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499)
을 위한 세계는 없다-499화(499/817)
EP.499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 * *
유산의 가치는 물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물려받는 사람이 정한다.
『대영박물관 소장품 어린 용을 위한 비석 중 발췌』
***
모니터 몇 개만이 빛을 내뿜는 어두운 방.
벙커보다는 암굴에 가까운 그곳에서, 위대한 한국의 국방부 장관은 기밀 무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본 측에서 보상금을 제시했습니다.]“공식적으로? 아니면 비공식적으로?”
[비공식 루트입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김강혁은 상대의 말을 끊었다.
“피해자 놀이를 하고 싶은 건 일본 정부가 아니라 스미토모겠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한 그는 삐딱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한국 의원이 타지에서 죽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일본, 정확히는 스미토모를 짓밟고 그것을 즐기기 위해 왔다는 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국인이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면 공식 루트로 요청할까요?]“공식과 비공식 모두 요구해라. 애국자의 피 값은 비싼 법이다.”
[하오나, 너무 몰아붙이면 스미토모의 용이 미국에게…]“아니, 녀석은 우리 말을 들을 거다.”
[….]“만에 하나 녀석이 말을 듣지 않으면… 스탈린이 했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전해라.”
김강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전기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언급한 사건은 일본 근현대사를 뒤흔든 사건 중 하나였으니까.
‘미일안전조약’에 불만을 품은 스탈린이 일본에 폭주한 주가시빌리를 투입한 사건.
그는 다른 곳도 아닌 미국의 초인들이 지키고 있는 총리 관저를 노렸다.
당연하게도, 생존자는 없었다.
분노한 미국이 일본 공산당에게 보복했지만, 스탈린에게 있어 일본의 빨갱이들은 얼마나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오히려 주일미군이 일본인들을 죽인다며 선동에 이용했으면 했지.
이후 쿠바 미사일 사태, 칠레 참사와 같은 일이 연달아 터지며 주일미군은 일본 내의 영향력을 잃었고, 이는 곧 일본의 좌우 대립이 수십 년간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하필 그 일을 언급하다니.
[바, 반드시 전하겠습니다.]장관이 빈말 따윈 하지 않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무전기 너머의 정보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김강혁은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러면 계열사 쪽 이야기는 어떻게 됐지? 언제 우리에게 넘긴다고 하던가.”
[이번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깨끗이 넘기려면 적어도 6개월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그건 자네의 의견인가?”
[예, 스미토모 측에서는 1년을 요구했습니다만, 제가 임의로 기한을 줄였습니다.]“흠. 1년과 6개월… 둘 다 너무 길군. 4개월.”
[…예?]“4개월 내로 계열사를 넘기라고 전해라. 일주일 늦을 때마다 한 명씩 머리를 터트릴 거라고 덧붙이고. 혹시라도 반항한다면… 당장 내일 스미토모 은행 총재의 머리를 날려버려. 왼팔을 잃으면 용도 주제를 깨닫겠지.”
[그, 그렇게 전달 하겠습니다. 혹시 더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없다.”
짧게 대답을 끝낸 먼저 무전을 끊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반짝이는 암실에 다시 정적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장관은 모니터에 떠오르는 어떤 영상을 보며 흐음, 정적을 밀어냈다.
붉은 별과 용이 대치하고 있는 영상.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화질이 영 좋지 않았는데, 김강혁은 망가진 화질 너머에서도 붉은 별의 자세를 볼 수 있었다.
“양손으로 검을 잡은 기수식….”
그건 용사의 무술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무술이었다. 붉은 별이 사용한 무술의 결과물도 용사의 무술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황금빛 검기가 아닌, 주가시빌리를 닮은 검붉은 검기라니.
“소련이 용사의 무술을 해석한 걸까. 아니면 이번 대 용사가 빨갱이가 된 걸까.”
지금으로서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 쪽이건 말이 되지 않아서?
아니, 둘 다 가능성이 있어서.
후우-길게 숨을 삼킨 장관은 영상을 접고 또 다른 영상을 확인했다.
조금 전에 봤던 영상과 다른 각도, 다른 장소에서 붉은 별을 찍은 영상이었….
그때, 모니터 구석에 작은 문자가 떠올랐다.
[천여명이 천둔검법을 습득했다.]조웅찬 장관 주변에 심어 놓은 간자에게서 온 문자였다. 발신일은 바로 어제.
“…결국 세뇌된 건가.”
문자를 확인한 장관의 목소리에는 짙은 실망이 담겨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대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 나이대의 한국인들이 늘 그렇듯, 장관은 실망에 익숙했다.
