맙네. 아량이 넓군.”
거기까지 말한 야마우치는 이어폰형 무전기를 만지작거렸다.
“통신 좀 써도 될까? 사람을 좀 불러야 할 것 같아서.”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만에 하나 보안 요원을 불러 싸울 생각이라면… 후회하실 겁니다.”
여명은 말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기절한 용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리고 검을 겨눴다.
당장이라도 용의 눈을 후벼팔 수 있는 모습. 그러나 야마우치는 어디 찌를 테면 찌르라는 듯 통신을 연결했다.
“여기는 가디언… 심부름… 레어에… 오늘 아침에 잡은… 아, 그리고….”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대뜸 여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맛이 있나?”
“…뭐요?”
“아이스크림 말이야. 우리 기업이 꽤 잘 만들거든. 최고의 재료로 만듭니다. 믿음의 스미토모 아이스크림. 모르나?”
“….”
이 사람도 용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인가? 여명이 미간을 주무르는 사이, 시스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대답했다.
“전 녹차 맛이요.”
“아가씨는 녹차…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시키지.”
직후, 더 통신으로 몇 마디 더 지시를 내린 그는 그대로 무전을 끊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동시에 긴장감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어쩌면 최대한 긴장감을 줄이기 위한 그만의 방법일지도.
어쨌거나, 그가 통신을 마치자 골골거리는 용과 빨갱이의 신음 소리만이 지하 레어를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여명은 그 어색한 정적을 떨쳐내기 위해 물었다.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으시는군요. 보스가 기절했는데.”
“용과 함께 지내다 보면 간이 커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 보니.”
“…익숙하다고요?”
여명이 눈썹을 들어 올리자마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과로, 과음, 과식, 그리고 수면 부족은 인간과 용을 가리지 않지.”
“….”
“그나마 용이라 실신으로 끝난 걸세. 보스가 평범한 중년 남자였으면 옛날에 죽었을걸? 옆에서 보다 보면 용케도 살아있다 싶어.”
어딘가 현실적인 동시에, 익숙한 푸념이었다. 청소부 형들도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며 술을 줄이곤 했으니까.
문제는 상대가 용이라는 점이었다.
“이 덩치로 과음에 과식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처먹는 걸까요? 라날만큼?”
시스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여명이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오르세 라날의 건강을 확인해야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익숙한 보안요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총알이 쏟아질까 마나를 끌어 올린 여명의 걱정과 달리, 보안요원들은 무장다운 무장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 대신, 팔다리가 묶인 빨갱이 세 명과… 스미토모 그룹 인장이 찍힌 캠핑 의자, 그리고 작은 이동식 냉장고를 통째로 끌고 왔다.
진짜 아이스크림이네.
맥이 탁 풀린 여명이 검을 놓칠 뻔하건 말건, 보안요원들은 3대장인가 뭔가 하는 빨갱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척척, 의자와 냉장고를 세팅했다.
세팅은 순식간에 끝났다. 곧 야마우치가 보안요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일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 가서 대기해.”
보안요원들은 여명과 용을 힐끗거렸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그들은 경례를 올린 뒤 군말 없이 엘리베이터로 돌아갔다.
“와서 앉게.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요원들이 떠난 걸 확인한 야마우치는 여명과 시스에게 손짓한 뒤, 냉장고를 열어 작은 아이스크림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명은 이게 어떤 함정이나 수작질이라고 믿고 싶었으나, 야마우치가 내민 아이스크림은 진짜였다.
시스의 녹차 맛, 그리고 여명은…
“…김치 맛?”
“한국인들을 노리고 만든 맛이지. 판매량은 별로지만, 맛은 보증하네.”
이러니 한국 진출을 못 했지. 여명이 슬그머니 아이스크림을 인벤토리에 넣는 사이, 야마우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뭐, 아무튼… 다시 대화로 돌아가서, 우선 내 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야마우치 켄. 자랑스러운 스미토모 그룹의 첫 번째 가디언일세.”
“가디언?”
“용의 둥지를 지키는 생물에서 따왔다는데, 뭐 그냥 경비병이지.”
“….”
이런 부분은 또 용 같네. 여명은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야마우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 회사가 왜 두 사람을 이곳으로 모셔 왔는지 설명해도 되겠나?”
“…아뇨, 용에 대한 것부터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명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용을 보며 말하자, 야마우치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 해줄 수야 있지만, 그쪽이 좀 곤란할 텐데.”
“…?”