순식간에 감정을 정리한 그는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붉은 별을 보는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일본 경시청은 파괴활동방지법과 초인 등록법에 의거,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강도 높은…]심각한 얼굴로 대본을 읽는 아나운서가 비치는 대형 전광판이 비추는 거리.
흔히 ‘아키하바라’ 라고 불리는 바로 그곳에서, 이시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감, 비디오 게임, 컴퓨터 전자기기, 애니메이션 등 온갖 취미 상품들이 가득한 거리라니.
그녀는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뭔가를 발견하곤 형부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형부, 저기! 저기 가요.”
마찬가지로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고 있던 여명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살짝 당황해서 되물었다.
“메이드 카페? 처제, 저런 곳은 좀….”
“네? 아뇨, 아뇨! 거기 말고 옆에 있는 가게요!”
여명은 그제야 처제가 가리킨 곳이 정확히 어딘지 깨달았다.
콜라 카페. 32가지 콜라 맛을 즐길 수 있는 콜라 매니아들의 성지… 크흠, 살짝 부끄러워진 여명은 헛기침을 내뱉은 뒤 걸음을 옮겼다.
비비 꼬인 계단을 타고 올라간 카페는 나쁘지 않았다. 이름처럼 콜라를 주력으로, 햄버거를 보조로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꽤 유명한 곳인지 자리가 거의 만석이었다.
“형부, 여기 있는 거 다 시켜도 되죠?”
“…32가지 전부?”
“네! 아, 그리고 라날한테 줄 거까지 두 잔씩 시킬게요.”
“아카데미까지 가져가면 김 다 빠지지 않을까?”
“형부가 인벤토리에 넣어가면 되죠.”
“….”
결국, 여명은 처제가 먹을 32컵에 라날이 먹을 32컵을 합쳐 총 64컵의 콜라를 시켜야만 했다.
청소부 시절 금전 감각이 떠올라 살짝 아까운 느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시스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워한 덕분이었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십 잔의 콜라를 맛보는 처제를 구경했다.
녹차 맛부터 솜사탕, 팥, 귤, 심지어 피자 맛까지.
처제가 ‘이건 쓰레기’ ‘이건 먹을 만하다’ 같은 비평을 남기며 수십 잔의 콜라를 비울 때쯤.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합석해도 되겠나?”
아는 얼굴이 테이블에 찾아왔다. 기다란 장발을 늘어트린, 어딘가 껄렁껄렁해 보이는 중년인.
“예, 괜찮습니다. 제 옆에 앉으시죠.”
여명은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렸을 처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레어에서 봤던 알라이 로피의 인간형 모습이었으니까.
“저희를 미행하신 겁니까?”
자리에 앉는 그를 향해 여명이 물었다. 용은 눈썹을 으쓱였다.
“그래, 고급 음식점을 마다하길래 뭐 하나 해서 따라와 봤다. 근데 고작 한다는 게… 관광이야?”
“예, 생각보다 볼 게 많아서 잘 놀고 있습니다.”
“….”
용은 쯧쯧 혀를 찬 뒤, 아직 마시지 않은 처제의 콜라 잔에 손을 뻗었다. 짝! 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손등을 때렸다.
그가 인상을 콱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어린 용들은 하나 같이 싸가지가…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 박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병이고요.”
“….”
다른 용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알라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시스와 여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됐고, 일 이야기나 하지. 조카.”
“…조카요?”
“그럼 조카지. 촌수랑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조카.”
“….”
그럼 거의 남남 아닌가? 갑자기 비늘 달린 가족이 생긴 여명이 당황하건 말건, 용은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정말로 상황이 네 말대로 흘러가는 중이야. 특히, 한국에게 유예기간을 받았다. 고작 4개월이긴 한데….”
“…제 예상보다 더 받으셨네요. 전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일 줄 알았는데.”
“한두 달? 이런 상황에서 주식 시장이 그렇게 빨리 복구 될 리 없… 아니, 그러면 그 전에 마폭고를 제거할 약을 만들 수 있는 거냐?”
“예, 이쪽에 실력 있는 연금술사가 있거든요. 수십 명 분량이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라쉬크가 야근을 좀 해야겠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도 살리고, 재벌과 인연을 만들 기회 아닌가. 구더기 공주도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마도.’
어쨌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은 직원에게 콜라를 시키곤 덧붙였다.
“아, 그리고 조카. 네가 그거라는 거, 이 아이도 아냐?”
“…그거요?”
“그, 이거 말이다.”
용은 손가락으로 여명과 자신의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황금색 눈동자… 용사 혈통을 말하는 거였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이 아가씨 말고도 아는 사람이 꽤 있나 보군…?”
그때, 복숭아 맛 콜라를 비운 시스가 끼어들었다.
“형부 주변 여자들은 다 알고 있어요.”
“여자들…?”
알라이 로피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씨가 어디 가겠나. 변경백이 특이 케이스지.”
“…변경백을 만난 적 있으십니까?”
“아직 지구로 넘어오기 전에, 딱 한 번.”
“어쩌다가요?”
여명이 관심을 보이자, 용이 의외라는 듯 눈을 실룩거리며 대답했다.
“별로 대단한 인연은 아니야. 성녀를 유혹하려고 찾아갔는데, 녀석이 내 모가지에 칼을 들이밀더라고.”
“….”
“근데, 나는 원래 임자 있는 여자는 안 건드리거든. 그, 설마 성녀에게 임자가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한 뒤에 그대로 헤어졌지.”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푸흡, 시스가 콜라를 뿜었다. 여명은 얼굴에 튄 콜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을 본 용이 슬그머니 물었다.
“어… 혹시나 해서 묻는데, 조카. 너 변경백 아들이니?”
“…성녀님의 아들입니다.”
“아.”
직후, 테이블 위로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알라이 로피는 무안한 듯 턱을 벅벅 긁다가, 조금 억울한 듯 말했다.
“어… 용이 워낙 긴 세월을 살다 보니, 종종 이런 일도 있지. 그리고 솔직히… 이쁜 여자한테 끌리는 건 수컷의 본능 아니냐? 응? 너도 이 핏줄을 이어받았으면 알잖아?”
“전 아닌데요.”
칼 같은 대답. 용은 한 번 더 콧등을 긁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 이번 대 성녀 본 적 있지?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잖아? 반반하니 아주 이쁘던데, 너도 그 애를 보면서 나랑 비슷한 감상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네.”
“혹시 너도 임자 있는 여자 안 건드리는 거냐? 그, 성녀한테 남자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그의 말꼬리가 길어지려는 찰나, 보다 못한 시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형부가 그 남자예요.”
“아. 여자‘들’이 그런 뜻이었어?”
용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침묵.
그리고 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침묵이 길어질 때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용이 대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선물 가지고 왔는데, 보겠니?”
“….”
“이번에 도와준 보답도 있고, 또 친척 사이라 괜찮은 물건을 가져온 건데, 그….”
그가 말끝을 흐리며 상자를 열자, 작은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느다란 금실 수십 가닥을 꼬아 만든 반지였다.
투박하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반지… 비슷한 장신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여명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거 혹시…?”
“오,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너도 비슷한 거 가지고 있는 거니?”
여명은 대답 대신 인벤토리에서 팔찌를 꺼냈다. 기타 줄보다도 가늘지만, 그 위로 나뭇가지와 나뭇잎 장식이 세세하게 새겨진 금팔찌.
그건 시카고에서 모리네에게 받았던 용사의 유물이었다.
“오, 용사의 팔찌… 진품이군. 거기다 벌써 인증까지 받았나? 훌륭한 걸. 변경백이 물려받은 건 이건가.”
혈족이라는 걸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용은 즐겁게 웃었다.
“이 반지도 초대 용사께서 남기신 유품이다. 우리 일족에게 전해지는 물건이지. 우리 어머니도, 나도 별 필요 없어서 안 썼지만… 너라면 쓸만할 거다.”
조금 전의 말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그는 곧바로 여명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하지만 여명은 바로 받지 않고 조심스레 상자를 밀어냈다.
“이렇게 귀한 건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본주의에서 배운 게 뭔지 아느냐? 가치가 상대적이란 거다. 나에게는 이깟 반지보다 내 휘하의 직원들이 더 귀해.”
“….”
“그러니 거부하지 말고, 제 시간 내로 치료제를 구해 주거라.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이다.”
여명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상자를 받았다. 그가 살짝 마나를 불어넣자, 곧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44대] [양도에 의한 소유권 이전을 확인했습니다.] [사용자를 변경하시겠습니까?]***
같은 시각, 아카데미 지하 해저 터널 깊숙한 곳.
불빛 하나 없는 기다란 계단 위에서, 대마법사의 귀신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둠에 파묻힌 그의 눈동자에 비추는 건 하나도 없었으나, 맑은 눈빛은 그런 어둠조차 꿰뚫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대답해줄 사람 중 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한 명은 차원 너머에 있는 까닭이었다.
[너는 알고 있었느냐? 내가 기어코 이것을 발동 시킬 거라고 예지했느냐?]그럼에도, 귀신은 계속 말했다.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므로.
[부디 몰랐기를 바란다. 그저 네가 뿌려 놓은 씨앗 중 하나가 꽃을 피운 것이길. 이 모든 게 그가 선택한 결과이길 바란다.]성녀. 그는 나오지 않는 마지막 말을 삼킨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그를 찾아갈 시간이었다.