“그 이야기를 하려면 보스의 개인적인 취향을 언급해야 하거든.”
개인적인 취향? 그 단어를 듣자마자 여명은 문뜩 마하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에게 성욕을 느끼는 정신 나간 이상성욕 용이 있다….’
겸사겸사, 오르세 라날이 했던 말도.
‘인간 모습으로 하는 게 좋아서 변신하는 이상성욕 검은 용 영감.’
그제야 그 ‘개인적인 취향’이 뭔지 깨달은 여명은 의자 자리를 바꿨다.
기절한 용과 시스 사이, 처제를 보호할 수 있는 자리로.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시스와 달리, 야마우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여명을 바라봤다.
“이미 알고 있군?”
“…예.”
여명이 처제를 보며 대답하자, 야마우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설명해도 되겠군. 뭐, 젊은 처자도 앞에 있으니 내 최대한 전체이용가로 설명하겠네.”
“최대한 짧게, 요약 부탁드립니다.”
“그건… 노력해 보지.”
푹-시스가 녹차 아이스크림에 수저를 꽂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
개성 차원문이 열리고, 소련과 미국이 차원문을 나눠 점령한 직후,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건 한반도가 아닌 일본이었다.
차원문을 두고 소련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공산 진영에게 가장 방해가 될 나라가 바로 일본인 까닭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군사기지이자 반공의 최전선.
스탈린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양반이 아니었다. 그는 여느 사회주의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을 적극 이용했다.
일본 제국 시절부터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일본이었으나, 스탈린의 마수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때마침 미국이 2차대전의 전범들을 적극 친미파로 기용한 사실과 맞물려, 일본의 좌우 대립은 국가를 좀먹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의회는 반으로 갈라진 채 서로를 혐오했고, 경찰과 군인조차 서로를 믿지 못하는 혼란의 시대.
알라이 로피는 그런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왔다.
무언가 숭고한 의지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구의 모든 인종들과 해보고 싶었고, 이번에는 황인종 차례였으며, 때마침 가장 가까운 황인종의 나라가 일본이었을 뿐.
하지만 우연이란 언제든 운명으로 이어지는 법.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찾아온 일본에서 운명을 만나게 되었다.
후미코.
지금은 원래 성조차 남지 않은 그녀는 용을 매료 시킬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이자, 야심가였다.
용이 그녀를 위해 자신의 레어를 털어 스미토모 그룹을 인수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래, 용은 사랑 때문에 고향의 집조차 버리고 일본에 정착했다. 그리고 스미토모 그룹 그 자체를 자신의 레어로 만들었다.
어쩌면, 스미토모의 기업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아이였을 지도 모른다.
혼란한 정치의 상황 속에서도 둘은 야심과 사랑으로 기업을 키우고, 일본의 상황을 안정…
“…웃기는 소리!”
야마우치의 말을 끊은 건 토도, 적군 3대장이자 여명과 시스를 납치하려던 택시 운전사였다.
그는 팔다리가 묶인 상황에서도 악을 쓰며 소리쳤다.
“후미코는 악녀였다! 그녀는 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방해했고! 노동자를 불법으로 대량 해고했다! 너희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은 노동자가 몇 명인 줄 아느냐?”
야마우치는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불황을 버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일본 공산당과 노조도 동의한 일이었고.”
“하! 그러면 스미토모 그룹의 창립자와 그 가족들조차 내쫓은 건? 그들의 성과 회사를 빼앗은 것도 최선이었나?”
“그래, 최선이었다. 그들은 2차 대전을 도운 전범이었어. 그들의 추방은 우리 보스가 아니라 미국이 원한 바다.”
“아니, 너희 그룹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겠지! 스미토모 그룹이 기업가와 정치인을 가리지 않고 뇌물과 협박으로 크기를 키웠다는 걸 모든 일본인이 다 안다!”
“….”
야마우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살벌한 눈으로 토도를 노려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우리 그룹은 뇌물과 협박을 밥 먹듯이 사용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게 편해서는 아니었다. 생각해 봐라. 우리가 권력을 쥐기까지, 이 나라는 그런 나라였다.”
“….”
“뇌물이 없으면 공무원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협박이 없으면 너도나도 빼앗기에 바빴다. 그게 이 나라의 룰이었고, 그룹은 그 룰에 맞춰 생존했을 뿐이다.”
“…너희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핑계를 내뱉다니, 어이가 없군.”
“….”
“스미토모 그룹은 이미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어! 지금도 칫솔부터 금융까지 전부 독점하려 들고 있지 않은가!”
이건 또 뭐람. 자본가와 빨갱이의 대화? 아니면 경비원과 납치범의 대화?
어느 쪽이건 심드렁한 여명과 달리, 시스는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마우치는 뚱한 표정으로 기절한 용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건 그쪽 말이 맞아.”
“이 더러운 자본… 뭐?”
“그 말대야. 우리 그룹은 선을 넘었다. 하지만… 이 또한 필요한 일이었다.”
토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말장난이냐?”
“나도 말장난이면 좋겠군.”
거기까지 말한 야마우치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털어 넣은 뒤 다시 여명을 바라봤다.
“티배… 아니, 천여명. 너는 한국 정부의 편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한국의 적이라고 봐도 되나?”
“그쪽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여명은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으나, 야마우치는 오히려 그런 모호함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보스는 10년 전부터 그룹을 분리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토도는 물론이고, 이제 막 깨어난 다른 빨갱이들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탐욕스러운 용이 그럴 리가….”
“탐욕스럽다고 해서, 멍청한 건 아니다. 보스는 10년 전부터 그룹이 혼자서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
“후미코 여사와 함께 세운 중앙 그룹과 계열사 33개를 남긴 채 나머지 기업은 전부 포기할 생각이었다. 개중에는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노동 집약적 기업들도 있었지. 계획은 완벽했다. 완벽했는데….”
그때, 시스가 끼어들었다.
“한국 정부가 끼어들었군요.”
“…그래, 한국은 우리가 분리할 기업들을 집어삼키려 했다.”
“웃기는 소리, 국가가 대놓고 다른 나라의 기업을 집어 삼키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토도가 반박하기 무섭게, 야마우치는 고개를 저었다.
“합법적으로는 어렵지. 하지만 불법적으로는?”
“….”
“누군지 모를 일본인 하나 바지 사장으로 세우고, 무력을 통해 자본과 자원을 수탈한다…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어떨 것 같나?”
“…그런 건 불가능해.”
야마우치는 피식 웃더니, 갑자기 보안 조끼를 풀었다.
조끼와 두꺼운 방탄복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의 맨살에는…
아물지 못한 상처와 흉터, 그리고 검게 괴사한 살이 가득했다.
“지난 10년간, 한국 정부와의 전투에서 살해당한 스미토모 시큐리티가 102명, 가디언이 11명이다. 내가 마지막 가디언이지.”
“….”
야마우치는 그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쑥 훑으며 말했다.
“너희가 공산당 당비로 영약을 처먹고 있을 때, 우리는 한국 정부가 보낸 요원들과 음지에서 싸웠다. 보호를 대가로 이권을 요구하는 미국과 프랑스의 더러운 제안을 거절하고, 피를 흘렸다.”
조용하지만, 화살처럼 깊게 파고드는 목소리.
토도와 빨갱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가운데, 야마우치는 다시 옷을 여미며 선언했다.
“하지만 이제 그 짓도 끝났다.”
“…뭐? 어째서?”
“이미 졌으니까. 일주일 전, 우리는 한국에게 대패했다.”
“….”
“처음 보는 짐승 머리 괴물들… 녀석들에게 백 명에 가까운 스미토모 시큐리티가 제압당했지.”
“시큐리티 백 명… 설마 다 죽었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한국의 설명으로는 보안요원과 그들이 호위하던 사장단과 이사진 머리통에 기생충을 처박았으니, 따르지 않으면 전부 머리가 터져 죽을 거라던데.”
“…마폭고.”
시스가 중얼거리자, 야마우치가 거들었다.
“그래, 그런 이름의 기생충이었지. 잘 아는군.”
거기까지 들은 여명은 미국 대사관을 운운했던 용을 떠올리며 물었다.
“다른 국가나 세력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 미국은 대선 중이었고, 마탑에 처형관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지. 그외에는… 와도 의미가 있나 모르겠군. 아마 별 소용없었을 거야. 우리 보스가 직원들의 목숨을 끔찍이 여기거든. 전부 자기 재산이라나? 후, 한국도 그걸 알고 직원들을 노린 거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야마우치는 여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 그리고 너, 천여명. 너도 문제였다.”
“…저요? 제가 뭐요?”
“널 시켜서 아카데미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과 올림피아 본선에 올라온 일본인을 전부 장애인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
“척추를 으깨서 평생 똥주머니를 차고 다니게 해주겠다고, 아주 정성 들여 설명하더군. 그리고 때마침, 네가 선배의 척추를 박살 냈지. 그건 본보기였나?”
“아뇨, 그냥 우연입니다.”
“우연히 선배의 척추를 박살 냈다고?”
“예.”
즉답,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빨갱이 3대장이 황당한 눈으로 여명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치운 시스가 침묵을 밀어냈다.
“흐음, 그래서 저희가 협박하러 온 거로 생각하신 거군요.”
“정확히는, 티배깅이지.”
“티배깅? 그게 뭐예요?”
“…모르면 됐다.”
크흠, 헛기침한 야마우치가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꺼내오는 사이, 여명은 생각을 정리했다.
용, 스미토모, 일본 공산당, 그리고 한국…
복잡하게 꼬여있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가 일본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용도 일본 공산당도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수많은 정치적 거래와 사회적 갈등이 남아있긴 하지만, 뭐, 요약하자면 그렇지.”
여명은 고개를 기울인 뒤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제안? 무슨 제안?”
“몇 달만 버티세요. 그러면 한국 정부, 아니, 괴물들을 부리는 더러운 조직은 전부 사라질 테니, 걱정도 없을 겁니다.”
야마우치는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여명을 바라봤다.
“자네 혹시…?”
“예, 그 혹시 입니다. 제가 그들을 끝장낼 겁니다.”
“….”
고작 청년밖에 안 된 녀석이 내뱉기엔 너무나도 오만한 말.
하지만 야마우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고작 25세의 나이로 오다 가의 당주가 되었고, 변경백은 서른이 되기 전에 세계 정점에 섰다.
저 청년이 그들의 뒤를 따르지 말란 법이 있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불가능할 것 같군. 당장 오늘 제국 호텔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계열사들을 넘기지 않으면 직원들이 죽게 될 거야.”
“….”
“그들의 모든 목숨을 포기하고 조금 전 보스가 했던 말처럼 끝까지 항전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진짜 한국에게 고통받는 용이 아니고서야, 보스는 그러지 않을 걸세.”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애국자들이 왜 일본에서 회의를 여나 했더니만…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애국자 내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라지만, 이게 그들에게 이용당한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명은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오늘 회의를 개박살내면 어떨까요?”
“…허어?”
“마폭고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있습니다. 오늘 회의를 망친 다음, 그녀가 치료제를 만들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겁니다.”
“…마폭고의 치료제는 그렇다 치고, 회의를 망치자고? 어떻게 말인가?”
여명은 타이밍 좋게 정신을 차리는 공산당 위원장과 세 빨갱이를 보며 대답했다.
“여러분들이 절대 꾸밀 리 없는 불가피한 사정… 빨갱이들의 습격을 연출하는 겁니다.”
야마우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셋이 강하긴 하지만, 불가능하네. 전력의 차이가 너무 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빨갱이들이….”
그가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토도가 말을 받았다.
“도와줄 생각 없다.”
“….”
“한국 정부의 협박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너희 더러운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 건 배신이다. 무수히 희생된 우리 동지들을 향한 배신!”
이래서 빨갱이들이란. 그의 선언을 들은 여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사실이라고 보증하면요?”
“네 보증? 네가 뭔데? 기껏해야 재능 좀 타고난 반공 국가의 나부랭이 아닌가?”
“토도, 이 등신아! 저분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공산당 위원장이 그를 말리려 했으나, 여명이 먼저 말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정정해야겠군요. 전 반공 국가에서 태어난 나부랭이가 아닙니다… 노동자죠.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
터벅. 여명은 토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품에서 훈장 하나를 꺼냈다. 스탈린이 직접 준 적기 훈장.
“저, 저 훈장은…?!”
훈장을 알아본 토도가 경악하는 사이, 여명은 자신의 얼굴 절반에 피눈물의 환상을 덧씌웠다.
비전 유물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리네의 양아버지, 벤의 얼굴.
“KGB…? 맙소사.”
다행히 3대장 중 한 명, 스즈키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벤의 얼굴을 알아봤다.
터벅, 여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며 무장 혈청을 꺼내 손에 쥐었다.
혈청을 알아본 사람은 없었지만, 피로 만들어진 붉디붉은 낫과 망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성형 주가시빌리.
“여, 역시 그때 살기를 흡수한 게….”
여명의 어깨 위로 피어나는 검붉은 아지랑이를 보며 3대장 모두가 기겁하는 가운데, 공산당 위원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시스에게 찔린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그는 다리를 부들거리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3대장의 멱살을 콱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모두 기립! 기립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